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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라구름 Feb 29. 2024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모처럼 마음에 맞는 사람들과의 모임을 갖고 한껏 들뜬 마음으로 귀가해 아직 그 여운이 가시지 않아 에너지가 차오른 상태였다. 직전까지 사람들과 나누었던 이야기가 귓가에 맴돌다 사라지는 게 아쉬워서 다시 꺼내 자꾸만 되새기고 있을 때였다. 늦은 밤, 부고 문자가 날아들었다. 


 불과 일주일 전 내가 먼저 연락해 안부를 물었던 지인에게서 온 부친상 연락이었다. 치매로 몇 년 간 투병하시던 아버지를 결국 요양병원에 모시게 되었고, 간병인을 두는 것에 대해 가족들의 마음이 불편한 부분이 있어 돌아가면서 아버지를 간병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딸 둘, 아들 하나, 건강하신 어머니까지 계시니 4명이서 분담하고 있다고. 그리고 몇 마디 근황을 듣고 소소한 수다를 나누다가 대화를 마무리했었는데 일주일만에 부고 연락을 받았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조의 문자를 보내고 조문 갈 일정을 이야기하다 순간 멍해졌다. 내 아버지의 부고를 전하던 기억이 떠올랐다. 카카오톡의 히스토리를 타고 올라가 그때를 확인했다. 지금 연락 온 내 지인에게 내가 아버지의 부고를 전하던 그때를. 2022년 3월 28일, 그러니까 딱 1년 11개월 전의 일이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2년이 채 되지 않았다는 것에 놀랐다. 기억은 뒤죽박죽이었다. 


 아버지의 암투병과 그 후 극심하게 고통스러워하시던 시기의 일, 돌아가실 무렵의 기억이 한데 뒤엉켜 있다. 엠뷸런스를 타고 병원 응급실에 수시로 실려 가던 일. 자리가 없어 응급실 밖에서 몇 시간이고 구급차에서 대기하던 일. 선명하게 기간별로 나눠서 기억이 나는 게 아니라 그냥 뭉친 반죽처럼 단단하게 굳어서 어느 한편에 콱 박혀 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뒤 두 달 만에 여러 가지 사정으로 어머니와 연락을 끊었다. 그 또한 상당한 충격과 고통이었기에 심정적으로는 부모님을 연달아 잃은 것 같은 상태였다. 그래서일까, 마음속에서 그 기억에 대해 정확히 떠올리는 것을 거부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미 지나간 일이라고, 한참 지났다고 기억 저편으로 꼭꼭 밀어 넣어버린 것일지도. 


 수년간 아버지 병간호로 엄마는 많이 지치고 힘들었다. 나는 외동이라 기댈 다른 형제도 없었고 병간호를 하기엔 엄마 역시 수술을 해야 할 환자였다. 아버지의 암보험으로 나온 돈으로 엄마의 디스크와 무릎 관절 수술을 해야 했다. 두 분 다 환자였는데 아빠가 좀 나아질 무렵에는 엄마를 돌봤고 엄마가 좀 나아진 무렵에는 아빠를 돌봤다. 그때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했지만(병원비 및 기타 금전적인 지원, 의사와 보호자 상담을 하고 치료 방향을 결정하는 일, 각종 서류를 떼어 보험사에 제출하는 일, 입원에 필요한 갖가지 물품을 사는 일, 간호간병 통합병동을 알아보는 일, 방치된 본가를 정리하는 일, 대학병원 퇴원 후 입원할 요양병원을 알아보는 일, 그 외 암치료에 대한 정보를 모아 공부하고 알려드리는 일) 휴직을 한다거나 연차를 모두 소진해서라도 긴 휴가를 내서 주보호자 등록을 하고 오랜 기간 내가 직접 간병을 하는 일은 하지 못했다. 


 아버지가 입원해 계신 사이 병문안을 갔을 때 엄마가 잠시 자리를 비웠고 의사가 소변줄 처치 후 마무리를 미처 하지 못한 상태에서 아빠의 아랫도리가 제대로 가려지지 않은 채 내려와 있었고, 옆에는 핏물이 흥건한 통이 있었다. 어이없게도 나는 경악하다시피 작지만 끔찍한 소리를 흘려냈고, 피를 보고 주저앉아버릴 뻔해서 의사가 놀랐을 지경이었다. 간병을 하다 보면 수시로 피가 섞인 소변을 버려야 하고, 여러 응급상황에도 대처해야 하는데 이런 꼴을 보여서야 간병이 어떻게 가능하겠는가. 한참 전 엄마가 다른 수술로 입원했을 때 링거 바늘이 잘 꽂히지 않아 피가 역류해서 급히 간호사를 호출했는데 다시 링거를 꽂는 과정을 옆에서 보지 못해 울렁거리는 속으로 잽싸게 병실 밖 복도 화장실로 달려 나가 진정을 하며 눈물을 훔치던 나였다. 


 가족을 간병하면서 대소변 치우는 일이나, 피를 비롯해 가래, 토사물 등을 치우는 일이 비일비재할 텐데 이런 상태의 나라니. 코로나 시국이라 상주 간병인으로 등록된 한 사람만 병실에 드나들 수 있다는 것도 핑곗거리가 되었다. 스스로 되물었다. 피를 보면 주저앉아버리고, 주삿바늘 들어가는 걸 봐도 어지러운 건 맞는데 직접 간병할 만큼 부모님을 사랑하지 않은 거 아니야? 나는 스스로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버텨왔다. 대답을 하면 정말 무너져서 다시는 일어나지 못할 것만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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