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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ho am I May 03. 2024

흥부와 놀부는 왜 그렇게 살았을까

자존감이라는 마음의 추

마음 속 태평함과 불안의 저울


좀 극단적인 예이지만, 우리가 잘 아는 고전의 인물캐릭터에 흥부와 놀부를 예로 들어보자. 흥보는 좀 심하게 태평한 사람의 유형이다. 집에 먹을거리가 떨어지고 아이들이 울고 있고 당장 살 집이 마땅치 않아도 코를 골며 잘 자는 스타일이다. 배가 고프고 아이들이 울기 시작하면 그때서야 먹을거리를 찾으러 다니고, 심지어 형수에게 매를 맞아도 (부끄럽지도 않은가) 화를 내지 않는 스타일이다. 그의 마음에는 불안의 그늘이 없다. 밥은 굶는데 제법 컸을만한  첫째도 부인도 딱히 돈 벌러 나갔다는 이야기가 없다. 외동딸인 심청이도 그 나이에 품팔이를 하러 나갔다는 이야기가 있었는데 말이다. 그래도 이 가족에는 딱히 슬픔이 없어 보인다. 그러다 우연히 찾아온 로또 같은 행운에 다 같이 행복하게 살았다는 이야기다.

반대로 놀부는 마음에 불안지수가 대단히 높다. 돈도 많고 집과 재산도 다 자기 것인데도 늘 마음이 불편하다. 심지어 이 집에는 자식도 없다. 관심이 사람이 아니라 돈이라서 말이다. 놀부아내는 아주버니에게 줄 쌀 한 톨도 아끼는 스타일이니 경제적 걱정은 붙들어 매도되는데, 이 부부는 좀 더 많이 벌지 못해 늘 불만이다. 그러다가 결국 잘못된 투자를 해서 재산을 날려먹고 말았다. 


이 두 사람의 예가 좀 극단적이지 않은가. 실제 한 사람의 마음에는 두 가지가 다 있는데 말이다. 다만 안타까운 것은 어린 시절에 아마 욕심 많은 형과 순한 동생이 서로 다른 성격으로 엄청나게 싸웠을 듯한데 놀부와 흥부 부모는 각자의 타고난 본성과 교육이 잘 균형을 이루도록 자존감이라는 추를 마음속에 놓아주지 못한 것이다. 


인생의 포인트를 떠올려보자.


모두에게는 타고난 본성은 분명 있지만 어린 시절에 특히  그것을 바꿀 수 있는 포인트들이 있는 듯하다. 

흥부와 놀부 항상 형제가 날마다 싸웠던 시절에 답이 있다. 흥부는 처음부터 자기 자신을 의지가 약하다고 그렇게 생각했을까? 아니다. 자기보다 워낙 힘이 세고 의지가 강한 형 밑에서 자라면서 새싹처럼 자라난 

자기 의지를 써볼 기회를 잃어버렸기 때문 일 것이다. 신체적인 면에서 밀렸던 어린 흥부의 내면에는 싸워서 이기기보다는 용서하고 회복하는 능력이 더 많이 커진 것이다. 언젠가는 싸우고 싶은 마음도 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자기 스스로 그 마음을 세우지 않았다. 

반면에 어린 놀부의 과거에 동생 것을 빼앗고 난 후에 자기도 모르게 느낀 죄책감과 후회를 느꼈을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그 역시 지워졌다. 사과하는 것도 의지가 필요한 일인데 부끄럽다는 이유로 넘어갔을 것이다. 이 집안에는 제대로 된 훈육도 없고 반성도 없었던 것이다. 서로의 마음을 알지도 못하고 안 적도 없는 이런 상황의 반복 끝에 어른이 되어 각자 결혼을 하자 더 회복하기가 어려워졌다. 어린 시절의 본성에서 나온 멋모르고 한 행동이 두 형제의 정체성을 그대로 규정해 버렸다. 형은 매일 욕심 많다는 이유로 부모에게 혼이 나고 동생은 방어력을 키우지 못하고, 형에게 뒤에서 다시 괴롭힘을 당했던 과거는 그 후에도 계속 반복되었다. 부모가 죽고 나니 형제간에 갈등을 그나마 막아주던 울타리 마저 사라져 버렸다. 그러나 이 둘이 각자 따로 산다고 해서 완전히 분리될 수는 없다는 게 비극이다. 동생은 계속해서 형 집에 밥이며 재물을 꾸러 오고 형은 폭력적으로 내쫓는다. 동네에서 흥부네가 못살아서 욕을 먹어도 놀부가 욕을 먹는다. 그런 놀부에게 제대로 된 이웃이 있을 리가 없다. 어쩌다가 동생네가 잘 돼서 대박이 터졌다는 말을 듣고도 마음이 영 편하지가 않다. 이것이 놀부가 가진 중요한 불안의 속성이다. 

아무리 잘 살아도 물려줄 자식이 없으니, 죽으면 내 재산은 어디로 갈 것인가? 다시 동생? 꼬리를 무는 뱀과 같다.


자존감은 자신감과 다르다. 자신감은 할 수 있다는 자기 확신에 가깝지만, 자존감은 여러 사람에게 휘둘려도

결국 자기 자신으로 살 수 있게 하는 중심축에 가까운 것이다. 저울로 치면 가운데 평형을 맞추는 0점 눈금과

같다고나 할까. 어떤 일이 있어도 나는 다시 돌아올 수 있게 하는, 자기 회복력과 상처를 회복시키는 탄력성. 

이것은 정신건강에 매우 중요하다. 놀부는 놀부대로 자기 자신이 있지만 동생이 필요할 때가 존재한다. 동생은 동생대로 살지만 가끔은 형 같은 든든함과 의지 할 곳이 필요하다. 

 

몸과 마음이 건강하기 위해서는 그렇게 많은 지적능력이 필요하지 않다.


흥부는 비록 의지가 약하고 돈 버는 재주도 없지만 몸과 정신이 건강하긴 했던가 보다. 사실 이런 동생의 건강함을 바탕으로 형 입장에서 잘 보호해 주고 이끌어주어 경제활동을 할 수 있도록 자신감을 키워 주웠으면 좋았을 것이다. 그러면 아마 놀부 자신의 불안감도 많이 줄어들었을 것이다.


 불안이 주는 진짜 의미를 알 필요가 있다. 불안은 각성 수준을 높게 해서 주변 상황을 좀 더 철저하고 꼼꼼하게 받아들여 문제를 덜 생기게 만드는 경고등 같은 존재이다. 하지만 사회성은 좀 떨어지게 만든다. 또 그 결과에 대해 지나치게 엄격한 것은 오히려 자신을 깎아먹는 일이다. 부모로서 아이에게 위험에 대한 경고메시지는 주되 실수나 실패에 대해 지나치게 질책하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동생을 자꾸 괴롭히는 형이 있다면 그 아이 내면에 불안이 많다는 것을 눈치채야 한다. 능력은 높이 칭찬해 주되, 불안은 낮춰주어야 한다.

반면 하루 일이 끝나고 집에 돌아왔을 때 흥부처럼 아무 근심 없이 놀 수 있는 마음을 가진 것도 하나의 능력이다. 피곤하면 자고 음식을 가리지 않고 잘 먹고 화장실도 잘 가고 울고 싶으면 울고 웃고 싶으면 웃는 자연스러운 자기 자신 말이다. 누가 자신을 사랑해도 있는 그대로 잘 받아들이고 또 그대로를 갚을 수 있는 능력. 

제비처럼 어리고 약한 존재를 보살피고 치유해 주는 따뜻한 마음. 

이 두 가지가 잘 어울려서 결국 한 사람의 인격이라는 큰 틀을 형성한다. 잘 굴러가다가 위험하면 멈추고 떨어져도 다시 올라오고 자기 명대로 잘 사는 것. 두 형제 사이에 막히거나 쌓인 것 없이 순리대로 잘 흘러가는 것.



주변에는 무라카미의 하루키의 소설을 읽었다는 사람도 존재하지만, 그의 에세이를 좋아한다는 사람들이 더 많은 것을 본다. 그분들에게 제일 많은 추천을 받는 것은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라는 에세이였다. 하루키는 사실 굴튀김이나 옷장 속에 잘 정리된 속옷 같은 사소한 것에도 나르시시즘을 살짝 얹는 사람이긴 하다만, (아마도 그의 일부가 되어버렸을 듯한) '달리기'라는 운동을 이야기하는 그가 뿜어내는 아우라는 엄청난 것이어서, 사람들이 그 매력에 반한 것이 아닌가 싶었다.


하루키가 이 달리기에 얹은 것은 자아도취일까, 강한 자존감일까 알 수는 없지만 책을 읽는 내내 느낀 것은 나는 이미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그에게 의문의 1패를 당하고 있다는 생각이었다.  하루키가 자랑하는 것은 사실 대단한 게 아니다. 요약하자면 잠이 오면 잘 자고 또 일어나면 개운하다. 먹고 싶은 것을 잘 먹고. 다시 회복이 잘 된다. 건강하게 운동한다.  이것뿐이었는데 말이다. 마치 공자의 <배우고 익히니 즐겁지 아니한가> 이 말이 엄청난 공력을 가진 것처럼 부러움에 지고 말았다. 공부든 운동이든 그게 재밌고 즐겁다는 데 누가 그것을 이기겠는가? 결국  하루키와 공자모두가 공통적으로 타고나기를 정신적 육체적으로 매우 건강한 사람이라는 뜻인 듯하다. 거기에 더해 남보다 더 우수한 지적능력을 추가했으니 무얼 바라겠는가. (보통은 이 지점이 잘 부각되진 않지만) 무엇을 하든 마음에 거리낌 없이 할 수 있을 정도로 성격이 밝다는 뜻이기도 하다는데. 뭐 딱히 흠잡을 것이 없어 부럽다

 


부모가 마음이 편해야 ..

나는 이렇게 능력이 뛰어난 데 세상이 안 받아주는 사람이 있다면, 어떻든 세상 탓을 하는 대신 자기 자신으로

열심히 살아보는 수밖에 없다. 언젠가 다시 세상이 바뀐다면 그때 다시 빛을 볼 날도 오게 될 테니 말이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부모가 너무 조바심을 내서 아이 마음에 알지 못하는 불안을 계속 조장하고, 제 나이에 겪어야 할 것을 못 겪게 하고 자신을 깎아먹는 자책감을 심어준다면, 그것은 부모의 역할을 제대로 못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성인이 된 후에는 자기 스스로를 어떻게 다룰 것인가를 다짐할 필요가 있다. 자기 자신에게 계속 말을 걸어 자기와의 대화를 시도해야 한다. 내 성격은 이렇지만 조금만 더 욕심을 줄이자. 혹은 사회성을 늘리기 위해 불안감을 줄이자. 이런 식으로. 어린 시절에 운명을 바꿀 포인트를 놓쳤다면 지금이라도 하면 된다.

우리 집 아이들에게 물려주지 않으면 된다. 그것은 지금부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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