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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졍씅 Jan 11. 2024

아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는 곳

2018년 8월, 나는 아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는 곳으로 떠났다.


 거짓말 안 하고 영국 행 비행기에서 한 시간을 펑펑 울었다. 소라게 권상우처럼 후드 모자를 푹 눌러쓰고, 말이다. 옆자리에 서양인 부자가 앉았는데, 저 아이는 왜 저러나 놀랐을 것 같다.


 2018년 1월, 리스본 교환학생으로 뽑혔다. 사실 리스본은 내가 선택한 도시가 아니었다. 당시 나는 스페인으로 교환학생 가는 게 목표였고, 무조건 될 줄 알았다. 리스본은 스페인 옆에 있다고 하길래 슬쩍 보고 ‘비슷하네. 설마 여기가 되진 않겠지’라고 생각하며 뒷순위로 선택한 곳이었다. 그해 평소보다 지원자가 많았고, 학점이 부족한 나는 생각지도 못한 리스본에 배정되었다. 얼마나 당황스럽던지. 정확한 학교 명칭은 ‘리스본대학교 ISCTE’ 고, 경영대학으로 배정되었다. (경영대학을 지원했다는 것도 나중에 알았다. 교환학생은 잘 알아보고 신중히 하자) 다음에 갈까 고민했지만, 유럽에 빨리 가고 싶은 마음에 등록했고, 초록 창에 ‘리스본 교환학생’을 검색했는데 정보가 너무 없어 좌절하기도 했다.


 2018년 1학기, 학교에 다니며 리스본 교환학생을 준비했다. 주변에 교환 가는 친구도 없고, 처음부터 다 혼자서 준비하는 거라 서툴렀다. 지금은 소소한 꿀팁도 많이 알지만, 그때는 요령 없이 고군분투했다. 비행기 표를 예매하고, 수강 신청을 하고, 온라인으로 방을 알아보고. 학기 중에도 할 일이 많았다. 그래도 교환학생은 여전히 먼일 같았다. 

 방학하고 비자를 신청했고, 일 년 치(원래 처음에 교환학생 1년 계획이었다.) 짐을 챙겨갈 캐리어를 알아보며 점점 갈 시간이 다가오는 게 느껴졌다. 남은 날이 두 자릿수가 깨졌을 때 극심한 걱정이 밀려왔다. 그전까지 걱정은 무슨 기대와 설렘으로 동동거렸는데 언제 그랬냐는 듯 부정적인 생각들이 머리에 가득 찼다. 가족과 몽실이를 1년 동안 못 본다는 게 가능할까,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곳에서 잘 지낼 수 있을까, 외국인 친구들을 잘 사귈 수 있을까 등등 생각이 꼬리를 물며 나를 괴롭혔다. 내가 좋아서 가는 거면서 자기 전에 엄마와 생이별하는 상상을 하다가 눈물이 나고, 교환학생을 취소해버리고 싶었다. 그러나 멈출 새도 없이 시간은 흘러 출국 전날이 되었다.

 출국 전날 밤이 아직도 생생하다. 엄마 손을 꼭 잡고 잤는데 앞으로 못 볼 거라는 게 믿기지 않았다. 몽실이를 쓰다듬으며 사랑하는 사람들을 더는 볼 수 없다는 건 견디기 힘든 일인 거 같다고 생각하다 까무룩 잠이 들었다. 스무 살 이후 쭉 서울에 살았지만 거의 1주일에 한 번씩 집에 올 정도로 집을 좋아했고, 2주가 넘어가면 향수병이 오곤 했었다. 걱정 속에서도 기어코 아침이 밝았다.

 아빠와 마지막 인사를 하는데 어쩐지 평소 학교 기숙사에 가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엄마 차를 타고 공항을 가는 내내 느낌이 이상했다. 울 것 같기도 하고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기도 하고 두려움과 약간의 설렘이 공존했다. 영종대교를 지나고 도착해서 짐을 내리는 순간 울컥했다. 힘든 일 하러 가는 것도 아니고 무엇보다 내가 선택한 일인데 울면 엄마 걱정만 시키는 것 같아서 열심히 참았다. 마지막으로 엄마를 아주 꽉 끌어안았다. 헤어짐은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일 같다. 


짐을 잔뜩 지고 들어간 공항에서 계속 슬퍼할 시간은 없었다. 수화물 무게가 추가돼서 생쇼를 하다가 결국 돈을 몇만 원 더 내야 했고, 미리 유심카드를 사지 않아 서둘러 구매하다 금방 탑승 시간이 다가왔다. 이제는 일 년 동안 보지 못할 한국을 눈에 넣으며 비행기에 올랐다. 그리고 출발과 동시에 수도꼭지는 터져버리고 말았다.

 기내식은 부실한 편이었고, 영화 두 편과 두어 시간 취침 끝에 런던에 도착했다. 히스로 공항 입국 심사는 까다롭기로 악명이 높았다. 며칠 뒤 리스본 가는 비행기 표가 있으니 문제없을 거라 생각했지만, 너무 긴장되었다. 한인 민박 예약한 것과 첫 외국인과 대화라 입안에서 예상 답변을 수십 번 연습했다. 긴 줄이 끝나고 드디어 내 차례! 덩치가 크고 푸근한 직원이 강한 영국식 억양의 인사를 건넸다. 내 소심한 인사 뒤에 나온 질문은 평탄하기 그지없었다.



 영국에 왜 왔냐(당연히 관광)

 뭐 하려고 하냐(박물관 가고, 뮤지컬 본다고 했음), 

오 런던 뮤지컬 최고지! 뭐 볼 거냐(당시에 정해진 건 없었으나 가장 보고 싶었던 라이언 킹을 얘기함. 보진 못했음), 

다음 도시엔 뭐 하러 가냐(교환학생), 

무슨 전공이냐(순간 비즈니스가 생각이 안 나서 경제라고 함. 그랬더니 리스본에서 경제를..? 이런 느낌의 어이없는 리액션이 돌아왔다.)      


이 정도의 가벼운 질문들이었다. 예상보다 가뿐히 난관을 넘겼을 때 다음에 어떤 어려움이 있을지 몰랐지.

아직도 공항에 처음 빠져나왔을 때 기쁨도 잠시, 영화 속에 떨어진 것 같았다. 그 넓은 곳 구석구석 백인들이 가득했고, 동양인 나 혼자서 많은 짐과 함께 덩그러니 남았다. 그때의 막막함은 말로 다 할 수가 없다. 유럽에서 동양인과 여자, 약자일 수밖에 없는 나 자신의 위치가 뼈저리게 느껴졌다. 정신 똑바로 차리고 더 단단해져야겠다고 생각했다. 물론 생각은 금방 끝내고 슈퍼에서 샌드위치를 사서 열심히 먹었다.(기내식이 중간에 라면을 먹었는데도 배고팠다.) 이후 숙소까지의 길은 다시 생각해도 너무 힘들고 고달팠다. 정말이지…(이하 생략) 

그 많은 계단에서 짐을 들어준 이름 모를 영국 시민분들께는 감사 인사를 보낸다.      

인생 첫 혼자 여행이자 첫 유럽여행은 생각만큼 행복하지는 않았다. 6일 동안 날씨는 정말 좋았고 많은 곳을 가고 구경했다. 그러나 돈을 아끼겠다고 미련 곰탱이처럼 다녔다. 끼니는 저렴한 걸로 때우고, 먹고 싶은 게 있어도 참고, 외식은 딱 한 번 했나. 미련하게 아끼며 고생했던 것이 결국 런던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기억이 되어버렸다. 분명 좋은 기억도 많은데 가끔은 힘들던 기억이 먼저 떠올라서 아쉽다.

런던에서의 6일이 지나고 다시 이동할 지옥 같은 시간이 찾아왔다. 혼자 택시비로 6~7만 원은 아까워 고생 한 번 더 했다. 안다고 덜 힘들지는 않았지만 해봐서 그런지 견딜만했다. 공항에서 또다시 수화물 무게 문제가 생겼는데 감사하게도 직원분이 어린 학생이 공부하러 간다며 특별히 눈감아주었다.     



 그러나 야속하게도 리스본에서 처음도 런던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우울함과 무력함이 밀려왔다.     

당시 나는 불안정한 상황에 놓여있었다. 출발 2개월 전, 기숙사에서 갑자기 10월부터 살 수 있다는 연락이 와서 9월 동안 홈리스 신세가 되었다. 이미 저렴하고 학교에서 가까운 플랫들은 다 나간 상태라 선택의 폭이 별로 없었다. 이에 나는 2주 동안 저렴한 에어비앤비에 머물고, 남은 열흘 정도는 여행을 가는 약간의 엽기적인 선택을 했다. 물론 수업은 제치고.

개강 일주일 정도 전에 도착해서 수업은 없었고, 하루 중 많은 시간을 작은 방 안에서 혼자 지냈다. 돈 만원 정도 아끼겠다고 발급에 3주가 걸리는 교통카드를 신청해서 어디를 마음껏 다니지도 못했다. 아는 사람은 버디와 같은 학교에서 온 언니들 둘 뿐이고, 한국과는 시차도 너무 차이나 혼자 덩그러니 떨어졌다는 생각에 우울감이 밀려왔다. 하루에 한 번씩 울었던 것 같다.

 이미 타지에서 살아본 경험이 있고 그때의 기억이 너무 좋아서 막연히 유럽살이도 좋을 줄 알았다. 그러나 시작부터 생각지도 못한 감정이 나를 때리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이런 감정도 처음이고, 모든 것이 처음이라 크게 당황했다. 숱하게 환경이 바뀌고 늘 적응을 잘했던 터라 자신만만했는데 이번은 아니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내가 선택한 방법은 움직이는 것이었다. 구글 지도를 켜고 걸어 다닐 수 있을법한 거리의 장소는 어디든 갔다. 백화점, 공원, 한국 대사관에 도서관까지 찾아다녔다. 아이쇼핑도 하고 공원에서 쉬고 책을 빌려 읽으며 마음을 달래려고 노력했다. 처음에는 어딜 가도 동양인은 나 혼자고 모두가 나를 쳐다보는 것 같아 위축되었다. 한 번의 힐끗거림도 거리의 모두가 나를 쳐다보니 굉장히 신경 쓰였다. 그러나 마음의 문제임을 나중에야 알았다. 호기심일 뿐이었고 오히려 내가 용기를 내서 물어보면 기다렸다는 듯이 친절하게 대답해 주었다. 점차 아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는 이 동네를 활보하는 내가 있었다. 할 수 있는 것들을 하고 기록하며 새로운 나를 만났다. 한 주가 지나자 오티 프로그램과 더불어 다른 한국인 친구들을 만나고, 버디의 친구들과 친해지며 조금씩 적응했다.     


교환학생에 대한 기대가 컸기에 실망도 컸다. 문제는 어디에나 있고 변수도 정말이지 다양하다. 그리고 나 혼자서 그걸 헤쳐나가게 된 것이다. 어설프고 호된 교환학생의 신고식을 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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