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에도 근력이 있다고?

비바람 치는 폭풍우 속에서도 내 이성을 잡는 힘

by Who am I

호랑이에게 잡혀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 옛 속담에 이런 말이 있다.

김주환 교수의 저서 <내면 소통>을 읽고 떠오른 말이다. 최근에

읽었던 책 가운데는 <그릿>이 있는데, 그 후에 <내면소통> 읽기를

시작해 진행 중이다. 만약 이 책에 관심이 있으신 분이 있다면

<내면 소통>을 먼저 읽고 <그릿>을 읽으시길 권하고 싶다.

나에게는 저자는 이론이고 후자는 실전편 같은 느낌이었으니 말이다.

교수님 말씀 대로 마음 근육을 튼튼하게 만드는 법을 배우고 익힌

뒤에 그것을 공부와 자녀교육에 적용해보는 것. 지금의 나에게

필요한 일이다.


아주 옛날, 우리 선조들이 살았던 시대에는 산에 호랑이가 많았고

진짜로 그들과 마주쳤을 때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은 딱 두가지 뿐이었다.

사람 살려 하고 도망가는 것, 그리고 맞서 싸우는 것.

그런 이유로 우리의 두뇌는 어떤 위험에 맞닥뜨리면 '투쟁과 도피'

두가지 모드로 몰입하도록 세팅되어있다. 비상체제. 무얼 생각하거나

되돌아보고 결정할 여유 따위는 없다. 말그대로 공격하거나 도망가거나.

그러나 이 때의 공격에 전술적인 것이 생각날까? 이럴 때 공격할 수 있다면

그야말로 본능에서 나오는 즉각적인 판단에서 비롯된 것이다.

내가 죽거나 니가 죽거나. 이판사판이다. 이것을 편도체에서 비롯된

투쟁과 도피 반응이라고 한다.


그런데 만약 어떤 인물이 꾀돌이가 호랑이의 약점을 알아서 다행히

겁을 먹게 해 도망치도록 한다면? 그 꾀돌이는 일종의 머리를 쓴 것이다.

이 꾀돌이는 비록 겁은 났지만, 거기에 압도되지는 않았다. 그래서

자신의 머리에 편도체가 아닌 전전두피질에서 사고를 이끌어냈다.


편도체가 컨트롤이 불가능한 압도해 오는 감정이라면, 전전두피질은

방향을 잃어버린 차의 방향을 다시 잡는 이성의 힘을 이끌어 낸다.

이것이 지혜의 힘이다.

어려울 때도 판단을 가능하게 하는 이성의 끈이다.


그런데 교수님에 따르면 한국의 교육은 이 머리 속 네비게이터를

끄게 하는 공포와 불안을 조장하는 방향으로 진행되어 왔다고 한다.


그래서 점수가 낮으면 벌이 내려오고 점수가 떨어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으로 공부를 한다. 성적이 좋아진다는 기쁨보다 실패의 공포가 더 크다.


이런 교육의 단점은 어느 순간 내가 해결하기 어려운 과제가 내려오면

통제할 수 없는 공포가 나를 덮쳐온다는 것, 한 두번은 어떻게든 넘길

수 있을 지 모른다, 그러나 결국은 몸도 마음도 이미 망가져버린 뒤다.


아이를 수동적인 상태로 만들고 압박하면서 진행되는 입시교육의

가장 큰 단점은 학생이 스스로 세상 앞에 자기 자신을 한 없이 나약한

존재로 본인을 인식하게 한다는 점이다. 지금껏 이 학생은 부모나

선생님의 판단으로 자기 인생을 결정해왔다. 학생이 어릴때는 그를

대신해 완벽한 판단을 해줄 수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언젠가 본인이

그 능력을 써야 할 때, 자기 스스로를 믿는 과정이 너무나 힘들다.

그래서 누군가에게 계속 묻는다. 인터넷에게 인공지능에게..

단순한 길이나 정보 차원이 아니라 어떤 중요한 판단까지도 누군가의

판단력에 의지하고 싶어질 것이다


마음근력이란 이런 현상과 반대되는 개념이다. 마음 근력이란 단지

누군가의 공격에도 타격을 받지 않는 대인배의 뜻만 가진 것이 아니다.

마음 근력이란 압도되는 두려움의 크기를 조절하면서, 이 험난한

세상에 자기 자신으로 살아가게 하는 자발적인 동기를 이끌어내는 힘이다.



아침이 밝아오면, 나는 내 스스로 동기에 의해 일어난다. 그것 부터가

시작이다. 누군가 깨워서가 아니다. 알람도 필요없다. 몸이 아픈 날을

빼면 항상 그 시간에 눈이 떠진다. 늘 비슷한 시간에 자고 같은 시간에

일어난다. 오전에 무엇을 할 지 계획하고 그대로 실행한다.


아이도 마찬가지의 존재다. 아직은 부모가 깨워줘야 하긴 하지만.

아이는 스스로 학교갈 준비를 하고 오늘 무엇을 할 지 스스로 기억한다.

물론 잔소리가 없을 수는 없다. 그러나 그것은 아직 그들의 나이가

그래서 그런 것 뿐이다.


정말 이상적인 경우라면, 부모는 단 몇번만 지시사항을 머리에 넣어주고

간혹 체크하면 그걸로 역할을 다하는 것이다. 만약 잘되고 아니고를

부모가 지나치게 따지기 시작하면 아이는 결과론 쪽에 집착하게 된다.

가장 안 좋은 것은 결국에 문제를 회피하는 방향으로 간다는 것이다.

잘못된 것은 부모에게 감추고 말을 하지 않는다. 말을 하면 화낼 것이

뻔하니까. 그런 상황에서는 성적이든 건강이든 심각해져도 바꿀 수

있는 적절한 타이밍을 놓치고 만다.


부모가 할 수 있는 문제해결의 역할이란 무엇일까.

나는 아이가 어릴 때 놀이터에서 징검다리를 건너오는 것만으로도

기뻐했었다. 아이는 처음에는 내 손을 잡다가 점차 스스로 건널

수 있게된다. 어쩌면 아이가 큰 지금도 내가 할 수 있는 역할은

다음 다리를 건너도록 손 잡아주는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는 생각을

한다. 나는 다리를 대신 건너줄 수도, 편하라고 발판을 깔아줄 수도 없다.

떨어지면 다칠 수 있다고 정신차리라고 겁을 주는 것도 좋은 방법이 아닌 것 같다.

다리를 건너는 것은 아이의 내부에 있는 자발적인 동기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고

그 두려움을 이겨낸 스스로에게서만 느끼는 기쁨이 있다. 내 칭찬이나 보상도

그것을 약간 더해주는 것일 뿐 본질은 아니다.


나는 실제로 아이를 가르치고 지금껏 키우면서, 올바른 방향을 포기하지 않고

가르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느끼고 산다. 인성문제이건 성적문제이건

나 스스로 계속해서 꾸준히 지도하기보다는 왠지 사교육에 의지하고 싶다. 돈이 들면

한방에 해결이 가능할 것 같은 착각이 자꾸만 든다. 수학 영어를 못하는 아이도 학원가면

왠지 다 말하고 읽고 쓸 수 있을 것 같고 인성교육도 학교의 긴 수업시간이 해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나도 모르게 든다.

하지만 나의 그 어떤 바람과 달리, 외적인 훈련이 아이가 공부를 스스로 재미있게 느끼게 만들 수는

없다. 내가 하는 행동을 누군가 하게 한다는 말 자체가 모순이긴 한데,

결론 공부를 좋아하는 건 아이가 하는 것 자체를 내가 못바꾼다는 소리다.

나는 그 결심자체를 바꿀수는 없다. 내가 재미있는 방식으로 유도한다고 한들

그것은 어떤 의도를 가지고 하는 것이다보니, 속이 뻔히 보이는 것에 넘어갈리가 없다.

나는 여기서 포기하고 방임하는 것이 나을까?

나는 이 질문이 확대하면 자유주의 정치의 무책임함과 보수정치의 폭력성으로까지

갈 수 있다는 생각을 한다.

하지만 우리는 늘 그 사이에 있어야 한다. 폭력적이지 않으면서도 세상과 나를 바꾸는

방법. 김주환 교수님의 <내면 소통>이 그 질문에 대한 답일 것이다.


몸과 마음을 차분하게 다스리는 몇가지 방법을 여기에 정리해 써본다.


1. 몸과 마음을 편하게 한다. 불안감을 줄인다

몸에서 느껴지는 감각이란 그 자체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만들어낸 결과다. 감각을 믿어야 하지만 빠지는 것도 위험하다.

삼하면 세상을 보는 편견을 만들어낼 수도 있다. 몸이 아프면

세상이 우울해보인다. 특히 아침에 일어나 몸이 아프면 하루가 더

힘들게 느껴진다. 그렇기 때문에 차분하게 집중력을 발휘하려면

몸이 아프지 않아야 한다. 나는 우리 몸이 보수적이고 안정적인 것을 좋아한다고

생각한다. 단순하게 생각해서 나에게 일어나는 큰 변화는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양쪽 다 스트레스로 작용한다. 그리고 다시 자기 패턴을

안정화하는데 한참 걸린다. 내가 의도하지 않은 변화는 마음을 비우고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다.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영역은 같은 시간에 먹고 같은 시간에

자고 친밀한 가족과 오랫동안 관계를 유지하는 생활패턴을 일정하게 유지해야한다.

수험생의 경우에는 특히 그렇다. 공부법이나 교재 학원에 정착하면

시험이 가까울 수록 바꾸면 안된다.


2. 변화하면 불안하고 불안하면 행동하기 보다 가만히 있고 싶어진다.

이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밖에서 돌아온 아이는 한동안 거실에 앉아서

폰을 보면서 빈둥거린다. 옷을 벗고 씻고 숙제를 하라고 해도 말을 안듣는다.

사실 아이는 자신의 모드를 경계모드에서 안전모드로 전환시키는 중이다.

이곳이 안전하다는 느낌 때문에 아무것도 안하고 빈둥거리고 싶어한다.

심지어 가방을 내리는 것도 신발을 제자리에 벗는 것 조차도 다 귀찮아

한다. 불안한 상태에서 빨리 벗어나 휴식하고 싶어하는 마음 때문에 모든

행동이 스스로 멈춰버리는 현상을 어찌 할 것인가 .

학교에서 돌아와 이유없이 짜증내는 것도 아침출근전에 버럭하는 것도

모두 이 모드전환의 변화가 스트레스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몸은 자기에게

오는 변화를 모두 적으로 여기고 해석하려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몸은 참 단순하다. 그런 몸에 딸린 두뇌도 참 단순하다.


3. 죽고 싶다는 말의 뜻은 그만큼 쉬고 싶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 극단적인 말을 일종의 비유로 해석해야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이 말은 그만큼 힘들거나 그만큼 싫거나 하고 싶지 않다는 뜻이다.

스트레스가 극에 달한 상태라고 본인이 말하는 것이다.

부모라면 아이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무섭게 다그치기보다

스트레스를 낮춰줄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단언컨데 우리 몸은 어떤 경우에도 살도록 노력하는 방향에서

만들어졌다. 그런데도 이런 말이 나오는 것은 나의 삶의 조건이 그만큼

나쁘다는 걸로 해석하는 것이 맞다. 쉬면서

자신의 마음이 다시 근력을 찾을 수 있도록

회복시켜야 한다. 좋아하는 것을 많이하고 칭찬을 많이 듣고

조건없는 사랑을 많이 받아야 한다. 그것은 남이 해줄 수도 있지만

내가 나에게도 해줄 수 있는 선물이다.


나는 그 패턴을 이해하고 그 사이클을 기록해보려고 한다. 나는 주기적으로 어떨때

불안해지는가. 사이클을 안정적으로 노력해왔는가?

아이는 어떨 때 불안해지는가. 그 사이클을 어떻게 이해하고

다스려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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