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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ho am I Mar 11. 2022

인생에 저항하기 위한 오래되었지만 새로운 한 가지 방법

-Joseph Broadsky로 부터

 


한동안 글을 쓸 수 없었다. 미디어를 통해 생생하게 전해지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전쟁 소식은 소소한 글쓰기를 무기력하게 만들었다. 내가 고민하는 교육문제, 따뜻하고 정감 있는 애니메이션들 주변에 찾아오는 봄에 대해서도 글이 써지지 않았다. 날아오는 포탄 속에 누군가 살고 있는데, 나는 아무 걱정 없이 글을 쓴다는 것도 이상하게 느껴졌다. 내가 아무리 글을 쓰고 책을 읽는다 한들, 나는 세계에 도움을 줄 수 있을 까. 전쟁이 아닌 결국 자유와 평화가 이길 것이라고 나 자신 한 명이라도 설득할 수 있을 것인가.  


고등학생 시절. 외할머니 집에 가서 외삼촌의 서재를 둘러보다가. 삼촌이 대학생 시절에 읽었던 시사영어사의 영한대역문고 시리즈 100번이 눈에 들어왔다.  36명의 Celebrities, 즉 명사들이 21세기 세계를 전망한 글을 모은 작은 문고 책이었다. 이 책이 만들어진 시점이 87년이니 무려 35년 전, 지식인들이 전망한 미래의 모습이었다. 당시 유명세를 떨치던 앨빈 토플러부터 알버트 아인슈타인, 글까지 영문과 번역본이 에세이 형식으로 담겨있는 이 책을 보면서 당시에도 여러 생각을 했는데, 2022년에 다시 찾아보니 그때의 전망과 지금 사회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이 더 놀랍다. 핵 문제, 대학교육 무용론, 미디어를 통한 교육, 냉전시대의 소련과 미국 문제, 지구온난화 문제, 테러와 분쟁에 대한 문제, 유전과학에 대한 기대와 불안. 얼핏 지금 시대의 뉴스 기사에서 인용해보아도 크게 다를 것 같지 않은 내용들이었다.

차이점이 있다면 그때는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이 지금은 더 유지되거나, 심화되었다는 것뿐.

어쩌면 세계는 내가 태어나는 시점부터 같은 문제를 갖고 있었고, 어쩌면 지금보다 더 오래 문제를 안고 갈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중에서도 최근, 우크라이나의 상황을 생각하며 읽었던 조셉 브로드스키의 에세이가 기억에 남는다. 찾아보니 1987년 노벨문학상 수상자였다고. 아쉽게도 한국에서는 출판되지 않아 잘 알려지지 않은 이분의 글을 한 번쯤 다시 되짚어보려고 한다. (소련으로부터 탄압을 받아 미국으로 망명한 작가였다.) 


어느 대학의 졸업식에 참여한 조셉은 졸업생들을 축하하기 위한 축사를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1984년도 졸업생 여러분, 여러분이 아무리 대담하거나, 혹은 조심하려고 해도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 여러분은 악이라고 알려진 것과 직접적인 접촉을 하게 될 것입니다. 제가 말하고자 하는 악이란 괴기소설에 나오는 추상적인 것이 아니고 여러분이 도저히 어떻게 할 수 없는 사회적 현실을 뜻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선한 본성도 혹은 아무리 슬기로운 계산도 이 악과의 만남을 막을 수 없습니다. 사실 계산하면 할수록 조심하면 할수록 이 랑데부의 가능성은 거 커지고 그것이 끼치는 충격도 더 커질 것입니다. 바로 그런 것이 인생의 구조여서 우리가 악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선으로 위장해서 나타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악이 늘 그렇게 많은 것입니다. 악은 결코 “어이, 나는 악일세.”라고 말하며 여러분의 문간을 들어서지 않습니다. 물론 그것은 악의 부차적인 본성을 알려주는 것이지만 그러나 이렇게 악이 본성에 대해 언급함으로써 얻어지는 위안도 악의 빈번한 출현에 곧 무뎌지고 마는 것입니다.


제가 이렇게 말씀드리는 목적은 단지 여러분들이 언젠가는 편리하게 생각할 수 있는 저항의 한 방법을 여러분에게 제시해 주기 위해입니다. 즉, 여러분이 악과 대면했을 때, 꼭 여러분은 선인들보다 더 승리하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악에 덜 오염된 채 빠져나올 수 있도록 해주는 방법을 말입니다. 물론 제가 생각하고 있는 것은 오른뺨을 치면 왼뺨을 내밀라는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여러분들은 아마 어떤 식으로든지 산상보훈에서 나온 이 구절에 대한 톨스토이나 마하트마 간디나 마틴 루터 킹이나 그 밖의 여러 사람들의 해석을 들으셨을 줄 압니다. 다른 말로 하면 여러분은 악을 선으로 갚는 것, 즉 악에 대해 같은 식으로 대응하지 않는다는 것을 주요 원칙으로 하는 비폭력이나 수동적 저항의 개념에 대해 잘 알고 계시리라고 생각합니다. 오늘날의 세계가 지금 과 같은 상태에 있다는 사실은 최소한 이러한 개념이 범세계적으로 존중되지 않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그것이 환영받지 못하는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그러한 개념이 효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우선 민주주의의 여지가 있어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구 상의 86퍼센트가 민주주의 결핍 상태에 놓여있습니다. 둘째, 희생자가 다른 쪽 뺨을 돌려대고 똑같은 방식으로 대응하지 않음으로 해서 얻어지는 것은 고작 도덕적 승리일 뿐이어서, 말하자면 아주 비실제적인 것이 상식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도덕적 승리라는 것도, 결국은 도덕적이지 못할 수 있는데 그 이유는 고통이라는 것은 흔히 자아도취적인 양상을 띠고 있을 뿐 아니라 희생자를 그의 적보다 우월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의 적이 얼마나 악질적이건 간에 중요한 것은 그도 인간이라는 것입니다. 비록 여러분이 타인을 여러분처럼 사랑할 수는 없겠지만, 우리는 인간이 다른 사람보다 더 났다고 생각할 때 악이 뿌리를 내린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애초에 여러분이 오른뺨을 맞았던 이유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원수에게 다른 쪽 뺨을 내밈으로써 얻는 것은 기껏해야 후자로 하여금 자신의 행동의 무익함을 깨닫게 해주는 것에서 오는 만족 정도입니다. 다른 쪽 뺨을 말합니다. “이봐, 네가 때리는 것은 육체일 뿐이네. 그건 내가 아니야. 너는 내 영혼을 무너뜨릴 수 없어.” 물론 이런 태도가 갖고 있는 문제는, 적이 그 도전을 그대로 받아들이지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조셉은 이어서 한 가지 이야기를 더 들려준다.


20년 전에 북부 러시아의 수많은 형무소 중 하나에서 벌어진 일에 대해서. 아침 7시 한 감방 문이 활짝 열리고 간수 한 명이 문간에 서서 수감자들을 향해 다음과 같이 외쳤다. 

“여러분 본 형무소의 간수들은 너희 수감자들에게 도전한다. 마당에 쌓여있는 통나무 패기로 사회주의적 경쟁을 하자.” 한 수감자가 물었다. “만일 그 경쟁에 참여하기를 거부한다면요?”

“글쎄, 그땐 식사는 없어.”

그리고는 수감자들에게 도끼는 주어지고 통나무 패는 작업이 시작되었다. 수감자들도 그리고 간수들도 열심히 일해서 정오가 되자 모두들, 특히 늘 굶주려 온 수감자들도 기진맥진했다. 휴식시간이 주어지고 사람들은 식사를 하기 위해 자리에 앉았다. 하지만 아까 그 질문을 했던 수감자만은 예외였다. 그는 계속해서 도끼를 휘둘러댔다. 수감자들과 간수들은 모두 그를 두고, 유태인들은 평소에 영리하다고 알려져 있는데 저 친구는.. 등등의 농담을 주고받았다.

휴식 시간이 끝난 후 그들은 아까보다 다소 축 늘어진 태도로 일을 다시 시작했다.  4시가 되자 간수들은 근무시간이 끝났으므로 작업을 중지했으며, 잠시 후에는 수감자들도 일손을 놓았다.

그러나 그는 아직도 도끼를 계속 휘두르고 있었다. 여러 번 그는 간수들과 수감자들로부터 그만두라는 권고를 받았으나, 막무가내였다. 그것은 마치 깨고 싶지 않은 어떤 리듬이 몸에 붙어 버린 것 같았다. 그는 마치 자동인형처럼, 5시가 되어도 6시가 되어도 여전히 도끼를 상하로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간수들과 수감자들도 이제 그를 날카로운 눈초리로 바라보았으며 그들 얼굴에 나타났던 냉소적 표정은, 점차 당황의 표정에서 그리고 공포의 표정으로 바뀌어갔다. 7시 30분에 그는 드디어 일손을 멈추고 비틀거리며 감방에 돌아와 잠이 들었다. 그 후 그가 그 형무소에 수감되어있는 동안 다시는 간수와 수감자 사이에 사회주의적인 경쟁은 거론되지 않았다. 비록 나무는 계속 쌓여갔지만


조셉은 이 일에 대해 생각하면서, 그 젊은이가 24살이었기에, 12시간이나 되는 긴 시간 동안 장작패기를 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젊은이의 행동은 다른 이유가 있어서라는 생각을 했다. 즉 그 젊은이가 톨스토이나 간디보다 산상보훈을 텍스트를 더 잘 기억했기 때문이라고.

그 젊은이는 관련 구절이


누구든지 네 오른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며


에서 끝나지 않고 쉼표나 마침표도 없이 바로 다음 구절로 계속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또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를 오리로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라.  


전문을 이용하고 보면 이 구절들은 사실 비폭력이나 수동적 저항 또는 악에게 같은 식으로 대응하지 않는다거나 악을 선으로 갚는다는 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위 구절이 의미하는 바는 악이 지나친 순응을 통해 무의미가 되어버릴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기 때문에 결코 수동적이 아닌 것이라고 판단한다. 즉 그것은 악의 요구를 끝없는 순응으로 초라하게 만들어버림으로써 악을 부조리하게 만드는 방법을 암시해주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 얻어지는 것은 정신적인 승리가 아니라 실존적인 승리를 뜻한다. 여기에서 또 다른 뺨은 적의 죄의식 (그가 얼마든지 진정시킬 수 있는)을 작용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모든 일의 무의미성에 적의 오관과 능력을 노출하게 하는 것이다. 마치 모든 형태의 대량생산이 그러하듯이.


이 싸움은 정정당당한 상황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조셉이 이야기하는 것은 인간이 처음부터 스스로를 아주 열등한 위치에서 발견하는 상황, 그래서 반격할 기회가 없는 상황, 모든 여건이 압도적으로 인간에 불리한 상황에 대해서 인 것.  다시 말해 우리는 적에 대한 인간의 도덕적 우월감이 아무런 위안이 도지 못하는 , 그리고 그 적이 수치를 느끼거나 자신의 내버린 양심의 가책에 대한 향수를 느끼지 못할 때, 또 우리가 남에게 줄 수 있는 것이라고는 뺨과 속옷과 아직 오리나 십리쯤 더 걸을 수 있는 두 발 밖에 없는 그런 인생의 어두운 시절에 관한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방법은 단 하나다. 다른 뺨을 돌려대는 것이 냉철하고 의도적인 결정이 되어야 한다. 이길 수 있는 가능성은 우리가 하는 일을 스스로 알고 있나 모르고 있나에 달려 있다.

적에게 뺨을 내밀며 우리는 이것이 우리의 시련의 시작이자 그 구절의 시작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또 처음부터 끝까지 세 구절 전체를 모두 견뎌낼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 일부만 뽑아내서는 정신적 불구가 될 수밖에 없다.

조셉은 톨스토이 이후의 러시아에서 잘못 인용된 구절에 근거한 윤리는 경찰국가에 대항하는 그 나람 국민의 결심을 크게 흔들리게 만들었다고 한다. 그 이후 러시아가 어떻게 되었는지 너무나 잘 알려져 있다. 지난 60년 동안 다른 뺨을 내민 결과 그 국민의 얼굴에는 큰 상처만 남았으며, 그래서 오늘날 그 나라는 폭력에 염증이 나서, 단지 국민들의 상처 난 얼굴에 침을 뱉을 뿐 아니라 세계의 얼굴에다가도 침을 뱉는다고 표현한다.


만약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가 위의 기독교적 가르침을 정치적 용어로 번역하려고 한다면, 우리가 가진 현대의 정치적 혼란보다 더 나은 무언가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즉 독창성- 가슴에 없으면 정신 속이라도-  (즉 예수가 가졌던 신성과 힘이 우리에게 없기에, 우리가 찾을 수 있는 그것이 무엇인지 마음에 새겨 놓고 살라는 뜻으로 해석) 


마지막으로 조셉은 자신의 이런 말이 미래의 적에게 비밀을 알려주는 것은 아닌지 고민한다. 

그럼에도 그는 미래의 희생자인 모두가 언제나 더 창의적이고 더 독창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으며, 악한보다 더 진취적일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런 혐의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바로 여기에 희생자가 승리할 가능성을 바라본다.



 불과 3쪽에 불과한 에세이지만 두꺼운 소설 한 권을 읽은 느낌. 인생을 관통하는 듯한 그의 직언.  그 고단한 싸움을 마음으로 받아들이지만 얼마나 힘든건지 짐작하게 한다. 인생은 잘 사는 것보다 나쁜 곳에서 덜 피해를 입고 나오는 것만으로도 성공인 것이다. 저항하는 모든 우크라이나 국민들에게 존경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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