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고나 2024년 5월 10일 금요일
"어떤 사람이 그러는데
어린 시절이 행복했던 사람은 평생을 그 추억을 살고
어린 시절이 불행했던 사람은 평생을 그 상처를 치유하면서 산대
그래서 내 어린 시절은 어땠나 생각해 보니까
기억할 만한 게 없는 거야"
드라마 <7인의 부활> 12화를 보다가 인상적인 대사가 나왔다. 나의 어린 시절을 되돌아보니 행복했던 적도 있었고 불행했던 적도 있었던 거 같다. 아마 강도와 비중의 차이가 있을 뿐 우리 모두는 복합적인 삶을 살았을 거라고 본다. 올해 3월 초에 막둥이 고양이 "뀨"가 갑자기 무지개다리를 건너 영영 볼 수 없는 고양이 별로 떠났는데 그로 인해 한동안 잊고 있었던 기억이 되살아났다. 필자는 어렸을 때 여름방학이 되면 부모님과 함께 시골로 가곤 했다. 할아버지, 할머니뿐만 아니라 고모들과 삼촌 그리고 친척들도 종종 보곤 했는데 낯선 환경이었지만 도시에서 볼 수 없는 경험들을 많이 했다. 소가 송아지를 낳고 탯줄을 먹는 장면도 봤던 적도 있었고 한밤에 마당에 있는 평상에 모기장을 치고 보라색으로 몽환적인 느낌을 주는 양떼구름(고적운)을 보면서 자연의 경이로움을 느끼기도 했다. 얼굴이 잘 기억나지 않지만 할머니가 유독 나를 이뻐했었다. 필자 이름 끝에는 "규" 자가 붙는데 할머니께서는 나를 볼 때마다 "규야"하면서 정겹게 불러주셨다.
한 번은 할머니께서 계란프라이를 해주신다고 말을 꺼내셨는데 철딱서니가 없었던 난 계란프라이가 아닌 오믈렛을 해달라고 무리한 요구를 했다. 계란프라이도, 계란말이도 아닌 오믈렛이라는 걸 난생처음 들어보셨을 할머니는 당황한 나머지 결국 이도 저도 아닌 계란 요리를 만들었고 불 조절도 제대로 못해서 먹기 힘들 정도로 태워버렸다. 그걸 보고 나는 할머니에게 울면서 오블렛도 못하냐고 투정을 부렸는데 할머니는 계속 미안하다고 사과를 하셨고 그제야 울음을 그쳤다. 사실 울음이 나올 정도로 상처를 받았던 것은 아니었는데 이상하게 그날따라 오버해서 행동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다음에 시골에 올라왔을 때는 할머니가 돌아가신 직후였다. 알고 보니 할머니는 지병이 있으셨고 거동이 편치 않으셨는데 나를 위해 뭔가 해줘야겠다는 생각에 계란 요리를 하려고 했던 것이었다. 어른들의 사정을 몰랐던 철없는 나는 그것도 모르고 이기적인 행동을 했던 것인데 시골에 갔을 때는 할머니가 영영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떠나셨고 육체는 관 속에 들어가 계셨다. 장손이었던 내가 할머니의 영정 사진을 들고 산속에 있는 묏자리로 걸어서 갔는데 너무나도 긴 시간이었던 거 같다. 할머니에 대한 죄책감과 인간이 갖게 되는 생로병사에 대한 번뇌로 인해 삶이라는 것 자체가 상당히 허무하게 느껴졌다. 데즈카 오사무의 <붓다>라는 만화책을 보면서 많은 깨달음을 얻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한 명확한 답을 찾을 수 없었다. 결국 학생의 본분인 학업과 몰두하면서 망각하는 수밖에 없었다.
당시 시골집은 잠금장치 같은 게 없는 오픈된 공간이었기 때문에 외부인의 침입을 방지하는 목적으로 강아지를 1~2마리씩은 키우는 게 일반적이었다. 고양이 같은 경우는 요물이라는 인식이 강했기 때문에 키우는 경우가 거의 없었는데 집 주위를 돌면서 배외하던 불청객 같던 고양이가 있었다. 명절 때가 되면 생선과 같은 귀한 제사 음식을 들고 달아가는 경우가 많았는데 그런 걸 방지하기 위해 아예 밥그릇을 따로 만들어서 음식을 주기도 했다. 결국 그러다 보니 어느 정도 길들여지게 되었고 나를 포함한 아이들이 포획하여 집 안으로 들어와 이불속에 넣고 함께 지내기도 했다. 그걸 본 어른들은 털이 뿜뿜 날리고 해로운 병이 옮길 수 있다고 호통을 쳤는데 결국 고양이가 온전한 가족이 되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부모님에서 벗어나 독립을 했을 때 가장 먼저 생각했던 게 고양이를 키우는 것이었다. 회사에 다니고 있을 때는 제대로 케어할 수 없었지만 프리랜서로 일하게 되면 상대적으로 시간이 넉넉해지니 충분히 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있었다. 그래서 부모님의 허락을 받지 않고 오직 나의 의지만으로 생후 2달 정도 된 새끼 고양이를 분양받았는데 그게 바로 삐쥬와 뚱이였다. 원래는 한 얘만 데리고 오려고 했는데 집에 없을 때 외로워할까 봐 한 배에서 나온 자매를 데려왔다. 그리고 3년이 지난 후 데려온 아이가 바로 "뀨"였다. 원래 이름은 별이었는데 집에 온 지 6개월 정도 지난 후 뀨라는 이름을 뒤늦게 붙여줬다. 할머니와의 마지막 추억은 어린 시절의 불행했던 순간이라고 볼 수 있는데 이 아이라면 치유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에 조심스럽게 붙인 것이다.
하지만 이는 오만한 생각이었다. 15살 아니 20살까지 오래오래 살 것 같았던 뀨가 갑작스럽게 죽게 되면서 상실감과 죄책감이 나를 사로잡았다. 어릴 적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서는 응당 그에 맞는 노력을 해야 하는데 그걸 제대로 하지 못한 게 너무나 뼈 아팠다. 건강검진을 좀 더 꾸준히 받았다면 지금 내 옆에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지만 이제는 뀨가 이 세상에 없다는 걸 인정해야 하는 시점이 아닐까 싶다. 고양이 집사로써의 자격 또한 없다는 게 확실해진 마당에 어렸을 때 상처를 치유하는 것 자체가 사치스러운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빨간머리앤>에서 나오는 "내 인생은 희망을 묻는 묘지다"라는 역설적인 표현으로 앤이 삶의 희망을 잃지 않는 모습을 보면서 그나마 앞으로 어떻게 내가 대처해 나가야 할지 짐작할 수 있을듯하다. 고양이 집사로서의 역할은 이제 삐쥬와 뚱이가 함께 있을 때까지만 한시적으로 허용되는 부분이지 않을까... 이제 나는 위로를 받을 자격도 없을 뿐만 아니라 그걸 바라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뀨의 명복을 빌면서 속죄하면서 살아 가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건 없을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