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고 쓰고 그리는, 산책 드로잉 에세이(2)
페이지가 넘어가지 않는 책을 보다 말다 넋 놓고 앉아있었다. 문장이 어려운 건 아닌데, 문장마다 힘이 들어가서 읽기가 퍽퍽했다. 멋들어진 사색과 비유가 문장구성의 8할을 넘은 것 같아서 문장을 읽을 때마다 덜커덩거리는 듯했다. 부담스럽지 않은 문장의 자연스러운 멋이란 건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잠시 생각하다가 책을 집어들기 직전에 지인에게 마음 상했던 일이 떠올랐다. 한숨이 나왔다. 기분이 상했다고 시간을 막연하게 흘려보내서는 안 되겠다 싶어서 무작정 모자를 쓰고 가방을 들고 밖으로 나왔다. 걸으면 분노가 녹아내린다고 했던가. 사람에게 마음이 지친 날이니까 오늘 산책은 푸른색이 많은 곳에서 걷다 와야겠다 했다. 그래서 오늘은 어디로 갈까 고민 없이 곧장 안양천으로 걸어갔다.
저녁 6시가 다 되어가는 안양천은 한산했다. 하긴 저녁밥을 하거나 먹을 시간이니까. 안양천과 도로 사이의 둑방길에 줄지어 있는 나무숲에서 한참을 걸었다. 걷는 동안에, 지인의 예의 없는 말버릇이 머릿속을 출렁대 화가 좀처럼 삭여지지 않아 뚜벅뚜벅 걸었다. 안양천 산책로를 들어선 게 조금 전인 것 같았는데, 어느새 오금교까지 이르렀다. 스마트폰 앱으로 확인하니까 그새 2킬로를 걸었던 것. 역시나 화가 난 마음은 시간 감각마저 무디게 만들구나 싶었다.
더 걸으면 마음이 풀릴 것 같아서 오금교를 건너 목동까지 가볼까 하다가 갑자기 지치는 기분이 들어서 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대신에 왔던 길을 되돌아가지 않고, 이제까지 한 번도 가보지 않았던 구로공구상가를 경유해 가기로 했다.
오금교에서 상가로 내려가는 통로에 계단이 있었다. 계단 난간으로 세워진 철제 담벼락 앞에서 한참을 서성였다. 담벼락은 그곳에서 얼마나 긴 시간을 보내며 비와 눈을 맞고 견뎠는지 발아래까지 붉은 녹물이 길게 번져있었다. 아니 녹물은 붉지만은 않았다. 햇빛을 튕겨내며 노란빛, 주홍빛, 갈색빛, 심지어 마젠타 빛으로 반짝였다. 붉은색이 주는 다채로움과 아름다움은 어쩌면 녹물에 담겨있는 게 아닐까 싶었다.
만약 세워진 지 얼마 안 된 새 철제 담벼락 앞에 섰더라면 내가 그토록 오래 담벼락을 들여다봤을까. 담벼락과 마주 보면서 그곳에 흘러내리는 세월의 무늿결을 읽으려고 했을까. 나무에겐 나무테가 세월의 흔적이자 훈장이겠지만, 철물에겐 녹물의 다채로운 색상과 제멋대로 번져나간 무늬가 세월의 흔적이자 훈장이 아닐까 싶었다.
집으로 돌아오면서 오래되고 낡아야 더 아름다워지는 것들을 생각했다. 푸른색의 나무와 풀을 보고 위안받으려고 했지만, 나는 뜻밖의 인공물인 철제 담벼락에 잠시 마음을 기댔다가 돌아왔다. 그곳에 새겨진 아름다운 붉은 문장을 읽으며 분노로 들끓던 잡념이 가라앉았다. 멋들어진 자연스러운 문장이 바로 거기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