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애전환기 마흔
20년 전 여름의 어느 날 오후. 출판사 창업 관련 미팅을 하고 집에 들어오던 길이었다. 우편함에 꽂힌 몇 개의 우편물에서 뜯어볼 필요 없는 광고를 반송함에 넣고 손에 집어든 건 건강보험관리공단에서 보내온 봉투였다. 손으로 잡아 보니 제법 두툼했다. 일반적인 고지서는 아닐 것이고 그럼 도대체 뭘까? 궁금한 마음에 집으로 올라가는 계단에서 서둘러 봉투를 뜯는다. 뜯기 편하게 만들어둔 오픈용 점선이 있음에도 손가락은 이미 급하게 봉투를 이리저리 지저분하게 뜯고 만다.
두툼한 종이의 첫 장을 펼쳐보니 ‘생애전환기’라는 글자가 눈에 들어와 박힌다. ‘생애전환기... 전환기’ 입으로 반복해서 읽어본다. 그래 내 인생의 전환기. 17년 동안의 직장생활, 사내정치에 넌덜머리가 나 프리랜서 생활을 조금 하다가 창업을 준비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주변 선후배들이 하나씩 1인 출판사를 창업했다는 소식을 듣게 된 지도 벌써 3년이 넘어서고 있었다. 1인 출판사 차려서 돈 벌었다는 사람 거의 없고, 쫄딱 망하거나 근근이 유지하면서 회사 다니면서 받았던 돈만큼 벌면 다행이고 대부분은 그것에 살짝 못 미치는 돈을 번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런 이유로 나름 안전장치로 선택한 것이 전자출판이다. 종이책 출판을 메인으로 하기에는 제작비에 대한 부담감이 크고 가지고 있는 자본도 없기 때문에 리스크가 너무 크다. 그래서 초기 자본이 상대적으로 덜 들어가는 전자책 출판을 메인으로 하는 1인 출판사를 창업하려던 것이었다. 이러한 삶의 전환점에서 받아 든 생애전환기 건강검진 대상자 안내장은 심오하게 받아들여졌다.
한 해 전 마지막 직장에서 퇴사 전에 건강검진을 받았기에 특별히 건강에 문제가 없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지난 1년 사이 내 몸에 무슨 변화라도 생겼거나 병이 생긴 건 아닐까 하는 마음에 지레 겁부터 먹었다. 사서 걱정하는 버릇이 어디 가랴. 하지만 그저 기우라고 보기에는 주변에서 들려오는 소식이 사나웠다. 동기, 선배, 후배 할 것 없이 각종 종양과 암을 한 번씩 안 겪은 사람을 찾기가 힘들 정도였다. 심각한 질병으로 세상을 떠난 사람도 한 두 명은 있었고 수술하고 완치가 된 경우도 이후에는 전과 같은 생활을 하지 못하는 경우가 더 많았다. 그랬다. 마흔이라는 나이는 육체적으로 풍파가 한 차례 닥쳐도 이상하지 않을 그런 나이였다.
질병관리과 과장입니다. ** 선생님 되시나요?
건강검진 안내서에 적힌 대로 전날 금식을 하고 안내서에 적힌 병원을 찾아가 성실하게 검진을 받았다. 불안한 마음이 다 사라진 건 아니었지만 별일 없을 거라는 생각으로 스스로를 달랬다. 그렇게 검진을 받고 얼마 후 휴대폰으로 낯선 번호가 뜨며 전화가 걸려왔다. 보통 낯선 번호는 잘 받지 않지만 어쩐지 스팸 번호는 아닌 것 같아 반신반의하며 경계심 가득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네, 안녕하세요. 여기는 건강보험관리공단입니다. 저는 질병관리과 과장입니다. 김수진 선생님 되시나요?”
“네, 그런데요. 건강보험관리공단에서 왜 저를...”
그랬다. 병원이 아니라 건강보험관리공단이었다. 게다가 담당자는 질병관리과의 과장이라고 했다. 내 이름을 정확히 말하고 있어서 잘못 온 전화도 아닌 게 확실했다.
“선생님 이번 생애전환기 건강검진받으셨죠? 어제 검진 결과가 나와서 이렇게 전화드렸습니다. 선생님께서 공단으로 방문을 꼭 해주셨으면 합니다. 저희가 직접 뵙고 말씀을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가능하다면 보호자분과 함께 방문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아니, 무슨 일인데요? 무슨 일인지 알아야 방문을 하죠.”
이유를 설명하지 않고 무작정 방문해 달라는 공단 직원 때문에 신경질이 났다. 안 그래도 지금 이번 달 전자책 출간 일에 맞춰 책을 내느라고 며칠 째 잠도 못 자가며 마감 중인데 어디를 오라 가라 하는 것인지 부아가 치밀었다.
“아, 선생님. 그게 전화상으로 말씀드리기가 조금 어려운 부분인데. 음, 우선 간단하게 말씀드리자면 선생님의 검진결과에서 특이한 사항이 발견되었습니다. 지금 단정 지어 말씀드리기는 어렵지만 희귀병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래서 직접 뵙고 말씀드리고자 이렇게 전화를 드렸습니다.”
“네? 뭐.. 희.. 희귀병이요?”
갑자기 피가 몸에서 다 빠져나가는 것처럼 어지럽고 기운이 하나도 없었다. 눈앞이 하얗고 손발이 부들부들 떨리다 못해 윗니와 아랫니가 덜덜덜 부딪히는 소리가 전화기 너머 직원에게까지 들릴 지경이었다. 심호흡을 하며 겨우 마음을 가라앉히고 면담 일정을 잡고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다리에 힘이 없어 주저앉음과 동시에 엉덩방아를 찧으며 나동그라졌다. 두 다리를 하늘로 구부정하게 뻗은 채 누워 있으려니 눈물이 줄줄 흘렀다.
‘너무하다. 정말 너무하다. 이제 내 사업 좀 해보려고 시작한 지 얼마나 됐다고. 어떻게 이래. 인생이 왜 이렇게 잔인해. 무슨 그렇고 그런 암, 빨리 발견하면 완치가 가능하다는 그런 암도 아니고 무슨 희귀병이란. 얼마나 희귀하길래 병명도 말을 안 해주고 와서 들으라는 거야. 이게 뭐야.’
이런 생각을 하며 그냥 울고만 있었다. 그때 내 옆으로 미오가 다가왔다. 걱정스럽지만 다정한 눈길을 보내며 천천히 다가왔다. 50일 된 아기 때부터 나와 함께한 러시안 블루 고양이 미오. 남 앞에서 울지 않는 성격 탓에 힘들면 혼자 집에서 펑펑 울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신기하게도 미오가 옆에 와서 나를 달래주곤 했다. 손등으로 훔쳐낸 내 눈물을 핥기도 하고 앞발을 들어 내 팔을 톡톡 치며 울지 말라고 하기도 했다. 가끔은 그저 옆에 다가와 몸을 붙이고 따뜻한 체온을 전하며 내 울음이 잦아들 때까지 곁을 지켰다. 내 옆으로 다가온 미오는 곁을 맴돌며 나를 살피다가 앞발을 들어 내 팔에 가만히 얹는다. 흐느끼며 눈물을 닦느라 들썩이는 내 팔 위에 미오 앞발이 함께 위아래로 움직인다. 보드랍고 따뜻한 미오의 발을 느끼며 나는 겨우 눈물을 멈췄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출간일정이고 뭐고 지금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나는 얼마나 살 수 있을지 혼자 막연하게 추측해 봤다. 설마 한 달? 그렇게 짧지는 않겠지. 아무리 못 해도 3개월은 되겠지. 문제는 그 기간 동안 병원 침대 신세만 지고 고통스럽게 온갖 호스를 주렁주렁 달고 약 기운에 의지해 연명해야 하느냐 마느냐였다. 설사 내가 얼마 못 산다고 해도 그런 식으로 삶을 마치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 이왕 이렇게 된 거 건강보험관리공단에 가서 속 시원하게 이야기나 들어보자. 그리고 남은 내 인생을 어떻게 마무리할지 결정하자고 다짐했다. 부모님에게 알려봐야 걱정만 끼쳐드릴 것 같아 보호자 없이 혼자 가리라고 마음을 굳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