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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이다 Dec 19. 2023

지하철 드로잉, 막상 해보면 예상과 다른 몰입감이 있는

걷고 그리니까 그곳이 보인다 2 - 서울 지하철 2호선 어반스케치

그냥 해보고 싶은 일이 있다. 별다른 의미나 효용이 없는데도, 그저 재미삼아 해보고 싶은 일. 예를 든다면, 나는 예전부터 지하철 2호선을 타고 한바퀴 돌아보고 싶었다. 역시나 의미나 효용이 있을 행동이 아니므로 마음에 품어뒀을뿐 오랫동안 실행하지 않았다. 어쩌면 어느날엔가 그걸 실행하게 된다면, 나 자신이 조금은 우스꽝스럽게 느껴질 것 같기도 했다. 나란 인간은 그렇게 할 일이 없나? 얼마나 한가하고 한심하면 재미삼아 2호선 순환선을 다 돌고 다닐까? 하는 생각으로.


몇 해 전부터 어반스케치를 하면서 지하철에 오를 때마다 인물드로잉을 해보고 싶었다. 지하철 안 인물들의 특징과 개성과 아름다움을 작은 스케치북에다 펜으로 쓱쓱 그려보고 싶었다. 지하철 인물 드로잉이야말로, 현장에서 직접 대상을 관찰하며 그리는 어반스케치 중의 어반스케치가 되겠고, 현 시대의 사회 분위기와 소시민의 정서를 생생하게 담을 수 있는 풍속화가 되지 않을까 해서다. 


그러려면 몇 가지 자질, 혹은 마음가짐이 필요했다. 지하철 안 사람들의 이목에도 괘념치 않고 스케치북을 펼칠 배포, 승객이 언제 어디서 내릴지 모르므로 빠르고 정확하게 인물의 동세와 특징을 파악하는 관찰력, 여기다 빠른 스피드로 드로잉할 순발력 등이 필요한데, 어쩌면 이런 것보다 더 중요한 자질이 내게는 하나 더 있었다. 그건 바로 아직 서투른 수준의 내 그림을 공공장소의 낯선 누군가 앞에 드러내놓고 그릴 수 있는, 그런 민망한 상황을 견디면서 행동하는 걸 속칭 <얼굴에 철판 깐다>고 하는데, 내겐 얼굴에 깔 철판이 가장 필요했다. 


어반스케치를 시작한 초기에 얼떨결에 지인들 따라서 한두 번 지하철 인물드로잉을 시도한 적이 있긴 했다. 두세 정거장 지나는 사이, 한두 스케치를 하다가 이내 덮었다. 실은 누구도 신경쓰지 않는데도 괜스레 누가 내 그림을 볼까 신경쓰였고, 드로잉 모델이 되는 사람이 생각지도 않은 순간에 하차해서 이상한 형태로 남기 일쑤인데다, 누군가 불쑥 여기서 왜 그림을 그리냐고 따질까봐 그리는 내내 조마조마했다. 내가 뭣하러 이렇게 심장이 쿵쿵 뛰고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를 만큼의 거쎈 긴장과 불안을 견디며 지하철에서까지 그림을 그려야 하나 싶어서 스케치북을 금방 덮었다. 


그러고 언젠가부터 사실인지 헛소문인지 모르지만, 지하철에서 어느 어반스케쳐가 드로잉을 하다 승객에게 항의받고 낭패를 당했다거나, 안내방송에서 지하철 안에서 그림을 그리지 말라는 경고를 받은 적이 있다는 이야기가 여기저기서 들렸다. 역시나 지하철에서 그림을 그리는 일은 조심할 일, 아니 무리해서 도모할 일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오랫동안 지하철 2호선 한바퀴 돌기나 지하철 인물 드로잉을 잊고 지냈다. 


이미지 출처 - 어반스케쳐스 서울 공식계정 인스타그램


그런데 올해 마지막 12월 어반스케쳐스 서울 정모공지를 보고 깜짝 놀랐다. 바로 주제장소가 지하철 2호선으로 정해져서였다. 그동안 모임장소는 어떤 상징적인 건물과 주변일대, 혹은 어느 동네로 정해졌는데, 이번에는 서울 전체를 아우르는 포괄적인 범위설정이 반가웠고, 서울의 주요 행정지구, 상업지구, 대학가를 연결하는 서울의 대표적인 노선이므로 한 해를 되돌아보고 정리하며 보내는 연말에 이보다 더 안성맞춤의 모임장소는 없지 않을까 싶었다. 


예상치 못한 때에 오랫동안 마음에 품었던 두 가지의 소소한 바람이 이룰 수 있는 기회가 온 것 같아서 좋았고, 정모일을 어떻게 알차게 보낼까 생각이 많아졌다. 평소에 알아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지하철 2호선에 관한 정보를 찾아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내가 갈 곳으로 낙점한 신도림역에 관한 자료도 같이 검색했다. 


자료를 찾는 동안, 내가 살고 있는 도시에 관해 이토록 무심했구나 반성하는 마음이 일었고, 오래전의 잊고 있었던 기억들이 떠올라서 미소가 떠오르거나 한숨 쉬기도 했다. 역시나 장소에는 역사나 기억이 스며있어서 역 이름을 보는 것만으로도 지나간 세월이 떠오르며 갖은 감정이 일렁였다. 1994년의 아현동 도시가스 폭발사고와 성수대교 붕괴사건 등이 떠올라서 가슴 아팠고, 1997년부터 당산철교가 제시공되기 시작하여 3년 정도 당산역에서 합정역을 오가기 위해선 지하철에서 내려서 버스를 타고 이동했다가 다시 지하철을 타고 가야했던 기억을 까맣게 잊고 있다가 이번에 다시 떠올리게 됐다. 


뿐만 아니라 이번 정모를 준비하며 새로운 사실도 많이 알게 됐다. 다음역이 환승역임을 알리는 경쾌한 알림송은 늘 듣기 좋았는데, 작년까지 국악 <얼씨구야>에서 올해부터는 <풍년>으로 바뀌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2호선은 잘 알다시피 순환선이라 한참 자다가 깨도 같은 역일 수 있는데, 그동안 열차 도착을 알리는 안내방송에서 내선순환, 외선순환이라는 단어를 자주 듣긴 했지만 내선은 시계방향을, 외선은 반시계방향으로 운행하는 차이가 있다는 걸 알게 됐다. 그리고 집에서 가까운 2호선 역이어서 내가 낙점한 곳인 신도림역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환승객이 많은 역으로, 많아도 너무나 지독하게 많아서 별칭이 '헬도림'(hell(지옥)+신도림)으로 불릴 지경이다. 어느 인터넷 자료에 의하면, 2010년 1월 초 수도권 폭설 대란 때는 발을 한 번도 땅에 대지 않고 환승했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고.


어느 정도 참고자료를 본 것 같아서 정모날 어떻게 움직이는 게 가장 좋을까 생각하니까, 내가 바라던 대로 2호선 한바퀴를 돌고 그 사이 인물드로잉을 하려면 일단 좌석에 앉아야 가능할 것 같았다. 마침 신도림역에 관한 자료를 찾아보던 중에, 4번 승강장에서 시간만 잘 맞으면 차량기지에서 나오는 빈 열차를 탈 수 있다는 정보를 접하게 됐다. 


다음날, 어반스케치 도구를 챙겨서 신도림역 4번 출구에 도착했더니, 신기하게도 정말 텅 빈 열차가 들어섰다. 나는 그 열차에 올라 자리를 잡고는 스케치북을 펼쳤다. 두어 정거장까지는 내 주변에 승객이 없어서 그림재료를 정비하다가 신대방역부터 사람들이 나타나서 스케치북을 펼쳤다. 



자, 이제 진짜 시작이다! 


두어 번 심호흡을 깊게 하고는, 펜을 쥐고 내가 볼 수 있는 사람들의 그려나가기 시작했다. 바로 앞의 사람을 그리다가는 눈이 마주칠 수 있으므로 되도록 저기 멀리 보이는 사람, 스마트폰을 열심히 보는 사람, 혹은 졸고 있는 사람을 선택해 정신없이 그리고 있는데 어느 순간, 내 귀에는 사당역이라는 안내방송이 들렸고, 다음 순간엔 강변역이라는 소리가 들렸다. 시간이 무슨 마법처럼 순식간에 흘러갔다. 그만큼 집중하려고 애쓴 까닭이겠지만, 긴장한 탓이 더 컸을 것이다. 내가 열차 안에서 자신인 줄 모를 누군가를 그리고 있다는 걸 눈치채지 않게 하려고 조심조심 그리려고 나름대로 애를 썼고, 형태를 잡고 그리려는데 갑자기 다음역에서 내릴 사람을 선택해 그리면 난감하므로 대상 선정에도 신경이 퍽 곤두섰다. 강변역 인근에는 지하철이 지상으로 올라오므로 마침 열차 안으로 따스하게 햇볕이 비춰들어왔다. 잠시 숨 돌릴 틈이 필요했다. 스케치북을 내려놓고 건너편 창 너머 햇빛에 반짝이는 강물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참 예쁜 풍경이었다. 서울이라는 도시는 이렇게 멋진 곳이 많구나, 하는 새삼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그러고 다시 시작한 드로잉은 한결 수월하게 진행했다. 내가 걱정한 것보다 상황이 괜찮아서였던 모양이다. 어쩌다 내가 그림을 그리고 있다는 걸 옆좌석 사람이 알아챘을 때도 그저 그러려니 심드렁한 표정으로 자기 폰 보는 게 열중했다. 어떤 아주머니는 미소를 지으며 내 그림을 신기한 눈으로 잠시 보기도 했다. 아현역 이후부터는 마음이 꽤 편해져서 내가 그리던 인물이 예상치 않게 금방 내릴 때는 그릴 수 있는 데까지만 그렸다. 못 그려도, 어딘가 이상해도, 망쳐버려도 그저 그려러니 하고 다음 인물로 이동하여 그렸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2호선 한바퀴를 도는 데 걸리는 시간이 대략 1시간 반 정도라고 하더니 어느새 내 앞에는 신도림역이라는 글자가 보였다. 


와우, 드디어 해냈구나. 


하찮고 사소한 바람이지만 2호선 라인을 타고 한번에 돌아보는 것과 지하철 안에서 인물 드로잉에 열중하는 것, 두 가지 모두를 한꺼번에 이뤘다. 하기 전에는 걱정과 긴장으로 부풀었던 불안의 구름들이 어느새 말끔하게 가시고, 마음 속 어딘가가 화창하게 갠 기분이었다. 


출발지였던 신도림역으로 되돌아와 잠시 숨 돌릴 겸 벤치에 앉아서 2호선 한바퀴를 도는 동안 그렸던 인물 드로잉을 잠시 살펴봤다. 결코 잘 그린 그림은 아니지만, 나름 열심히 몰두하며 그린 흔적이 드로잉 여기저기서 보였달까. 서투른 드로잉이지만, 지하철 인물이라는 하나의 소재가 연속으로 이어지는 장면을 보고 있으니까 그래도 꽤 괜찮아 보였다. 2023년 12월 중순 어느 날의 사람들의 분위기랄까, 정서랄까. 그런 게 드로잉 어딘가에 묻어있는 것 같아서 흐뭇했다. 


갑자기 허기와 갈증이 몰려왔다. 어느덧 점심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식당으로 향하면서 내 머릿속엔 다음 계획이 일렁였다. 한번도 단톡방에서 벙개를 쳐본 적이 없지만, 문득 이런 글을 올려보는 상상을 해보게 됐다.


<나랑 1호선 지하철 드로잉할 사람, 손!>


<신도림역에서>, 펜과 수채, 2023년 12월 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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