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고 그리니까 그곳이 보인다 2 - 석촌호수와 안양천에서
[모든 이야기는 “7월의 어느 아침, 닥터 피트르 병동의 한 침대에서 흐느껴 울고 있던 스물여섯 살의 젊은 남자를 주목하면서” 시작된다. “그는 오랜 도보여행에서 막 돌아와 탈진해 있었으나, 운 까닭은 그것 때문이 아니었다. 여행을 떠나려는 욕구에 한번 사로잡히면 자신을 억제할 수 없었기 때문에 울고 있었던 것이다. 가족을 버리고 일도 내던지고 일상의 삶도 내동댕이친 채, 그는 엄청난 속도로, 오로지 앞으로 앞으로만, 때로는 하루에 70킬로미터씩 걷다가, 종국에는 부랑죄로 체포되어 감옥에 갇힐 때까지 쉼 없이 걸어갔다.”]
온 세상이 하얗게 꽁꽁 얼어붙는 한겨울에도 바깥으로 나가서 떠돌아 다니고 싶은 욕구가 수그러드는 건 아닌가 보다. 그래서일까. 작년에 도서관 서가에서 우연히 눈에 띈 책인 <미치광이 여행자 - 그는 왜 미친 듯이 세상을 돌아다녔는가>(이안 해킹 作)의 문단을 다시 떠올리게 된다. 19세기 말, 유럽에서만 반짝 나타났다가 사라진 히스테리성 둔주라는 질환에 관한 이야기를 다룬 책인데, 대략 20년 동안 평범한 이들이 갑작스레 엄청난 속도로 걸어 다니며 여행을 하고 정신을 차린 뒤엔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기억하지 못하는 증상이 잇달아 발생했다고 한다. 책에 나오는 강박적이고 심각한 여행욕구를 가진 정도는 아니라도, 보통 사람에게도 어느 정도의 떠돌아 다니고 싶은 둔주 욕구가 있지 않을까 싶다.
실내 보다는 야외스케치를 즐기는 나같은 어반스케쳐는 겨우내 집이나 카페에서 실내풍경, 혹은 사진풍경을 보고 그리다 보면, 어딘가 허전하면서도 답답해지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아무래도 어반스케치의 묘미는, 햇볕이 내리쬐고 바람이 오가고 사람들이 지나가는 공간, 일상의 활기와 활력이 넘실대는 곳에서 그림을 그리는 데 있지 않을까 싶다.
한동안 수은주가 영하 15도를 오르내리는 된추위의 나날이 이어졌다가 올해 첫 어반스케쳐스 서울정모가 있는 날의 일기예보는 기온이 영상으로 오를 거라고 했다. 마침 야외스케치가 고프던 참이어서 이번 서울정모에선 웬만하면 바깥에서 스케치를 해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그리고 한동안 나가지 못했던 산책도 해야겠다고, 더군다나 멋진 호수 풍광을 즐기며 걷기 좋은 명소인 석촌호수에서 산책이라니 기대가 컸다.
그런데 기대와 다르게 그날의 날씨는 햇볕 한 조각도 볼 수 없는 온 종일 비가 올 듯 말 듯 흐리고 으슬으슬한 보통의 겨울 날씨였다. 그래도 마음 먹은 바가 있어서 석촌호수에 도착해 어디서 스케치북을 펼칠까 가늠하며 동호를 한바퀴 돌았다. 하늘은 잿빛으로 흐렸지만 호수를 바라보며 겨울나무 사이를 걷는 동안, 문득 숨이 제대로 쉬어지는 기분에 화들짝 놀랐다. 산책에 집중하는 사이 어느결에 찾아오는 깊고 시원한 호흡의 느낌, 머릿속이 환해지는 기분, 가슴이 말끔하게 비어지는 기분, 폐 깊숙이 상쾌한 공기가 쑥 밀려들어 갔다 훅 나가는 상태를 웬만한 산책 때마다 곧잘 느끼곤 하는데도 산책 때마다 새롭고 신기하다. 내가 이런 맛에 산책을 다니는구나, 이렇게 멋진 일을 왜 이토록 밀어놓은 건지 나 자신이 어이가 없었다.
하지만 부지런히 걷는데도 겨울호수의 차디찬 기운이 떨쳐지지 않았다. 이러다 바깥에서 스케치를 할 수 있을까 걱정스러운 마음이 드는 가운데, 호숫가에 스케치북을 펼친 채 그림 그리기에 몰두하는 몇몇 스케쳐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어느 스케쳐가 푸른 호숫물을 차근차근 관찰하며 스케치북에 호수 표면의 빛깔과 물결의 문양을 옮겨담는 모습을 감탄하며 잠시 보다가 나도 어여 내가 조우할 풍경조각을 찾아서 스케치북에 담아야겠다 싶었다. 123층의 롯데월드타워가 보이는 동호 풍경도 마음에 끌렸지만, 그렇게 높은 고층 빌딩을 그리려면 다른 풍경은 상대적으로 너무나 조그맣게 그려야할 것 같아서 아쉬웠다.
아무래도 파스텔톤의 동화적인 놀이동산이 가득한 롯데월드가 자리한 서호풍경이 아기자기하게 그릴 게 많을 것 같아서 그곳으로 빠져나갔다. 동호와 서호 사이의 길목에서, 전날 석촌호수에 관한 정보를 찾으며 봤던 이야기를 다시 검색해서 봤다.
[과거에 잠실 쪽 한강에는 토사가 쌓여 형성된 부리도(浮里島)라는 섬이 있었는데, 부리도를 중심으로 남쪽 물길과 북쪽 물길 즉 송파강과 신천강을 이루는 샛강이 흘렀다. 1971년 4월 부리도의 북쪽 물길을 넓히고, 남쪽 물길을 폐쇄함으로써 섬을 육지화하는 대공사(한강 공유수면 매립사업)가 시작되었고, 그때 폐쇄한 남쪽 물길이 바로 현재의 석촌호수로 남게 된 것이다.]
*** 출처, <두산백과 두피디아>에서
이제 세상에 더는 없는 ‘부리도’라는 옛섬, 거기 터전을 잡고 살던 사람들과 동식물의 자취가 아주 조금이라도 여기에 남아있을까 궁금해하며 서호로 진입했다. 그때 내 앞에서 눈빛을 반짝이는 세 마리의 동물을 보고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너무 사랑스러워서 가슴이 설렐 지경이었다.
“얘들 오리인가요? 거위인가요?”
내 옆에서 그들을 구경하는 젊은 남자가 그렇게 물었다. 할머니와 나들이를 나온 꼬마가 “백조다! 백조!”라며 신나서 폴짝폭짝 뛰어다녔다. 내가 보기엔 오리라고 하기엔 키가 크고 백조라기 하기엔 덩치가 있어 보였으므로, 거위임에 분명해 보였다. 살면서 그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거위를 만나본 적이 없었는데, 거위라는 동물이 그렇게 멋지고 아름다운 동물인 줄 몰랐다. 셋 중 한 마리는 내게 뭐라고 말이라도 하는 듯 눈빛을 반짝이며 나를 한동안 빤히 쳐다봤다. 먹을 걸 달라는 표현 같은데, 가져온 먹을 거리가 없어서 안타깝고 미안했지만 설령 내게 먹을 게 있다고 해도 그걸 주는 게 그들 건강과 안전에 괜찮을지 의문이었다. 내게 눈빛을 반짝이며 빤히 쳐다보는 거위에게 예쁘다, 참 예쁘다면서 웃어주고 고개 끄덕이고 한동안 시간을 보내다 서호를 본격적으로 거닐었다. 유쾌하고 정다운 분위기 덕분인지, 동호에서 느꼈던 한기가 한결 나아지는 기분이었다.
이제 더는 지체말고 그림을 그려야할 것 같았다. 롯데월드가 마주 보이는 곳에 간이의자를 펼치고 앉았다. 그런데 얼마 가지 않아 일기예보에 없었던 빗방울이 떨어지고 있었다. 하아, 한숨이 나왔다. 연신 으슬으슬하게 밀려오는 호수의 서늘한 기운을 그만 견디는 게 현명할 것 같았다. 야외스케치가 아무리 고팠더라도 이제 그만 마음을 접고 어디 실내로 들어가야 할 것 같았다. 바로 뒤에 보이는 카페에 사람이 가득할 것 같았는데 다행히 내가 앉을 자리 하나는 남아 있어서 거기서 마무리를 했다. 내가 보던 풍경과 사뭇 달라져서 거의 기억에 의존하여, 기억이 나지 않는 세부사항은 상상하여 어떻게든 그림을 끝냈다. 사진을 보고 그리지는 않았지만, 거의 마무리는 기억과 상상에 기대어 그린 그림을 어반스케치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으나 정모의 집합시간이 다가왔으므로 많이 부족해도, 어딘가 이상해도 끝을 내야했다.
그날 처음 마음 먹었던 대로 호수산책을 했고, 부족하게나마 야외스케치를 했지만 강추위에 눌러놨던 둔주 욕구가 채워지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햇빛이 좋은 날에 양지에 앉아서 그림을 그리면 참 좋겠다는 마음이 사그라들지 않았다. 그런데 아쉽게도 주말이 지나고부터는 연이어 영하 10도 내외의 나날이 이어졌다. 야외스케치는커녕 그냥 바깥에 나가서 걷는 것조차 힘든 엄동설한의 날씨가 계속됐다.
날씨가 풀리길 기다리고 또 기다리는 사이 거의 일주일이 지나갔다. 드디어 주말이 다 되어 기온이 영상으로 올랐다. 숨죽였던 둔주 욕구가 다시 발동했다. 일단 산책부터 나가야할 것 같았다. 안양천 산책길의 날씨 전광판이 알리길 한낮인데도 겨우 영상 1도에 불과했지만, 하늘이 흐리지 않고 햇빛이 온 누리에 쏟아지는 것만으로 기분이 좋아졌고 기운이 솟아났다.
고척교 다리 아래 안양천을 우아하게 거니는 왜가리를 카메라 영상으로 담는 동안, 왜 사진의 궁극은 새 사진이라고 하는지 알 것 같았다. 크고 하얀 새의 움직을 가만가만 살펴보는 동안, 어느새 내 호흡이 고요해지는 느낌이랄까? 아주 잠시잠깐이지만, 나의 시간이 새의 고요한 움직임처럼 유려한 선으로 사뿐사뿐 나아가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아름다운 대상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내 마음은 시시각각 달라지며 다채로운 빛깔과 무늬결을 드러내고 있었다.
문득 햇볕이 따사롭게 느껴졌다. 저기 벤치에 앉아서 그림을 그려도 괜찮을 것 같았다. 아주 작은 스케치북이면 금방 그릴 수 있겠지 싶었다. 벤치에 앉아서 스케치북을 펼치고 다리 건너편의 큰 빌딩을 그려넣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곧장 후회가 밀려왔다. 수은주가 영상 1도밖에 안 되는 날, 안양천의 찬바람에 휘감긴 겨울햇볕은 온기라고 할 만 게 못됐다. 펜을 쥔 손가락이 금방 발갛게 얼어붙었지만, 한번 시작한 그림을 내려놓고 싶지 않아서 어떻게든 밑그림을 그리고 채색을 해치웠다. 그야말로 해치워 버리는 기분으로 그림을 그리고 벤치에서 일어났다.
따뜻한 커피라도 한잔 마시며 언몸을 녹여야할 것 같아서 근처에서 가장 가까운 카페로 들어섰다. 자리에 앉고 잠시 숨을 돌린 후, 방금 안양천에서 정신없이 그림을 펼쳐보는데 웃음이 터졌다. 얼마나 추웠던지, 얼마나 조급하게 그렸던지, 근경의 나무를 그려놓는 걸 완전히 까먹고 스케치북을 닫아버린 것이었다.
잠시 후, 주문한 커피를 홀짝이며 빠뜨렸던 나무 밑동와 가지를 하나씩 그려넣으면서 생각했다. 대체 뭣 때문에 이렇게 추운 날 기를 쓰고 애를 태우며 나가서 싸돌아다니려는 거지? 일상이 답답해서? 꼭 그런 건 아닌데. 그러다 문득 내 앞에 어떤 형상이 그려졌다.
석촌호수에서 만난 거위 가족.
안양천 물길을 거닐던 왜가리.
그리고 바람, 나무, 햇볕...
나는 도시에서 한 조각의 자연이라고 부를 만한 그들이 자꾸자꾸 만나고 싶어서 이렇게 추운 날에도 여지없이 떠돌아다니고 싶은 모양이다. 그래서일까? 집으로 돌아와서 얼마 전에 읽었던 책의 한 구절을 다시 펼쳐보게 됐다.
[혼란스러운 시기에 자연의 존재가 그토록 중요한 이유는 무엇일까? 답은 단순하다. 자연은 우리 에게 근본적인 가치를 되찾게 해주고, 우리를 자신의 에너지로 채워주고, 걱정과 내적 갈등을 잠 시 중단시켜 준다.8 자연은 감동을 주어 스트레스를 해소시키고 행복감을 높여준다. 그렇다. 우리 가 자연과 접촉할 때 무언가 특별한 일이 일어난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아름다운 자 연을 마주했을 때 숨이 멈출 것 같은 느낌을 받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 출처 : 미셸 르 방 키앵, <자연이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 수 있다면>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