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에서 찾는 공격과 방어의 전략
참 묘했다. 고전을 좋아하지만 중국 고전은 왠지 옛날 교과서 느낌이 나서 잘 읽지 않았던
내게 <동양 고전>이 준 느낌과 생각은. 따뜻한 듯하지만 알고 보면 매서운 봄바람 같다.
모처럼 친정집에 들른 날 잠은 오지 않고 예전 내 방에서 아무 고전이나 펴서 읽을 생각이었다.
독서할 틈도 없이 흘러가는 무심한 시간들 속에서 조언이 될 수 있는 말이라면 아무 글이라도
읽고 싶었다. 사실 그럴 때는 고전이 딱이다. 나를 객관화시키고 세상사를 이해하는 데는 고전
만 한 것이 없다.
탈바꿈의 동양 고전
동양고전을 갈무리한 책을 읽다 보니 당연히 나오는 것은 공자. 동양고전의 첫대목에 나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데도 왠지 새롭다. 모두가 다 안다는 공자님의 어록도 어디선가 많이 읽고 들었지만
의미 있는 사유로 다시 새겨본다.
평행의 정신
'통치는 법과 원칙만으로는 되지 않는다'.
이것은 얼마나 쉬우면서도 어려운 말인가. 우리는 다른 사람을 판단한 잣대를 가지고 있다. 모두가
안다. 하지만 그것이 결국 그 사람을 바꾸는 데는 도움을 주지 못한다. 그렇다면 결국은 소통의 능력.
다른 이의 마음과 생각. 나의 마음과 생각을 일치시키고 때로는 바꿔보는 시간을 필요로 한다.
그게 '어질 인'의 기본이다. 원래 '어질 인'이라는 한자는 물에 빠진 아이를 안타깝게 여기는 마음
이라고 한다. 그 말인즉슨 상대방의 안타까운 처지를 나로 바꾸어 볼 수 있는 사고능력이 필요하다는 것.
사실 이 사회에서 그 누가 당한 일도 내 일이 되지 말라는 법은 없지 않은가. 타인을 돕는 것은 나에게도
겪지 않은 일에 대한 경험을 준다.
결국은 넓게 보아서 통치라는 것도 같은 경험을 기본으로 이야기하고 어려움을 해결하는 정신에서 비롯된
것. 사람은 거울을 보지 않는 다면 기본적으로 다른 이의 얼굴을 먼저 본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 자신을 깨끗하고 올바른 상태로 정비해야만 다른 이와 진심 어린 소통을 할 수 있다.
수직의 정신
'인'이 상대와 나를 같은 위치에서 바꿔보면서 자기를 기르는 것이라면, '충'이나 '효' 같은 개념은 인간관계의 수직성을 바탕으로 이해하는 것에 도움을 준다. 충과 효의 개념은 일부에서 구 시대적인 유교의 정신으로 여겨지기도 하지만 나는 아주 기본적으로 모든 인간관계의 상하가 존재한다는 전제를 깔고 이해하는데 초점을 두고자 한다. (이것은 인간관계의 자연성에 대한 인정이다. 마치 나무에 뿌리와 가지가 있다. 이 말처럼. 뿌리가 가지보다 아래에 있다고 기분이 나쁘다거나 같은 위치에 있어야 한다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
누군가를 대면했을 때 우리가 그 사람을 이해하는 인식의 틀은 기본적으로 그 사람이 가진 직함과 소속 분야 나이 등이다. 그 사람을 깊이 알아갈수록 이런 기본 요소들이 무뎌지긴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이 틀은 유효할 때가 많다. 친해졌다고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게 나이와 직함이라는 틀이라는 것. 이것은 상대방과의 관계 측면에서 이해하는 인식의 도구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자기 영역을 지키는 것에도 도움이 된다. 상사는 상사대로 부하 직원은 부하직원대로 나누어졌을 때 편한 점이 있는 것.
이런 틀을 바탕으로 수직적 관계에서 서로 어떤 식으로 대했을 때 관계가 가장 잘 지속되는 가에 대한 대답은
결국 '신뢰'에 대한 질문일 수밖에 없다. 앞에 가는 사람이 혹은 머리가 같은 위치에서 볼 수 없는 꼬리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은 '믿어라' 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 믿음과 신뢰는 공짜 티켓이 아니라, 머리가 잘못된 판단으로 나쁜 길로 들었을 때 같이 불구덩이로 빠질 수 있다는 전제를 바탕으로 한 것이다. 사회에서 책임은 보통 윗사람이 진다. 아이가 잘못돼도 부모가. 병사가 잘못하면 장군이. 학생이 잘못하면 선생이 진다.
그것은 리더에게는 판단에 자율성이 있는 동시에 전체를 위해 보다 나은 판단을 해야 한다는 의무 때문.
동양의 고전에는 기본적으로 개인보다 사회를 보호하고 유지하고자 하는 목표가 뚜렷하다. (서양 고전인 군주론이 왕조의 권력을 유지하려는 목표를 가진 것, 개인 소유에 대한 개념이 두드러진 것과는 사뭇 다른 듯하다. )
손자가 강조하는 인생과 전쟁 그리고 계획의 중요성
이번에는 손자다. 손자는 사실 공자와 같은 시대에 살았다. 하지만 공자는 평화를 주장했고 손자는 전쟁은 '있을 수밖에 없다'라는 현실론자였다. 그렇다면 현실적으로 있을 수밖에 없는 전쟁에서 어떻게 하면 살아남을 것인가. <손자병법>은 이에 대한 답이다. 나는 공자 편에서도 긍정적으로 이어지는 인간관계에 대해
여러 가지를 생각했지만 사실 손자의 현실론에 더 마음이 끌렸다. 내가 사는 사회가 곧 전쟁이기에.
여기서 한 가지 포인트를 짚고 가자. 지금 시대에도 과거에도 전쟁은 가슴 아프고 힘든 일이다. 누구도 전쟁을
겪고 싶지 않다. 지금에 와서 마치 전쟁이 게임처럼 버튼만 누르면 미사일이 날아가고 파괴되는 식으로 바뀌긴 했지만 그래도 기본적인 의미는 바뀌지 않는다. 전쟁은 죽고 사는 일이고, 나라가 바뀌고 망하고 터전이 없어지는 진지한 사건이다. 방식이 바뀌었다 해서 그 본질이 바뀌지 않는다. 손자는 그 진지함을 첫머리에 적는다. 어떤 누구도 사활을 건 상황에서 낄낄거리며 현실을 회피할 수 없다. 사방이 막힌 지점에선 둘 중에 하나. 목숨 걸고 싸우거나 피하거나. 좋든 싫든 선택해야 한다. 그 지점에 인간으로서 성장이 있다. 너와 내가 친구로서 행복했을 때도 있었지만 더 이상 마주 보고 웃을 수 없는 상태일 때 사람은 자기 자신이 누구인가 진심으로 묻는다. 그리하여 서로 같아도 공존할 수 있지만 다름에도 공존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 지점까지 성장하는 것. 그 과정은 치열하고 아프다.
그래서 손자는 전쟁을 논했지만 가볍지 않다. 한없이 고민하고 계획하고 손실을 따지라고 말한다. 몇 번이고
미리 시뮬레이션하고 피해를 최소화하고 조직의 안위를 위해 헌신할 것을 요구한다. 감정적이 되지 말고
이성적으로 판단하고 싸움이 안될 것 같으면 심지어 포기하라고 요구한다. 손자에게는 어떤 이념이, 어떤
국가적 목표가 국민의 경제적 안위와 안정보다도 앞선 것이 아니었다. 전쟁을 통해 많은 이득을 얻었다고 하더라도 결국은 무엇을 위한 것인가. 만약 국민의 집단적 목표가 행복인데 전쟁을 통해 다 잃었다고 하자.
그렇다면 전쟁에서 이겨도 이긴 게 아니다. 이것은 전쟁 일 수도 있지만, 국가의 개발목표 또는 경제적 성장을 추구할 때 무엇을 중시하고 무엇을 목표로 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성찰일 수도 있다. 국가를 위한 개인인가? 개인을 위한 국가인가?. 이 모든 것에 앞서 그는 '계'를 논한다. 즉 행동하기 전에 생각하라는 것.
이것은 마치 악보에서 쉼표를 찍거나. 문장을 쓸 때 문장부호를 써서 현재의 흐름을 조절하라는 뜻이다.
현재의 상황을 판단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보되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적어보라는 뜻도 된다.
사실 인간은 위급상황이 되면 뇌의 구조상 '도망치거나 맞서거나' 두 가지밖에 생각할 수 없는 상태가 된다.
게다가 눈앞에서 누군가 죽거나 살거나 하는 상황이 닦치면 많은 사람들이 감정적으로 변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그 상황에 대한 판단이 아니다. 부당한 상황에 대한 울분과 토로도 아니며
단지 할 수 있는 것은 현실을 현실대로 보면서 대처방법을 찾는 것. 지금 남아있는 것과 가진 것을 보존하고
적이 약해진 시간을 틈타서 생존을 위해 탈출하는 것. 결국 최종목표는 생존이고, 생존으로 가는 과정에서
목표를 잃어버리지 않을 정도의 자기 보호 능력을 유지하는 것이 정답이다. 그 지점에서 나는 문득 깨닫는 바가 생긴다. 애초에 우리 자신이 어떻게 생겼든 어떤 약점을 갖고 태어났든 중요한 게 아니라는 것.
우리는 목적에 도달하기 위해 우리 자신을 최적화하면서 여기까지 끌고 온 것이니 말이다. 우리는 생존이라는 목적을 위해 태어났고 이에 대한 이유가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상대방도 마찬가지이며, 결국 각자의
탈출 통로를 찾아야 한다. 오래 끌 시간이 없다.
고전은 그렇게 어느 날 갑자기. 전혀 생각지 못한 일상에서 갑자기 머리를 스쳐 지나가며 불 꺼진 나를 일깨운다. 아이 탓을 하다가도 장수는 병사를 탓하지 않는다는 말이 떠오르거나. 무슨 일에 앞서 계획을 세워야겠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친다. 무엇을 하더라도 너무 많은 열정을 쏟아 후에 기진맥진 해지는 일이 없도록 자신을 조절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또 목표를 이루더라도 그것이 전부가 아님을. 장기적으로 바라봐야 함을 깨닫게 한다. 독서는 곧 힘이다. 다음에는 맹자 편을 읽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