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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졍씅 Jan 18. 2024

개미소동 라구스

“꺄아아악 개미!!!!”

화창한 라고스의 아침은 나의 비명 소리로 울려 퍼졌다.     


 사건의 전말은 대략 22시간 전으로 돌아간다. 전날 오전 9시경 우리는 라고스로 떠나기 위해 모였다. 같이 교환학생을 온 언니 오빠들과 2박 3일 여름의 끝을 함께했다. 10월 초였지만 여전히 더웠고, 처음으로 같이 놀러 가는 거라 다들 신이 났다.(물론 나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다 같이 갔던 여행이었지만) 늦여름이라서 그런 건지 점심으로 먹었던 부리또 식당도 첫째 날 갔던 해변에도 사람 하나 없었다. 동양인은 더더욱 없어 우리는 라구스라는 예쁜 그림에 조화롭지 못하게 톡 튀어 나온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런 것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고 도리어 전세 낸 사람처럼 고요함과 관심을 즐겼다. 함께 한다는 것은 뻔뻔할 수 있는 용기를 주기도 한다.

      

 바닷물은 눈이 시리게 맑았고, 나는 인생 처음으로 비키니를 시도했다. 유럽은 타인의 시선에서 나를 자유롭게 해주었다. 평소 마이웨이 기질이 있지만 패션은 익숙하지 않은 영역이기도 하고 늘 자신이 없었다. 이런 몸매로 저런 옷은 안 어울릴 것 같다는 평가를 스스로에게 또 타인에게(속으로) 하고 살았다. 그러나 유럽은 타인의 스타일의 일말의 관심도, 훈수 질도 통하지 않는 곳이었다. 처음엔 거리를 다닐 때 표정 관리와 시선 처리에 신경 써야 했다. 교환이 끝날 때쯤 누가 벌거 벗고 있는 게 아니라면 아무런 관심이 없는 파워 유럽인이 다 되었다. 전이라면 심각하게 고민하고 결국 선택하지 않았을 새빨간 스웨터를 입는 등 가감 없이 도전했다. 비키니? 막상 입어보니 별거 아니다. 날씬하지 않더라도 입을 수 있다. 그냥 입고 싶으면 입는 거다


 라구스는 구석구석 아름다웠다. 작은 집들이 모여있는 하얀 골목들, 티비에서만 보던 지푸라기(?) 파라솔, 커다란 야자수. 우리 모두 두 걸음마다 사진을 찍어대서 일정이 진행되지 않았다. 사실 일정이랄 것도 없이 가진 게 시간뿐이었지만. 저녁은 마트에서 장 본 걸로 이것저것 먹었는데 그릇 부딪히는 소리만 들리는 ‘침묵의 전투’였다. 늦은 밤까지 술과 웃음꽃이 끊이지 않았다. 함께한 사람들이 좋아서 더 그랬던 것 같다.

 하지만 다음 날 아침 상상도 못한 광경이 펼쳐졌다. 설거지가 귀찮아서 싱크대에 놓고 잠들었더니 다음날 부엌이 초토화되었다! 개미가 그냥 한 두 줄도 아니고 다양한 곳에서 떼를 지어 나오는데 정말 끔찍하고 무서웠다. 다락까지 3층짜리인 예쁜 목조 건물은 순식간에 귀신의 집이 되었다. 크게 벌레를 무서워하는 편이 아닌데도 양이 어마어마해 결국 소리를 지르게 되었다. 내 비명소리에 온 집안사람들이 화들짝 깨고, 유일하게 미동 없는 나의 설거지 당번 메이트를 때리다시피 깨웠다. 그는 비몽사몽으로 개미를 치워주었고 나는 옆에서 최대한 도왔다. 그날 이후 종종 언니 오빠들에게 울먹거린 거 놀림당하긴 했다.     

 어수선한 아침 지나고 카약을 타러 갔다. 제일 처음 타임이라 사람도 적고 유유히 노를 저으며-사실 빡세게 노를 저으며-주변 풍경을 구경했다. 으슥한 동굴에도 가고 유턴 지점에서 잠시 내려 스노클링도 즐겼다. 돌아오는 길엔 팔이 너무 아플 수 있는 관계로 다른 카약들과 보트에 비엔나소시지처럼 묶여왔다. 그 와중에 가다가 줄이 끊어져서 낙동강 오리알이 될 뻔했다.


 버스를 타기 전 라구스를 생생하게 기억하고 싶어서 주변 모습을 눈에 차근차근 담았다. 그렇게 하면 내 눈 안에 풍경과 그때의 그 감정이 담길 것만 같았다. 작고 예쁜 기념품도 샀다. 푸른색 서핑 보드에 내가 좋아하는 거북이와 야자수가 그려진 자석이다. 터미널 모퉁이 낮잠을 준비하는 고양이와 눈인사를 하고 리스본행 버스에 탑승했다. 고속도로는 막혔지만 마음 속은 행복감에 충만했다.      

 모든 게 다 맘처럼 풀리진 않았지만 라구스 여행은 소중한 추억이 되었다. 라고스 이후 리스본 살이도 매일매일이 신기할 정도로 행복했다. 이렇듯 충만하게 행복했던 것이 얼마 만인가. 생각해보면 행복은 참 별게 아닌데 한국에서는 항상 미래를 걱정하고, 불안해했다. 무엇보다 눈에 보이는 성취나 대단한 것만이 행복이라고 생각했다. 일상 속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잠깐의 즐거움 정도로 치부했다. 그러나 이제는 잠깐의 즐거움 역시 행복이라는 것을 안다. 


 ‘기쁨도 지나가지만 슬픔도 지나간다.’ 비록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이 상황이 끝이 보이지 않고 좌절된다고 하더라도 다 지나갈 것이다. 전과 같아질 수는 없어도 또 다른 형태로 행복이 찾아올 것이라 믿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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