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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ho am I Dec 19. 2022

독서의 끝에서 만난
두 여성 작가의 글 이야기

마거릿 에트우드와 박완서 

독자와 덕후의 경계


최근에 글쓰기는 거의 못했지만 독서에서는 놀랄만한 성과가 있었다. 인생 작가들을 만난 것.

그 두 명은 여성작가로서 대가라고 할 수 있는 캐나다의 마거릿 애트우드와 한국의 박완서 작가다.

여성 작가를 이야기할 때마다 항상 언급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읽을 기회가 없었는데 우연히 접한 것 치고는 너무 늦게 만난 느낌마저 들 정도로 나에게 큰 영향력을 주었다. 이 두 사람은 한 사람은 영미문학에서 다른 한 사람은 한국문학에서 권위와 무게를 가지고 삶의 도덕성을 판단하는 힘을 가진 분이었다.


두 달간 접한 작품을 세어보니


마거릿 애트우드


그레이스(넷플릭스)

시녀 이야기

타오르는 질문들(에세이)

글쓰기에 관하여(에세이)


박완서

그 여자의 집

자전거 도둑

목마른 계절

오만과 몽상

(오디오북)


만약 어떤 작가가 단순한 글 실력만 갖고 독자를 설득하는 데 성공하는 것은 있을 수 있지만, 독자에게 도덕적으로 이렇게 저렇게 살아야 한다는 말을 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 적어도 톨스토이나 도스토예프스키가 아니라면 누가 그런 진지한 판단을 가벼운 독자 앞에서 서슴없이 할 것 인가. 하지만 위 두 분은 직선적이면서도 그것을 에둘러 설명할 수 있는 뛰어난 필력을 갖고 있기에 감히 그 메시지들을 거부할 수 없었다. 보통은 읽다가 미뤄놓는 책도 있는데 그 두 분은 책이든 오디오북이든 한번 잡으면 끝까지 들어야 했다. 어쩌면 우리 엄마가 헸을 법한 이야기도 이들이 하면 어쨌든 다 흡수하고 있었다. 나는 할머니 뻘 되는 노련한 작가들의 목소리가 이렇게 힘이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몇 년 전에는 도리스 레싱을 읽고 비슷한 느낌을 받았는데 심지어 레싱도 애트우드와 비교해서는 판단을 독자에게 맡기는 느낌이었다.)

내가 정말 강조하고 싶은 것은 이들 작가의 영향력이 '이것은 나의 이야기니 독자가 읽은 후 각자의 판단에

따르시오'가 아니었다는 것. 나는 그분들 앞에서 철저하게 인생을 배워야 하고 글쓰기에 대해 반성해야 하는 애송이에 불과했다. 그리고 그런 스파르타 식 인생과 글쓰기 수업은 나를 이전의 삶과 완전히 돌아서게 만들었다. 무엇을 하든 끈기와 자신감이 부족한 나 자신에게 두 작가의 언질은 매섭게 꽂혔다. 나는 왜 이들의 말이 나의 이 시기에 이토록 중요한가 다시 생각했다.

그 이유인 즉, 산다는 것은 지금이 아니면 다시는 올 수 없는, 1분 1초의 아까운 시간이기에 그만큼 신중하게 인생의 갈림길을 선택해야 한다는 것. 이 두 작가를 빌어 '도덕성'이란. 마치 가난한 자에게 걸려있는 목줄 같아서 본능을 따르자니 법에 걸리고 착하게 살자니 내 육신이 우는 냉혹한 것이다. 그러나 일단 어기면 가난한 자의 어떤 변명도 먹히지 않는 괴물이 된다. 세상이 아무리 부도덕해도 내가 부도덕 해지는 순간 나는 철저하게 징벌의 대상이 된다. 그 삶을 조금이라도 위로할 수 있는 건 글쓰기뿐. 더욱이 부조리한 상황에서 살아가는 여성으로서. 

(애트우드의 시녀이야기는 다음 글에서 좀더 자세히 다루기로) 


글쓰기로 다시 돌아온 지금 나는 자신에게 묻고 싶어졌다. 요즘 성공한 덕후라는 말이 있듯 충실한 독자는 성공한 작가가 될 수 있을까? 영화를 10000편을 본 평론가가 있고, 덕후로 행복하게 사는 사람이 있듯이 글 쓰는 일로 돈을 벌든 안 벌든 책장으로 둘러싸인 세계에 만족하며 사는 그런 일도 있지 않을까 말이다.

글을 잘 쓰고 못쓰고를 떠나 자발적으로 읽기만을 선택한 삶이 있을 수 있을까.


마거릿 애트우드는 가끔 독자의 이런저런 요구에 '네가 써라 가치 있는 책' 이런 티셔츠를 제작해서 입는 것은 어떠냐고 묻기도 했지만. 어쨌든 나는 참신한 작가 10명 못지않게 참신한 독자 한 명이 더 값어치를 한다고 믿는다. 작가 입장에서 괜찮은 독자를 만난다는 것은 복 받은 일이라고. 수와 상관없이 말이다. 생각보다 독자의 눈은 상당히 매섭고 날카롭다. 그래서 작가가 가상의 독자를 설정하고 작품을 쓴다는 것은 단 한 글자도 허투루 쓸 수 없게 만든다. 나는 브런치에서 지금도 중언부언 쓰고 있긴 하지만.


다시 돌아온 글쓰기. 글쓰기란 무엇인가. 


나는 내 글을 좋아하는 가? 이것은 생각보다 심도 있는 질문이다. 나는 밥을 하거나 일을 할 때 잘해서 하는 것이 아니다. 먹고살기 위해 한다. 운전, 바느질이나 뜨개질을 하거나 만들기, 음악을 연주해도 나는 거기서 얻는 즐거움보다 괴로움이 더 크다. 그건 그냥 나는 할 수 없는 영역에서 누군가가 하는 것을 따라 하는 것에 불과하다. 나의 정신은 그런 것들 앞에서 바닥을 친다. 하지만 아주 간단한 글을 쓸 때 그것이 완성되었을 때 

나는 다른 데서는 맛볼 수 없는 기쁨을 맛본다. 나 자신을 뺀 아주 객관적인 글을 쓸 때조차 글을 나에게 기쁨을 준다. 이것은 어쩔 수 없이 하는 일이 유일하게 아니기 때문에 소중하다. 


박완서 작가에 대한 이야기는 좀 더 할 말이 많다. 그녀는 작가가 아니라 일반인도 무려 40년을 살았다. 그녀는 인생을 조직하지 않은 채 역사의 흐름 속에 자신을 맡기고 산 것이다. 그러다가 어느 불혹의 날 그녀는 자신의 삶을 소재로 글을 조직하고 구성하고 객관화시켜 편집시켜 작품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그건 그냥 넋두리 일 수도 있지만 넋두리의 차원을 넘어서 역사에 대한 증언 차원까지 올라가게 되었다.  자기 자신을 순식간에 넘어버린 그 힘은 무엇이었을까. 사실 그녀가 글을 쓰기 시작했다고 주변 상황이 변한 것이 아니었는데, 과거가 변한 것도 아닌데 그녀 자신이 갑작스레 변한 건 무슨 이유였을까.  그녀는 글을 처음 쓰기 시작했을 때 사실만 갖고 쓰기란 아주 어려웠지만 픽션을 약간 섞자 술술 풀리기 시작했다고 썼다. 그렇게 쓴 작품들은  실제 사실보다도 더 감동을 준다. 매번 비슷한 소재라는 생각이 들지만 그녀의 글쓰기는 늘 기대 이상으로 나를 놀랍게 한다. 그건 시대를 넘어서는 놀랍고 날카로운 그녀만의 시각이 있기 때문. 그러나 그녀의 글쓰기는 배워서 익힌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서 더 놀랍다. (그녀는 전쟁 중에 대학을 다니다가 포기했다.)

왠지 익숙한 소재로 시작하지만 주인공들의 울퉁불퉁한 감정이 생생하게 살아나는 지점에서 나는 애트우드의 인물이 느낀 한과 공포, 증언자로서의 역할이 만나는 것을 느꼈다. 그 때문에 작가는 소재가 아닌 시각을 새롭게 구성하는 역할을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결론적으로 작가는 어쩌면 말로 하는 수다를 글로 푸는 사람일 수도 있지만, 수다쟁이만큼이나 확장력면에서 능력이 뛰어나지만, 이야기 그중에서 좀 더 가치 있는 이야기를 모으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누구도 시키지 않았건만 자발적으로 (고생하면서) 그 이야기를 모으고 다른 사람에게 퍼뜨리기를 좋아하는 사람.

그래서 이야기를 좋아하면 가난해진다는 할머니들의 말이 있었나 보다. 이야기에는 먹을 것보다 더 강한 유혹과 매력이 있으니, 거기에 빠지면 다른 것들을 다 잊어버리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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