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고나 2024년 3월 29일 금요일
2024년 3월 9일 토요일은 내 인생에 있어 평생 잊을 수 없는 잔인한 날이었다. 집 근처에서 간단하게 운동을 마치고 집에 왔는데 유독 적막이 가득했다. 다들 낮잠을 자고 있나 하는 생각도 했지만 이상하게 불안함이 있었고 고양이 3남매를 허겁지겁 찾기 시작했다.
올해로 9살이 된 뚱이(스코티쉬 폴드/여)는 거실에 있는 캣타워에 편하게 쉬고 있었다. 뚱이와 같은 날, 같은 시간대에 태어난 삐쥬(스코티쉬 스트레이트/여)는 작은 방 의자에 앉아 있었다. 둘은 자매이지만 성격도 너무 다르다. 또한 덩치도 거의 두 배 정도 차이가 날 정도로 확연한 차이를 보여준다. 그래서인지 사이가 그렇게 좋지 못하고 종종 삐쥬가 뚱이를 심하게 공격할 때도 있다.
그런데 올해 6살이 된 막둥이 뀨가 보이지 않았다. 뀨는 워낙 왕성한 활동력과 친화력 때문인지 몰라도 머무르는 곳이 정해져 있지 않았다. 보통 뀨는 카카오프렌즈 샵에서 구매한 라이언 초대형 소파에 누워서 편하게 낮잠을 자거나 캣타워, 숨숨집, 의자 등 돌아다니면서 쉴 곳을 정한다.
유독 시샘이 심했던 것일까? 뀨는 고양이 3남매 중 가장 힘이 약했던 뚱이가 쉬고 있는 곳을 억지로 빼앗아 본인의 쉴 곳으로 만들기도 했다. 태어난 순으로 하면 첫째인 뚱이가 자매인 삐쥬와 막내 뀨에게 호되게 당하는 모습을 보니 많이 안쓰럽기도 했고 너무 심하면 이를 제지한 적도 있다.
있을 만한 곳을 다 찾아봐도 보이지 않았는데 너무 불안했다. 다른 아이였다면 냉장고 위에나 구석 같은 곳에 숨어있을 수도 있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뀨는 친화력 만렙이라고 할 정도로 사람을 너무 좋아한 고양이였다. 어머니가 집에 올 때도 뀨가 꼬리를 흔들면서 특유의 소리(망~)를 내면서 반겨줬고 이사로 인해 고양이 호텔에 맡길 때도 가방에서 바로 나오던 아이였다. 내가 집에 왔는데 숨바꼭질 놀이를 할 이유가 없었다.
우리 집 같은 경우 작업 공간이 작은 방이 아닌 거실에 마련을 해 놓았다. 공간을 넉넉하게 쓰고 싶어서 그렇게 마련을 해 놓았던 것인데 가로폭 2000mm의 화이트 테이블이 중앙에 위치하고 있었다. 그 아래 공간에 뀨가 누워 있었다. 주방과 거실 사이에서 뀨를 봤는데 여기서는 얼굴이 아닌 뒤통수와 등이 보였다. 하지만 반가움은 오래가지 않았다. 처음 봤을 때는 곤히 자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 어떤 움직임도 없었고 숨도 쉬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뀨가 우리 집에 온 것은 2018년 4월이었다. 태어난 지 2달이 조금 넘었는데 사진으로 볼 때보다 너무 작았던 기억이 생생하다. 어느 정도 작았다면 성인 주먹 정도 크기였고 공유기 위에서 잠을 청할 수 있었을 정도였다. 1차 예방 접종을 위해 몸무게를 측정했을 때 650g 밖에 나가지 않았다. 흔히 얘기하는 꼬물이였다.
아버지는 스코티치 폴드 유전자가 있던 나폴레옹 먼치킨이었고 어머니는 노르웨이 숲이었다. 어떤 이름을 지어줄지 고민이 많이 되었다. 세 달 넘게 정하지 못했는데 이름이 없다 보니 어머니와 나는 막무(막무가내), 막둥이, 흰둥이 이런 식으로 주로 불렀다.
독특한 점은 머리 중앙에 회색 털이 났다는 부분인데 독특한 포인트라서 유독 끌렸던 게 아닌가 싶다. 어렸을 때는 이 부분을 쓰담쓰담 만져줬는데 하루가 다르게 커지고 털도 장모로 길어지면서 회색 털은 아예 보이지 않게 되었다. 비록 어렸을 때 작았지만 힘은 장사 수준으로 좋았고 1년, 2년 지나면서 덩치가 확 커지면서 사실상 무력으로 보면 일인자나 다름없었다.
2024년 3월 9일 오후 4시경의 기억을 꺼내는 건 너무나도 고통스러운 일이다. 뀨가 고양이 별로 간지 3주가 되었지만 하루에 몇 번씩 오열을 하고 있다. 특히 고요의 순간에 찾아오는 막둥이의 빈자리는 가혹할 정도로 너무 크다. 다른 고양이와 달리 적극적으로 애정을 표현했던 고양이라서 더욱더 그런 듯하다. 깨어 있을 때는 항상 나를 봤고 나의 손짓에 달려오면서 소리를 치던 아이였다. 의자에 앉아 있으면 다리에 왔다 갔다 하면서 부비부비를 하고 머리를 부딪쳤으며 허벅지에 올라온 후 꾹꾹이와 함께 혀로 코를 핥아주던 아이였다.
어떨 때는 가슴 위쪽까지 올라와 목을 감싸면서 누워 있기도 했다. 내 어깨 위 고양이, 밥이라는 영화가 있는데 그것 못지않은 합체 장면이 나왔던 거 같다. 처음 우리 집에 왔을 때 내가 침대에 있으면 가슴이나 배 위에 올라와서 잠을 청했던 것을 보면 누구보다 나와 같이 있는 것을 좋아했던 아이였다. (삐쥬는 본인이 하고 싶을 때만 꾹꾹이를 하거나 애교를 부리고 자기 영역이 확실한 고양이다. 반면 뚱이는 다른 고양이가 가까이 오는 것에 대해서도 스트레스를 받는 소심한 성격인데 그래서인지 평소 나한테 의존을 많이 하는 편이다)
뀨는 무려 6년 가까이 한결같은 모습으로 바라봐줬다. 사실 도가 지나칠 정도라도 너무 바쁜 일 있는 날에는 이런 행동을 하는 뀨가 너무 귀찮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이제는 확실히 알았다. 고양이 집사로 길들여지는 것을 넘어서 내 안에 스며들었다는 걸... 이렇게 소중했던 존재와 순간을 당연히 누릴 수 있었던 것으로 착각했던 것이다. 과거에 내가 했던 선택들을 하나둘씩 복기한 후 이유를 찾아봤지만 지금의 결과는 바뀌지 않는다. 아니 바뀔 수가 없다.
고양이 나이로 6살이면 인간 나이로 치면 대략 40대 초반 정도의 나이인 셈이다. 길고양이가 아닌 집고양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너무 이른 나이인 게 분명하다. 질병인지 사고인지 명확하지 않지만 횟수로 3년 넘게 건강검진을 하지 않았다는 부분과 화장실에서 소리를 크게 질렀다는 걸 감안하면 질병이 원인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 1시간 정도 집을 비운 사이에 이와 같은 일이 발생한 것도 황망하지만 나를 애타게 찾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니 죄책감이 너무 크게 다가오는 것 같다.
석연치 않은 점이 있는 탓에 만약 내가 외출을 하지 않고 집에 있었으면 뭔가 달라지지 않았을까 하는 후회도 들었다. 로봇 청소기 위에 있던 삼각대가 캣타워 쪽으로 쓰러져 있었는데 삼각대 위쪽에 힘이 가해지지 않는 이상 밀릴 수는 있어도 완전히 넘어진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또한 고양이 바로 옆에 있는 멀티탭 스위치가 눌러져 전원이 꺼져 있었는데 고양이 발로 이걸 누른다는 게 쉽게 믿기지 않았다. 그래서 처음에는 감전사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콘센트가 다 꽂혀 있었기 때문에 그런 일이 발생하긴 어려워 보였다.
하지만 이와 같은 의문부호를 붙이는 것 자체가 무의미한 일이다. 이미 잘못된 뒤에 아무리 후회하여도 다시 어쩔 수 없다는 의미를 가진 '후회막급'이 냉혹한 현실을 무엇보다 잘 표현해 주는 사자성어이지 않나 싶다. 브런치에 글을 쓰는 순간에도 눈물을 주체하기 힘들 정도이다. 하지만 과거에 머무르지 않고 현재에 충실하게 살기 위해서라도 지금의 과정은 꼭 필요하다고 본다.
개인적으로 사후세계나 회귀와 같은 초현실적인 개념을 믿진 않는다. 정확하게 말하면 무신론자보다는 불가지론적인 사고를 가졌다고 볼 수 있다. 본 적도 없고 들은 적이 없는데 무조건 진리인 것처럼 신봉할 수는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뀨가 허망하게 간 후에는 잠을 청하기 전에 다시 과거로 돌아가서 되돌리고 싶다는 소원을 빌었고 가능하다면 내 수명을 줄여서라도 살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나도 나약하고, 무기력한 존재라는 걸 보여주는 대목이 아닐까 싶다.
예상보다 너무 일찍 헤어짐이라는 순간을 마주하면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고민이 되었다. 상실, 죄책감, 후회, 슬픔 등 펫로스 증후군에 고통받는 건 어디까지나 내가 감내해야 하는 나의 몫이다. 하지만 앞으로 예정되어 있는 헤어짐을 준비하기 위해서라도 지금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고 본다. 그래서 생각해 냈던 게 바로 연재 형식으로 글을 쓰는 것이다.
초등학교 때 과제의 일환으로 일기를 쓴 적이 있다. 하지만 그 이후로는 일기라는 걸 써 보려고 하지 않았다. 가장 큰 이유는 일종의 강박이 될 것 같다서 였다. 그 당시에는 선생님 또는 부모님이 일기장을 보고 평가를 했는데 내 행동 자체를 감시하는 수준을 넘어 옮아 매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게 성인까지 이어진 셈인데 지금 보면 편견이지 않았나 싶다. 자유의지를 갖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게 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삶의 반대편에 있는 죽음을 항상 마주하면서 산다. 어느 정도 예고된 약속일 수도 있지만 갑자기 불청객처럼 찾아올 수도 있다. 6년 동안 그 어떤 조건 없이 무한한 애정을 줬던, 이 세상에 단 하나뿐인 나의 고양이 뀨가 알려준 메시지는 바로 "일상의 순간순간을 소중하게 생각해" 그게 아닐까 싶다. 말 못 하던 짐승이라고 불렸던 고양이 뀨는 이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고 그걸 행동으로 보여줬다. 하지만 만물의 영장이라고 불리는 나는 머릿속으로만 알고 있었고 정작 행동으로는 보여주지 못했던 것이다.
무지개다리를 건너서 고양이 별로 갔다는 얘기는 받아들이기 힘든 냉혹한 현실을 참으로 낭만스럽게 풀어낸 것 같아서 괴리가 느껴졌다. 하지만 이와 같은 현실을 마주하게 된 입장에서 생각해 봤을 때 이와 같은 낭만에 기대지 않으면 내면에서 폭발하는 감정을 이겨내기 쉽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마치 소설 <빨간머리앤>에서 나오는 '내 인생은 희망을 묻는 묘지다'와 같은 낭만적이면서 긍정적인 사고방식과도 일맥상통하는 부분이다. 그렇게 의미 부여를 하지 않으면 도저히 버틸 수가 없었을듯하다.
올해로 9살이 된 삐쥬와 뚱이 그리고 고양이 집사의 일상을 기록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되었다. 과거에는 일기가 두려움이자 강박의 존재였지만, 이제는 일상의 순간순간을 소중하게 생각할 수 있게 해 주는 매개체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매일 쓰는 일기가 아닌 매주 쓰는 수필 형식이라면 충분히 타협이 가능해 보였다. 아직까지는 나의 자식과도 같은 반려동물의 죽음을 받아들이기 힘든 순간이지만... 별이 된 고양이와 꾸준히 소통을 하면서 살다 보면 삶의 의미도 자연스럽게 알게 되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