매년 가계부를 알차게 쓴다는 사람이 대단해 보였다. 앱으로 쓰고, 다이어리에 쓰고 노력해 봤지만 꾸준히 쓰지 못해서이기도 하고 결론적으로는 도무지 관리가 안 되는 상태라 방치한 지 오래라서다.
한때는 십원 단위까지 오차 없이 깐깐하게 가계부를 쓰던 때도 있었다. 1년 내내 구두 하나, 운동화 하나, 가방은 딱 한 개 그나마도 모두 최저가로 구한 특별 세일 상품으로 버텼다. 한창 꾸미고 다닐 시기였지만 내겐 모든 게 사치였다. 식사는 무조건 가성비 따지고 하루 1.5끼만 먹으면서 버텼다. 한 끼는 저렴한 식사로 어떻게든 먹긴 먹고 0.5끼라 함은 이것저것 돈 안 들이거나 거의 안 들여서 뭔가 먹을 수 있는 걸 먹어서 채운 0.5끼. 다이어트가 아니라 입에 들어가는 음식을 줄여서라도 돈을 모으고 싶었다.
악착같이 절약하고, 열심히 벌고 그렇게 모았는데 돈은 눈앞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복학 후 납부할 수업료와 어학연수 다녀올 돈을 맞춰서 모아놨지만 그 돈은 다른 곳으로 가버렸다. 남에게 사기를 당한 건 아니니 덜 억울할까? 결론만 놓고 보면 또 그렇지도 않다.
나를 ATM 취급하던 가족, 특히 엄마에게 받은 마음의 상처는 남에게 사기당한 것과 비교했을 때 크다고 헤야 할지 작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사회생활 초반, 하도 내 월급을 호시탐탐 노리길래 급여 통장을 두던 곳에서 빼서 가방에 넣어뒀더니 출근 전 내 가방을 뒤져 통장을 살펴보다가 현장에서 그 모습을 목격한 나를 보고도 아무렇지 않아 하던 엄마의 얼굴. 어떤 돈은 정말 필요했을 돈이다. 때로는 엄마의 수술비이기도 했고, 내 명의로 발급받아 가서 나는 한 번도 만져보지 못한 카드의 현금 서비스 돌려 막기를 막는 돈이기도 했다. 어떤 달은 내 월급을 송두리째 가져가 버려서 단 한 푼도 만져보지 못한 적도 있었고. 결국 엄마 때문에 신용불량자가 될 뻔한 적도 있었다.
20대의 나에게 은행 창구의 남자 직원이 충고를 해줬다. 카드는 가족 간에도 절대로 두 번 다시 빌려줘서는 안 된다고. 아, 그런 거였구나. 나는 온 가족이 너무 당연하게 굴길래 그래야 하는 건 줄로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고 하네? 혼란스러웠지만 통장에 있는 돈을 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니(출금 정지 당함) 그 말이 맞는 것 같았다.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에서 한 간호사가 엄마가 진 빚 때문에 통장에 든 돈을 뺄 수 없게 되고, 식사를 할 돈도 없어서 굶으면서 일하는 모습을 보면서 혼자 얼마나 평평 울었는지 모른다. 물론 극 중의 설정처럼 엄마가 도박 중독이 되어서 빚을 진 건 아니었지만. 다단계에 속아 수맥차단 돗자리와 정수기, 온갖 이상한 물건을 사들여 집에 쌓아뒀고 보험설계사로 일하면서 내 명의와 내 돈으로 마음대로 이런저런 상품에 가입해 놓고 찾을 수도 없고 쓸모도 없는 돈으로 날렸다는 게 다르다면 다른 점이다.
그렇게 트라우마가 쌓여서 돈을 모으면 돈이 사라진다는 공포감에 사로잡혀 어쩔 줄 모르는 상태가 된 지 꽤 오래되었다. 신기하게 목돈을 모으면 정확하게 딱 그만큼의 금액을 요구했다. 우연이라 하기엔 여러 번 같은 상황이 반복되었다. 늘 허탈했다. 어떻게 그렇게 우연이 겹치는 걸까. 마치 내 적금통장 만기일만 기다린 것처럼.
연차가 높아지고 연봉이 점점 오르면서 이전이라면 생각하지 못하는 숫자의 급여가 통장에 찍히는데도 불안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돈을 다 써버려야 한다는 강박을 지나 버는 돈 보다 더 써버리는 습관을 만들고 말았다. 힘들게 벌었으니 이 돈은 나를 위해 써야 한다며 즉흥적인 소소한 소비를 하거나 큰 고민 없이 목돈을 지출하는 일이 잦아졌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ATM 취급을 당하고 있었다. 이전과는 다른 양상이지만 본질적으로는 달라진 바가 없었다. 내 공포와 소비습관은 돈을 모으면 그 돈이 모두 사라진다는 경험에서 시작된 것이고, 결과적으로 빚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상태로 몰아넣었다. 어떻게 해도 빚이 생긴다는 잘못된 사고.
이런 요지의 이야기와 고민을 주치의에게 털어놓았더니 아래와 같은 피드백을 줬다.
소비습관을 고치는 데 노력하고, 돈을 모으는 것에 대한 공포를 벗어나 보세요. 일단, 돈을 모으고 그 후에 어쩔 수 없이 목돈을 내드려야 하는 상황이 온다면 본인의 몫을 꼭 떼어놓고 내드리세요. 전처럼 다 내드리지 말고요. 얼마가 있는지는 본인만 아는 거니까요. 예를 들어 100만 원이 모여 있다면 50만 원만, 1,000만 원이 모여있다면 500만 원만 이런 식으로요. 절반 이하로 내드리면 더 좋겠지만요.(웃음)
얼마나 버는지 너무나 궁금해하는 엄마에게 철저하게 수입을 알려주지 않고 살아왔으니 지레짐작만 할 뿐 내 수입을 알 수는 없다. 그런데도 내 무의식 속에는 마치 엄마가 훤하게 통장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느껴졌나 보다. 반복되는 우연 때문에 체념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러게, 왜 저런 생각을 못했나 싶어서 진료실에서 환하게 웃었다. 가스라이팅을 오랜 세월 당하다 보면 아예 그 안에서 벗어나지 못한 다는 게 이런 거구나 싶었다.
요즘은 회사를 그만두고 쉬고 있으니 아예 수입이란 것이 없다. 수입이라면 오로지 실업급여뿐. 이제는 과소비라는 걸 하려야 할 수가 없으니 소비습관을 고치는 데 적절한 시기임에 틀림없다. 그래서 정말 오랜만에 노트로 된 가계부를 샀다. 들어오는 돈이 적으니 나갈 돈도 당연히(제발) 적을 테니 복잡할 것도 없을 수입과 지출이라 아날로그 방식대로 노트에 직접 적는 게 어려울 것 같지 않았다.
소비습관을 바로 잡는 게 목표! 오랜 시간 잘못 자리 잡은 습관을 고치는 건 꽤 어려운 일이지만 이번에는 그 누구도 아닌 스스로를 위해서, 현재와 미래의 나를 위해서 꼭 가계부를 쓰려고 한다. 두려워도 용기를 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