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삶을 이야기할 때 스스로 또는 타인에게 빛나는 삶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일단 내 삶에 대해, 지금의 나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나의 시들어버린 삶, 나의 지친 삶, 나의 빛바랜 삶, 나의 무너진 삶, 나의 엎어진 삶... 뭐 이런 표현들이 주르륵 떠오르는... 좀 더 긍정적으로 생각해 보자고 다시 고개를 저어 보고 말해봐도 나의 휴식 중인 삶, 나의 대책 없는.. 아 긍정적으로. 하, 잘 안된다. 아무튼.
그런데 책 제목이 위풍당당하게 <나의 빛나는 삶>이다. 물론 문자 그대로의 뜻만 담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사실 그대로라고 해석해도 문제는 없다. 저자인 마일스 프랭클린은 호주의 여성 작가이고 그의 이름을 딴 마일스 프랭클린 상이 호주 문학상의 권위 있는 상으로 남아 있다. 이 책은 저자가 19세 때 쓴 소설로 1890년대를 배경으로 하는 이야기로 1901년에 발표되었다. 125년 전의 이야기임에도 어쩐지 여성의 삶은 크게 변화하지 않았다는 것이 씁쓸하다.
이 소설의 주인공 시빌라는 자신의 인생을 스스로 선택하고 개척할 기회를 박탈당한 수많은 여성들의 삶을 보며 그 길을 걷지 않는 것을 선택한 용기를 지녔다. 자연을 사랑하고, 노동으로 생활을 영위하는 것을 숭고하고 보람차게 여기는 여성이고 술에 절어 살면서 집안의 얼마 안 되는 돈마저 술값으로 탕진하고 마는 아버지와 그런 결혼 생활에 한숨을 내쉬는 어머니를 보며 자라났다. 125년 전이나 지금이나 이런 가정의 모습은 왜 이리 변함이 없는 건지 답답함을 느끼다가 여성의 참정권이나 인권의 보장이 그리 긴 역사를 지닌 게 아님을 깨닫는다.
'나는 나의 본모습을 부정하고 다른 사람인 척하며 사는 게 얼마나 부질없는 짓인지 잘 알고 있었다. 이처럼 치열한 경쟁의 시대에, 재능이 아닌 ‘기회’가 전부였다. 그러나 운명은 내게 단 한 번의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 그래서 절망한 나는 내게 주어진 옷감을 보고 그에 맞춰 옷을 지어 입기로 마음먹었다. 신의 뜻으로 정해진 삶에 나를 꿰맞추려 애썼다. 그렇게 나는 내 영혼을 짓이기고, 짓눌렀다. '
놀랍게도 이 문장은 125년 전에 발표된 소설 속 문장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삶의 조건에는 별 차이가 없었던 것 같다. 결국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악이란 마치 너무 강한 체스 상대처럼, 선이 한 수를 내디디려 할 때마다 바로 옆에서 그 수를 무력하게 막아버렸다.... 울퉁불퉁한 삶의 여정에서 손을 내밀어 줄 누군가가 필요했지만, 아무도 없었다. 그리하여 나는 열여섯이라는 나이에 사흘 밤낮을 찾아 헤매 다녀도 다시없을 비뚤어진 냉소주의자, 무신론자가 되어 있었다.'
기회의 차별이 결국 평등한 출발선에 서지 못해서 벌어지는 것임을 일찍이 파악한 열여섯의 시빌라는 스스로의 힘으로 세상과 맞서 나가기로 결심한 셈이다. 그 외롭고도 두려운 마음을 접고 당차게 한 발씩 내딛는 모습을 보며 나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쥐게 되었다. 페미니즘이라는 표현조차 없었던 시기에 여성으로서의 주체적인 삶을 고민하고 실행했던 작가의 삶이 자전적 소설에 담겨 있었다.
안타깝게도 작가의 연보가 수록되어 있지는 않았고, 작가의 다른 책도 우리나라에 번역되어 출간된 적이 없는 것 같아 아쉬웠다. 19편의 작품을 펴냈다고 하니 이 책을 기점으로 다른 책도 판권을 얻어 출판되기를 기다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