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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졍씅 Jan 16. 2024

최고의 룸메이트

 (이 글의 배경은 2018년입니다.)



 수업 듣는 시간이 적어 여행을 제외한 나머지 시간을 거의 기숙사에서 보냈다. 그렇기에 기숙사에서 추억도 많고 애정이 간다. 이 기숙사는 굉장히 독특한 게 일단 학교에서 매우 멀었다. 리스본 대학교는 리스본 전체에 여러 캠퍼스로 나위어 있었고, 그 중 경영 캠퍼스는 기숙사에서 50분 정도 걸리는 위치에 있었다. 다른 특지어은 옛 수도원 건물을 기숙사로 사용한다는 것이었다. 건물이 낡았지만 가운데 넓은 중정도 잘 관리되고, 수도원에서 살아본다는 경험 자체가 마음에 들었다.

 그 와중에 또 유일한 3인실에 배정받았다. 3인실은 일반 2인실 방보다 천장이 월등히 높았고, 면적도 두배 이상 커서 침대 세 개가 서로 널찍이 떨어져 있었다. 침대 시트와 쓰레기통도 일주일에 한 번씩 갈아주는 서비스가 포함이었다. 단점은 겨울엔 다른 방보다 더 추워서 한국에서 가져온 전기장판과 한 몸이 될 수 밖에 없었다. 그래도 영하로 잘 떨어지지 않아 전기장판 하나면 충분했다. 방세도 2인실보다 50유로나 저렴해서 여러 가지로 만족스러웠다. 

 기숙사는 테주강과 아주 가까이 있다. 테주강은 지중해와 연결되어 있어 창문을 열면 바다 냄새가 솔솔 났다. 기숙사 주변은 한적한 주거 지역이고 걸어서 십 분 거리에 마트와 지하철역이 있었다. 골목길 사이에 성당이 있고, 한 달에 한 번씩 꽤 크게 바자회가 열렸다. 수업이 없는 날 침대에 누워 드라마를 보다가 지겨우면 산책을 나왔다. 길거리에서 1.5유로짜리 플라스틱 컵에 생맥주 한 잔을 들고 동네를 걸었다. 오르막길은 조금 힘들지만 밖에서 가게 안을 힐끔거리며 구경하는 재미가 있었다. 


 나에게는 두 명의 아주 다른 룸메이트가 있었다. 인종도 성격도 완전히 정반대였다. 먼저 나의 왼쪽 침대를 사용하는 베트남 사람인 ‘E’은 그야말로 핵인싸였다. 영어도 잘하고 성격도 쾌활해서 동서양 막론하고 모두와 친구를 맺었다. 키는 작고 조금 통통한 편인데 보통의 동양인에게서 느껴지는 쭈굴함은 전혀 없이 오히려 먼저 다가가서 농담을 던지는 스타일이었다. 나로서는 정말 신기하고 부러운 사람이었다. 

 그녀의 또 다른 특징은 요리를 아주 잘한다는 것이다. 어릴 적부터 숙련된 요리 솜씨에 특히 한식을 좋아해서 그녀의 조미료 바구니엔 항상 한국식 고추장이 있었다. 감사하게도 그녀 덕분에 일주일에 두세 번은 육류를 섭취할 수 있었다. 같이 장을 보고 요리 실력이 그저 그런 나는 옆에서 채소 다듬으며 그녀의 요리를 도왔다. 어쩔 땐 다른 방 친구들과 음식을 나눠 먹으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눴다.

 

 내 오른쪽 침대의 주인공은 포르투갈 출신의 차분한 대문자 ‘I’ 같은 사람이다. 그녀는 소란스러운 걸 싫어하고 소수의 친구들과 깊은 관계를 맺는 편이다. 생각이 많고 전공이 심리 쪽이라 종종 그녀와 상담 아닌 상담을 했었다. 그녀 역시 키가 작은 편이고 케이팝과 한국을 좋아했다. 어쩌다 보니 한국을 좋아하는 두 명과 한 방을 쓰게 되어 자연스럽게 호감을 얻고 시작한 듯하다. 

 룸메이트의 인연으로 또 날 좋게 봐주어서 크리스마스 연휴에 'I'의 집에 초대를 받았다. 크리스마스 당일에 한국에서 친구가 놀러와 초대의 응할 수 없었지만 연휴 다음 날 찾아갈 수 있었다. 포르투 옆 작은 마을이 그녀의 고향이었고, 그녀의 가족이 역에 나를 마중 나왔다. 그녀의 아버지는 미국 애니메이션에서 본 듯한 푸근하고 인상 좋은 분이였고, 그녀의 어머니는 환한 미소로 반겨주셨다. 서툴게 시도한 포르투갈 자기소개에도 무척 좋아해주시고, 머무는 동안 살뜰히 살펴주셨다. 초대 선물로 과일 소주 몇 병과 마스크팩을 드렸다. 술을 좋아하시는 'I' 아버지와 'I'가 무척 좋아했고, 마스크팩은  어머니에게 인기가 많았다.(남동생 미안;)

 다음 날 친구와 여유 가득한 하루를 보냈다. 아침을 먹고, 쇼핑몰 구경을 하고, 둘 다 만족할 만한 영어 자막이 있는 한국 영화를 보았다. 그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시간은 저녁 먹고 함께한 산책인데, 그녀의 어린 시절이 담긴 동네를 같이 걸었다. 골목 하나, 가게 하나 마다 추억이 묻어 있는게 참 신기했다. 항상 이사를 다니고 동네가 바뀐 나에게 그런 추억은 없었다. 그녀의 이야기 또 포르투갈의 젊은이로써의 이야기를 듣고 나와 한국의 이야기를 했다. 마음을 나누는데 언어는 중요하지 않다. 쌀쌀함마저 정겨운 저녁 산책이었다. 


 재밌게도 나는 이 둘의 중간쯤에 있다. 활달하고 밖에서 노는 걸 좋아하지만 혼자만의 시간도 무척 중요한 사람이다. 그래서 둘 사이에서 다리 역할을 하며 양쪽 모두와 친하게 지냈다. ‘E’와는 주로 기숙사 파티나 밤 라이프 즐기고 혹은 쇼핑을 했다. ‘I’와는 기숙사 근처 카페 투어나 박물관을 찾아다녔다. 함께했던 활동부터 큰 차이가 느껴지지 않는가. 

 두 룸메이트는 성향이 워낙 달라 처음에 사이가 썩 좋지 않았다. 그래도 미우나 고우나 한 방을 쓰며 서서히 친해졌고, 학기가 끝날 무렵 우리 셋은 리스본 근교 바닷가로 놀러 가게 되었다. 1월 바닷가는 한적했지만 크게 춥지 않았고, 우리는 서로 사진을 찍어주고 여유로운 시간을 보냈다. 그때를 떠올리면 창백한 햇살과 요트, 작은 골목들이 생각난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셋이 함께했기에 더 좋았던 게 아닐까 싶다. 


 가끔 이유는 모르겠지만 더 친근하고 편한 사람이 있다. 기숙사에 룸메이트 외에 무척 좋아했던 언니가 있는데 내가 먼저 친한 척 하고 싶은 그런 사람이었다. 그녀는 20대 후반의 중국인으로 리스본에서 석사 학위를 받은 후 일을 하고 있었다. 기숙사 파티와 식당에서 종종 마주쳤는데 중국어와 영어를 섞어가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내가 중국어로 인사하고 얘기하려고 하는 걸 좋게 봐주었던 것 같다. 언니가 성격도 좋고 볼 때마다 술 조금만 마시라는 잔소리도 좋아서 ‘오늘은 언니 없나..?’하고 찾기도 했다. 

 기숙사의 숨겨진 히어로 반야 할아버지도 빼놓을 수 없다. 그는 낡은 수도원의 총 책임자로 든든한 관리인이다. 영어를 못하셔서 많은 대화를 하지 못했지만, 항상 웃으며 인사해 주시고, 어설픈 포르투갈어 인사에도 무척이나 기뻐해 주셨다. 크리스마스 날에는 기숙사생 모두에게 축하 카드를 써주는 스윗한 분이다. 반야 할아버지가 계셨기에 기숙사에서 더 안전하고 편하게 있을 수 있었다. 항상 건강하게 계시길 바란다. 


 한국의 기숙사와 가장 크게 다른 점은 바로 ‘파티’ 문화다. 기숙사 파티는 크게 기숙사에서 주최하는 파티(웰컴 파티, 할로윈 파티 등)와 기숙사 생들이 자체적으로 방에서 하는 소규모 파티가 있었다. 먼저 기숙사 주최 파티는 우리 방처럼 천장이 높고 커다란 게임 룸에서 진행된다. 파티 일정이 잡히면 기숙사 운영위 학생들이 장을 보고 꾸미고 파티를 준비를 주도한다. 생각해보니 파티 비용은 따로 걷은 적이 없으니 기숙사 월세에 포함된 것 같다. 

 파티에는 특별 제조술이 등장하는데 한국에서 김장하는 다라이(?) 같은 데에 저렴한 와인, 사이다, 각종 과일 조각을 붓고 섞는다. 거기에 도수를 좀 추가 하고 싶으면 보드카를 반 병 정도 넣으면 우리가 아는 샹그리아 저렴이 버전이 탄생한다! 처음엔 그 과정과 비주얼이 얼마나 충격적이었는지. 그러나 인원수도 많고 내가 꿀떡꿀떡 잘 먹어서 크게 남기지 않았던 것 같다. 샹그리아는 달달하니 마시기에도 좋고 꽤 취해서 즐거운 파티를 보낼 수 있었다. 

 파티는 크게 특별한 것은 없고 노래에 맞춰서 춤추고 간단한 이야기를 나누는 게 전부다. 술에 취해 음악에 몸을 맡기는 것만큼 신나는 게 없다는 걸 리스본에 와서 알게 되었다. 또 술이 들어가면 말을 많이 하고 특히 영어실력도 업그레이드되었다. 어느 날은 입에 모터가 달린 것처럼 영어로 속사포를 뱉는데 무척 신기했다. 평소에도 좀 그러면 좋으련만. 알코올에 힘입어 평소 어색한 친구랑 얘기를 나누고 춤추고 즐겁게 보냈다.

 소규모 파티는 보통 친구들의 생일 때 자율적으로 진행되었고, 느낌이 다르다. 식당이나 기숙사 방에서 모여 간단히 하는거라 스케일도 작고 더 오손도손 하다. 어쩔 때는 서프라이즈 축하를 해주기도 하고, 유럽식 술 게임 같은 걸 하고 놀았다. 소규모 파티는 그만의 매력이 있다. 


 기숙사는 좋은 사람들을 만나고 다양한 문화의 친구들과 교류할 수 있게 해준 고마운 곳이다. 포르투갈, 베트남, 중국, 일본, 폴란드, 앙골라 등 다양한 국적의 친구들과 어울렸다. 학교 수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할거라 결심했지만 여전히 망설였고, 내 영어 실력을 부끄러워했다. 기숙사가 아니었으면 외국인 친구들과 제대로 된 대화도 못 했을 것이다. 룸메이트 언니들이 있었기에 그들의 친구들과도 친해지고, 파티에서 친구들을 사귈 수 있었다. 나에게 소중한 추억을 만들어줘서 다들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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