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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라구름 Nov 25. 2015

내 슬픈 잔치여, 안녕

국수와 엄마

곧 영하로 기온이 내려간다는 일기예보를 보고 있자니 체온이 뚝 떨어지는 것 같았다. 한기가 느껴지는 몸을 따뜻하게 해줄 따끈한 국물이 생각났다. 국물이 있는 식사, 뭘 먹을까 고민하다가 어느새 발길이 근처 국수집으로 향한다.


‘오뎅국수 하나 주세요.’


국수를 좋아하는 편은 아니다. 빵이나 국수는 제대로 된 식사라기보다 식사 대체용이라는 느낌이랄까. 특히 국수는 나에게 있어서 하나의 단어를 떠올리게 만든다.


가난


지금도 누군가는 밥을 먹을 수 없어서 국수로 끼니를 때우고 있을 것이고, 나 역시 그랬다. 한때는 잔치국수로, 한때는 라면으로 끼니를 해결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이유로 지금의  내가 밥순이가 된 것인지도 모른다. ‘뭐니 뭐니 해도 식사는  밥이지!’라고 외치는. 아무리 그래도 삼시세끼 밥만  먹고살면 지겨우니까 이따금 다른 것도 먹긴 먹는다. 라면도 먹고 국수도 먹는데 국수 중에서 내가 절대 안 먹는 국수가 하나 있다.


잔. 치. 국. 수.


평생 먹지 않을 잔치국수

잔치국수가 나에게 뭔가 잘못했을 리도 없고 나 역시 잔치국수에 실망했거나 화가 난 건 아니다. 먹다가 체해서 지독하게 앓았던 것도 아니고(잔치국수가 먹다 체하긴 좀 어려운 음식이기도). 그럼에도 잔치국수는 절대 먹지 않는다. 잔치국수는 나에게 슬픔으로 기억되는 한 시절을 자동반사로 떠올리게 만들기 때문이다.


멸치 육수로 깊은 맛을 우려낸 국물이 끝내주는, 계란과 고기 고명을 올려주는  소문난 국수집에 가서도 잔치국수 말고 다른 국수를 주문하고 만다. 잔치국수를 외면한다.


마지막으로 먹은 잔치국수는 중학교 1학년 무렵에 먹었던 잔치국수다. 남의 집 살이라고는 해본 적 없는, 돈은 필요하면 어디서 저절로 생겨나는 건 줄 알고 살았던 시절이 저물고 쫄딱 망해서 방 두 칸짜리 전셋집으로 이사를 온 게 초등학교 6학년 때. 심지어 화장실도 집 밖에 있었다. 바로 공용화장실. 대충 지어 올린 2층 집이라 겨울이면 수도가 얼어 터졌고, 1층 마당 끝에 있는 화장실도 얼어 터져 2층에서 들통에 뜨거운 물을 데워 들고 내려가서 볼 일을 해결해야 하는 그런 집이었다. 그럼에도 그럭저럭 먹고는 살았다. 잔치국수를 먹어야만 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어느 날 엄마는 침통한 얼굴로 부엌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미안하다. 얘들아. 그런데 정말 이것 밖에 해줄 게 없구나. 쌀이 떨어졌는데 살 돈이 없어. 시장에서 국수를 사 왔어. 그런데 국수 말고는 살 수 있는 게 없어. 계란이나 파도 없고 그냥 맹물에 소금만 넣어서 끓여줄게. 이거라도 먹어두렴.


연탄불을 막 갈아 올린 참이라 불이 세지길 기다렸다가 냄비에 정말 맹물에 국수를 넣고 소금 간만 한 잔치국수를 끓여주셨다. 맛이 없었다. 아니, 맛이라고 할 게 없었다. 200원짜리 굵은 다발의 소면을 풀어 끓인 국수는 그렇게 나와 오빠의 뱃속으로 들어갔다. 국수라서 아무리 많이 먹어도 곧 배가 꺼질 거라면서 더 먹어두라고 하시고 엄마는 그냥 돌아서서 계셨다. 몇 젓가락 들었다 놨다만 하셨을 뿐 거의 드시지 않았다. 몇 번의 그 맛이 없는, 아니 맛이라는 게 존재할 수 없는 잔치국수를 먹었고 어찌어찌 다시 밥을 먹었던 것 같다.


헤아려보니  그때의 엄마 나이가 딱 지금의 내 나이다. 지금 내 나이에 고등학생 아들과 중학생 딸을 굶기지 않으려고 맹물에 소금만 풀어 소면을 삶아주실 때 엄마는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한참 시간이 지난 지금까지도 잔치국수가 영 불편하다. 이름에 잔치가 붙은 것도 못마땅하고(유래가 어쨌든), 몇 번 먹어보려 시도했을 때 목구멍에 국수 가닥이 닿으려는 찰나 헛구역질 비슷한 것이 올라와 젓가락을 내려놓았던 기억까지 겹쳐져서 더 그렇게 되고 말았다.


나는 면을 먹더라도 쫄면이나 당면, 우동 면, 칼국수 면 등 쫄깃하고 두툼한 면만 먹는다. 소면처럼 툭툭 끊어지는 면이 싫다. 아주 가끔 먹기도 하는데 그건 매콤한 비빔면이다.


오뎅국수 한 그릇

주문한 오뎅국수가 나왔다. 오뎅이 제법 푸짐하게 들어있고 작은 만두도 두어 개 들어 있다. 면발은 두툼하고 쫄깃하다. 그래, 이런 국수라면 괜찮아. 후루룩 면발을 입으로 밀어 넣으며 문득 생각해보니 그 이후로 집에서 단 한 번도 잔치국수를 해서 먹었던 적이 없었던 것 같다. 그 날의 일을 이야기해본 적도 없고, 내가 지금까지도 잔치국수를 먹지 않는다는  이야기도해본 적이 없다. 아마,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자식을 낳아 키워본 적은 없지만, 먹일 것이 마땅치 않아 굶기지 못해 뭐라도 먹여야 했던 엄마의 심정을 조금은 짐작할 수 있을 것 같기에.


앞으로도 우리 집 밥상에, 또한 내 밥상에 오를 일 없는 잔치국수에게 영영 이별을 고한다.


내 슬픈 잔치여,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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