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환학생 동안 만났던 수많은 사람 중에 그녀는 잊지 못할 특별한 인연이다. 따뜻한 마음을 베풀어주고 나를 돌아보게 해주었다.
하이델베르크에서 뉘른베르크로 넘어가는 버스 안, 여행의 마지막 저녁이기도 하고 누군가와 함께하고 싶었다. 네이버 카페 유랑에 동행 모집 글을 올렸으나 큰 도시도 아니고, 급히 올린 글이라 그런지 연락이 오지 않았다. 어쩔 수 없다는 마음으로 잠이 들었고, 일어났을 때 연락이 하나 와있었다. 간단한 인사 뒤에 서로 카톡 아이디를 공유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내 또래의 여성 분임을 알게 되었다. 숙소에 짐을 풀고 약속시간까지 동네를 걸었다. 뉘른베르크는 작은 도시고, 옛 성벽에 둘러싸인 시내와 성벽 밖 지역으로 구분되어 있다. 성벽과 더불어 건물들도 다 과거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으며고 외벽에는 귀여운 장식들도 달려있다.
(뉘른베르크는 독일에서 가장 큰 주인 바이에른에 위치하며 오랜 역사를 가진 도시다. 20세기 초 나치의 최대규모 전당 대회가 열린 곳이자 세계대전 이후 그들을 심판한 전범 재판이 열린 곳이다. 뉘른베르크는 독일에서 장난감 생산 도시로 유명하고 ‘국제 장난감 축제’도 열린다고 한다.)
뉘른베르크는 여행 전에는 이름도 들어보지 못했고, 우연히 가게 된 곳이다. 나도 참 계획적이지 않은게 단순히 어딘가로 떠나고 싶다는 마음으로 원하는 날짜에 가장 싼 비행기 표를 구매했다. 그리고서 그 주변 도시를 물색해 루트를 짰다. 가장 저렴한 표가 프랑크푸르트 인-아웃이었지만 프랑크푸르트에 대한 관심은 크게 없어 여행 일정에는 제외했다. 독일과 국경이 맞닿은 프랑스 도시 ‘스트라스부르’, 친구가 강력히 추천한 ‘하이델베르크’, 마지막으로 프랑크푸르트 도시 가는 길에 있는 ‘뉘른베르크’를 선택했다. 세 도시를 4일에 둘러보는 굉장히 짧은 여행이고 기존에 알고 있던 곳들도 아니었지만 떠나기 싫을 정도로 마음에 들었다. 스트라스부르의 풍경, 이른 아침에 올랐던 하이델베르크의 이름 모를 산, 뉘른베르크에서 만난 소중한 인연까지 알차고 행복한 여정이었다. 세 도시 모두 충분히 걸어서 구경할 수 있는 소도시기도 했다. 온통 예상치 못한 행운 같은 여행이었다.
다시 뉘른베르크로 돌아와, 혼자 조용히 걷다 보니 어느새 약속 장소에 도착했고, 곧이어 동행분을 만났다. 그녀는 여행 중 처음으로 만난 현지 거주자였다. 나보다 한 살 많은 스물두 살이었는데 학생도 아니고 직장을 다니고 있었다. 어린 나이에 해외에서 직장을 다니고 있는 게 신기하고 대단하게 느껴졌다. 현지인인 그녀의 추천 맛집은 아쉽게도 만석이었고, 두 번째 식당은 다행히 자리가 있어 그녀는 유창한 독일어로 주문을 했다.
내 여행 이야기와 그녀의 이야기를 나누던 차에 그녀가 조심스럽게 자신이 발레리나라고 이야기했다. 태어나서 발레리나도 처음 보는데 그것도 독일에서 이렇게 젊은 발레리나를 만날 줄이야! 자세히 언급할 수는 없지만 그녀는 재능과 엄청난 노력을 통해 눈이 휘둥그레질 커리어를 쌓았고 그렇게 여기에 있게 된 것이었다. 존경심, 부러움, 열등감 등 다양한 마음이 교차했고, 그런 그녀 앞에 있으니 나 자신이 참 초라하게 느껴졌다.
밥은 맛있었고 대화는 즐거웠다. 어김없이 돈 때문에 망설이는 나에게 그녀는 자신이 사겠다며 칵테일 바에 데려갔다. 거의 독일어 혹은 영어로 대화를 하다 오랜만에 한국어로 수다를 떠는 게 언니 마음을 편하게 했던 게 아니었을까. (그 정도의 소소한 즐거움이라도 되었길 바란다.) 칵테일 바는 조용하고 고급스럽기보다는 왁자지껄하고 푸근했고, 오히려 이런 분위기가 더 좋았다. 현지 사람들의 복작거림 속에 있는 느낌이었다. 칵테일을 한두 잔 마셨고,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저 많이 웃고 기분이 좋았다.
헤어지기 전, 다음 날 마땅히 할 것이 없다고 하자 언니는 나를 집으로 초대해 주었다. 한식이 먹고 싶단 나에게 언니는 자취 연차를 자랑하며 밥을 해주겠다 나섰다. 황금 같은 휴일에 시간을 내주고 요리를 해준다는 게 말만으로도 너무 감동이었다. 체크아웃 후, 오후 약속 시간까지 가만히 있을 수 없어 혼자 장난감 박물관에 갔다.
장난감 박물관의 리셉션 직원은 예상치 못했을 동양 여자애를 진심으로 환영해주었다. 장난감 박물관은 그 환대만큼 좋았다. 4층 규모의 꽤 커다란 박물관이었고, 다양한 크기와 수백가지 종류의 장난감을 만났다. 어린아이가 된 것처럼 푹 빠져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구경했다. 볼수록 이 장난감들은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 작품에서 장인이 쏟은 정성과 애정이 묻어났다. 전날 만난 멋진 이와 열정의 집합체인 장난감을 보며 나는 이런 열정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을지 한참을 생각했다.
오후에 방문한 언니의 아파트는 아늑하고 정갈했다. 집을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고 하는데 정말 그랬다. 언니는 부엌에서 생선을 다듬고 굽고, 밥을 하고, 무려 국까지 한 상을 차렸다. 따뜻한 마음이 담긴 밥과 술 한 잔을 홀짝이다 보니 저절로 마음이 열렸다. 딱 한 번 본 타인에게 내 마음속 깊숙이 묻어놓은 이야기들이 나왔다. 살아오면서 느꼈던 열등감, 불안함, 비겁함... 온갖 부정적인 감정들이 쏟아졌다. 평소라면 부끄럽고 내 치부를 들킨 느낌이었을 텐데 이날은 정말이지 마음이 편안했다.
내가 이렇게 나오니 언니도 진지한 고민을 털어놓았다. 그녀의 눈부신 커리어 뒤에는 고된 삶이 숨어있었다. 그녀는 힘들다고 쉬는 게 아니라 한 번 더, 이것까지만 하며 계속해서 연습했다. 자기관리와 연습으로 인해 남들이 누리는 걸 누리지 못하고, 성공에 대한 시기와 질투를 받았다. 그리고 점점 타인에게 마음을 열기 힘들어졌다. 그 순간만큼은 언니와 둘도 없는 사이가 된 것 같았다.
그녀에 비하면 나는 얼마나 부족한가. 돌이켜보면 지금까지 죽을 힘을 다해 노력한 적이 없는 것 같다. 항상 열심히 했지만 딱 그 정도까지였다. 언니 같은 사람을 보면 ‘더 열심히 살아야지!’ 싶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왜 그렇게까지 해야 하나 잘 모르겠다. 그냥 간절함이 없는 건가. 나도 분명 열심히 살고있는 거 같은데 언젠가부터 나는 의욕 없고 미래도 없는 사람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차차 시작하는 취업 준비도 그렇다. 다들 어쩜 그렇게 열심히 하고 또 준비해야 하는 건 얼마나 많은지. 뛰어들 엄두도 나지 않는다.
이야기가 끝나자 약간의 어색한 침묵이 맴돌았다. 그렇지만 어색함보다 후련함이 컸고 침묵마저 편안하게 느껴졌다. 같이 예능을 보며 함께 웃는데 여행에서의 이런 휴식은, 게으름은 나에게 또 다른 혁명이었다. 적은 돈으로 더 많은 것을 보려고 나는 여행에서조차 항상 바빴다. 계획을 촘촘하게 세우고 다닌 건 아니지만, 어딘가에서 쉬고, 한나절을 보내는 것은 꿈도 꾸지 못했다. 그래서 편안하고 따뜻한 공간에서 좋은 사람과 함께 있던 그 날이 특별하게 다가왔다. 그래, 욕심을 좀 버리고 살자. 조금 내려놓으면 또 다른 것을 얻게 되는구나.
일상으로 돌아오고 언니에게 연락하기가 쉽지 않았다. 좋은 사람이고 귀한 인연이었는데 말이다. 이제는 더 연락하기 어려운 사이가 되어버렸지만, 카톡 친구 목록을 내리다 우연히 언니를 발견하면 여전히 그 밤이 생각난다. 참 감사하고 고맙다. 그 밤이 언니에게 조금이라도 위안을 주었길.
언니의 일상이 더 행복하고 풍요롭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