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졍씅 Feb 01. 2024

향수병을 극복하지 못해도

 잘 지내는 듯이 보이는 교환학생을 대체 왜 줄이기로 마음먹었는지 그 이유를 적어보려 한다. 큰 사건이 있었던 것도, 교환학생 생활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도 아니다. 그냥 이런저런 생각이 꼬리를 물며 조금씩 퍼져갔기 때문이다.     


 리스본에서의 첫 이 주일 후 잘 적응하고 매일 새롭게 즐기고 있었다. 주로 기숙사 안에서 시간을 보내고 가끔씩 본격적으로 리스본의 곳곳을 탐험했다. 짧은 여행으로 왔으면 가지 않았을 마차 박물관, 현대 미술관 전시회 등 현지 박물관을 가고, 서핑 강습을 받았다. 또 어느 날은 포르투갈 자막이 달린 할리우드 영화를 보고, 쇼핑몰에서 하루를 보냈다. 과제가 많을 때는 친구들과 카페에 가서 디저트로 위안을 삼으며 공부했다. 그렇게 여행자와 현지인 그 사이 어디쯤에서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러나 거짓말처럼 11월이 되자 일상에 대한 소중함은 사라지고 새로운 생각들이 찾아왔다. 한국에서 열심히 무언가를 해내는 주변 친구들과 자신을 비교하며, 그렇게 만족스러웠던 여행, 여유, 유흥이 모두 한심하게 느껴졌다. 시간을 땅에 버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고, 나태한 건 참지 못하는 전형적인 한국인의 불안 증상이 나타났다. 놀 때도 열심히, 효용 가치 있는 삶을 추구하는 사람으로서 리스본 생활에 의구심을 갖게 되었다. 놀기만 하고 돈만 쓰면서 뭐하고 있는 걸까. 이게 맞는 걸까. 도태되지 않을까.     

 남은 교환학생을 더 알차게 보낼 방법을 고민했다. 포르투갈어 일상회화가 될 정도로 배우기, 집 근처 라틴 댄스학원 다니기, 다음 학기 수업 5개 신청하기 등 계획을 세웠다. 좀 더 부지런히 살면 괜찮을 거고 교환 학생의 기회를 이렇게 끝내는 건 아니지 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그러나 복병은 다른 곳에 있었다. 바로 홈씩(home-sick). 가족과 한국이 너무 그리웠다. 예상했던 그리움이 나를 덮쳐왔고 빠져나오기 너무 힘들었다. 

 교환학생을 가기 전 스페인으로 일 년 동안 교환학생을 다녀온 언니가 3,6,9 법칙을 이야기했다. 3개월, 6개월, 9개월 때 고비가 왔다고. 정확하게도 나 역시 3개월 때 고비가 왔다. 해결책으로 겨울에 잠깐 한국에 들어가려 했으나, 가족들이 1월에 나 볼 겸 여행을 오는 마당에 내가 또 한국에 들어가는 건 무리라고 생각했다. 일주일의 고민 끝에 깔끔하게 정했다. 교환학생은 한 학기만 하고 그만두는 걸로. 마음을 정하니 괴로움이 가시고 남은 날들이 더 소중하게 다가왔다. 그리고 지금도 그 선택을 전혀 후회하지 않는다.     



 11/17

요 며칠 사이 또 마음이 다시 뒤숭숭해졌다. 이제 뭘 어떻게 해도 10월의 그 충만한 행복함이 생기진 않는 건가. 마치 연애 초 설렘이 지나가면 다른 형태의 모습이 펼쳐지는 것처럼 되어버린 것 같다. 내가 하는 이런 걱정도 한국에서 모습과 비교하면 복에 겨운 소리고 이해도 안 될 것이다. 그러나 타지에서 홀로 지내는 그 외로움은 절대 가볍지 않다. 너무 많은 것이 다른 환경과 사람들. 시간이 많으니 잡생각만 많아지는 것 같고, 급 불안해지며 나태한 나 자신이 한심하고. 전공 인정도 받지 못하는데 수업 들어서 뭐 할까 싶기도 하고. 연애를 해야 시간이 빨리 갈 텐데. 바쁠 땐 간절히 쉬는 날을 바라지만 막상 쉬는 날이 되면 가슴 한 켠이 공허하다.      


11/25

이 끝나지 않는 힘겨움이 다시 나를 찾아왔다. 잘 지내다가, 행복하다가도 잠깐의 틈 사이로 불안이 들어온다. 학교가 싫어서 도망쳐왔는데 여기서도 또다시 도망치는 것 같아 속상하다. 아직 어리고 부족한 내 모습이 한없이 못나 보인다. 한편으론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고 다른 한편으론 받아들이기 싫고. 이렇게 끝없이 배회하다 끝나는가 싶기도 하고.

 갑자기 중학교 때가 생각난다. 상해 국제 학교 1년 동안 학교생활이 버거웠다. 부족한 영어 실력으로 남들 앞에서 말하는 게 너무 스트레스였다. 그래서 한국에 돌아가면 대답도 열심히 하고 질문도 열심히 할 거라고 다짐했다. 그 후 어떤 사람들은 눈살을 찌푸릴 정도로 적극적으로 살았다. 지금도 여기서 용기 내지 못하고 머뭇거렸던 순간이 참 많다. 영어 앞에서 기죽지 않고 적극적으로 말하려 했는데 글쎄, 근처에도 못 간 것 같다.   

   

 내 앞에 너무나 많은 선택의 순간들이 오고 난 아직도 확신이 없다. 오랜 시간 고민해도 방법을 찾지 못해 절망하고, 이따금 충동적으로 선택하기도 한다. 지금의 선택이 미래에 나에게 어떠한 영향을 끼칠지 감도 잡지 못한다. 그렇기에 더 담대히 선택하고 괴로워하지 않기로 했다. 나의 선택이 나를 만들지만 내 미래는 내가 좌지우지할 수 없으니까. 선택의 순간에 충실하고 그에 따른 결과에 너무 힘들어하지 않기. 사실 항상 노력해도 잘 안되는 부분이긴 하다. 그렇지만 나는 부족한 나 역시 사랑하니까 너무 원망하지 않으려고 한다.

 그렇다. 나는 향수병을 극복하지 못했다. 도망친 곳에서 다시 도망쳐 나왔다. 그렇다고 내가 불행한가? 전혀 그렇지 않다. 지금 거기 타지에서 혼자 힘들어하고 있는 당신. 당신의 힘듦은 당연한 일이다. 힘들어하지 않으려고 애쓰지 말고 자신을 계속 들여다보고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들어줘라. 잘하고 있다고, 무너져도 괜찮다고 위로해 줘라. 포기해도 괜찮다. 분명 또 새로운 길이 열릴 것이다.

이전 06화 멋진 독일 발레리나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