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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ho am I Dec 31. 2021

불안을 줄이는 방법에는  이런 것도 있습니다.

-빨간 방의 초대-

‘도넛의 구멍을 보는 것이 아니라 도넛을 보라’ 영화감독 데이비드 린치는 그의 저서 <빨간 방>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 책의 원제는 Catching the big fish- Meditation, consciousness & Creativity

즉 어떻게 하면 큰 아이디어를 얻을 것인가- 명상과 의식, 창조에 관한 그의 에세이다.

(출판사의 한국어 판 제목은 그의 작품 속에 자주 등장하는 초현실적인 공간이다.)

데이비드 린치는 미국에서 컬트 영화의 대가라고 불리는 감독이다. 그의 작품은 초현실성과 블랙유머로 가득하다. 그의 작품은 <엘리펀트 맨>, <이레이저 헤드> <블루벨벳> <멀홀랜드 드라이브> 등을 감독 연출했으며, 최근 개봉한 <듄>도 한때 그가 연출했다고 한다. 물론 실패했지만.

어떤 영화 평론가는 이런 말을 했다. 그의 솟아오른 흰 머리 속에 우리가 상상하지 못한    무언가가 살고 있는 것 아니냐고       

내가 그의 작품을 처음 본 것은 초등학생 (90년대 국민학생) 쯤이었다. 우리 집에는 드르륵 하고 채널을 돌리는 한물간 텔레비전이 그때도 있었는데, 새 제품을 사면서 밀려난 그 오래된 텔레비전을 오빠와 나는 밤에 이불을 쓰고 보았다. 그때 본 외화 중에는 <트윈 픽스, Twin peaks>도 있었는데 우리가 이 작품의 배경이나 감독에 대해 알았을 리는 전혀 없고, 둘은 몽환적인 음악 속에 묻어가다가 갑자가 사람을 정색하게 만드는 스릴러 분위기의 드라마에 빠져 있었다. 그는 피나 귀신 무기 같은 걸로 겁주는 그런 류가 아니었다. 그는 특정 상황만으로도 사람의 심리를 조종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감독이었다.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 그의 빨간 방에 잠깐 초대받았던 셈이다. 커서야 비로소 이 감독이 그 작품을 연출했다는 것을 알았고, 완전한 작품을 찾아서 보긴 했다만, 정말인지 범인이 누군지는 끝내 안 알려주는 그의 스타일에 K.O를 외치고 말았다.

(뜬금없지만 우리나라 드라마인 ‘동백꽃 필 무렵’을 보다가 이 작품을 떠올렸는데. 혹시 오마주 하신 건지 정말 궁금했었다. 드라마를 보면서 작가님이 정말 누구인지 알고 싶었다)


지금에 와서 책장에서 그의 책을 다시 꺼내 읽으니, 어린 시절 내가 받았던 몽환적인 스릴러의 첫인상과 20대에 보았던 컬트 영화가 어쩌면 감독이 놓았던 미끼였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날 내가 본 것은 뭐가 도넛의 구멍이고 도넛인가. 그가 이야기하고 싶었던 건 다른 영역일 수도 있다. 그만큼 이분은 명상과 직관적 사고에 관심이 무척 많은 분이셨다. (다시말하지만 종교가 아니라고)  


스티브 잡스가 명상을 사랑한 것처럼, 이분도 에세이의 첫 시작을 명상에 대한 그의 첫 경험으로 시작한다.  마치 이 체험을 엘리베이터의 케이블이 끊어진 것 같았다고 표현한다. 명상에 빠지고 나니 문득 20분이 흐르고 난 뒤였다는 것이다. (표현의 비약이 있다고 느끼긴 한다만)

그 후로 그는 33년간 단 한 번도 명상을 줄인 적이 없다고 한다. 아침에 한번 오후에 다시 한번 20분 정도 명상을 한다고 한다. 그리고서 하루 일을 시작하면 일하는 즐거움이 커진다고 한다. 직관력과 향상되고. 대신에 부정적 사고는 줄어들었다고 한다.



나는 그의 글을 읽으면서 문득 나의 내면을 컨트롤하는 것에 대해 다시 생각했다.

명상을 일종의 내적 트레이닝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를 들어 예전에는 불안감을 느끼게 되면 나의 심리상태는 불안의 원이 중심이었다. 이 원안에 에너지가 나도 모르게 집중되어있을 때 나는 스스로를 컨트롤하지 못했던 것 같다. 불안의 원은 어쨌든 주위 사람들과 나에게 나쁜 영향을 미쳤다. (나를 비롯한 엄마들의 관계와 인터넷 카페는 일종의 불안의 고리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가장 큰 피해자는 내가 키우는 아이들이었다. 나는 자주 아이를 키우는 어려움에 대해 이야기했고, 나 역시 내 삶의 중심을 도무지 찾을 수가 없었다. 더욱이 코로나가 시작된 이후에는 변하는 감정의 변화 때문에 견디기 쉽지 않았다. 뉴스를 볼 때마다 눈앞에 펼쳐지는 현실이라는 것이 도무지 믿기지가 않았다.


과거가 그렇다면 지금의 나는 과거의 불안 상태에서 자신을 컨트롤할 수 있을 정도로 상당히 벗어났다고 할 수 있다. 나는 일단 원을 그렸다. 그리고 그 중심에 불안이 아닌 다른 것을 써넣었다.

자신감. 긍정성. 아이들에 대한 사랑. 뭐든 좋았다. 그 밖의 원에는 작게 불안의 영역을 그렸다. 불안을 완전히 없앨 수는 없지만, 불안은 그 자체로 위험을 예방하는 차원에서 그 기능을 하도록 적당한 크기로 그렸다. 불안이 더 이상 자기실현하는 그런 모습을 보지 않도록 꽉 잡고 있겠다는 각오 했다. 그리고 어쨌든 몸이 아프면 이런 컨트롤의 영역이 줄어들기 때문에 최대한 건강을 오래 유지하는 방향으로 자신을 관리하자고 마음먹었다. 나는 40이 넘어서 불안이 아닌 원하는 것에 눈을 뜨자고 마음먹었다. 그것이 린치가 말하는 아이디어 사냥이든 혹은 다른 것이든.

또 필요한 카페를 빼고 인터넷 맘카페 들을 접었다. 엄마들의 단톡방도 과감하게 접었다. 어차피 들릴 소식이면 다 들릴 것이라고 마음먹었다. 생각 없이 몇 시간이고 보곤 했던 그런 카페와 엄마들의 단체방을 줄이자 내 아이들만 보였고 나의 불안도 줄어들었다. 더 이상 말을 퍼 나르지도 주변의 소문을 듣지도 않았다. 그래도 정말 친한 엄마 한 분만은 최후의 보루로 연락을 가끔 하기로 했다. 근처에 확진자가 나와도 그냥 할 수 있는 일만 하자고 마음먹으니 의외로 마음이 담담해졌다. 에너지를 글쓰기에 돌리기로 했다.


다시 그의 저서로 돌아가, 그의 말을 인용해본다.


“세상은 당신이 보는 그대로야”
나는 이렇게 말하기를 좋아한다. 영화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프린트가 다르다고 해도, 한 영화의 프레임은 동일한 수로 이뤄져 있고 동일한 순서로 배열되어있고 동일한 사운드 등을 갖고 있다. 그러나 관객의 시선 때문에 같은 영화라도 볼 때마다 달라진다. 그 차이는 어떤 때는 아주 미묘한 것에 불과할 수 있지만, 어쨌든 차이가 있다. 분명히 그 차이를 만들어 내는 것은 관객이다.

여기 관객에게서 출발해서 영화로 갔다가 다시 관객에게 돌아오는 원이 있다고 정해보자. 관객 개개인은 보고 느끼고 생각하고 자기 나름의 의미를 영화에 대해 갖는다. 아마도 관객이 가진 것은 영화작가인 내가 좋아했던 것과 다른 바일 것이다.
이처럼 한 영화를 사람들이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 (중략) 그냥 당신이 좋아하는 영화를 만들어라. 아무도 그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다. (원. 039P)


어쨌든 그의 이 충만한 에너지와 기운으로 만든 작품이 그렇게 다크 한 것은 정말 미스터리 하다. 어쨌든 그는 가장 미국인 다운 스타일이니까. 영화 속 그의 세계는 그저 그의 세계일 뿐. 오해하지 말자.

도넛을 주면 도넛만 보자. 엉뚱한 생각은 하지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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