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Alice Dec 16. 2024

2024 내가 겪은 베를린 스타트업 생태계

파트너십 매니저의 관점으로 본 베를린과 한국의 스타트업


내가 PMM(Product Marketing Manager)으로 일하기 전에, 독일 최대 항공사(L사) 그룹의 디지털화 및 이노베이션 본부에서 전략 파트너십 매니저로 근무했다. 우리의 목표는 여행과 운송 분야에서 새로운 디지털 사업 모델, 파트너십, 그리고 투자 전략을 추진하는 것이었다. 나는 주로 여행, 모바일, 운송 분야의 스타트업 생태계를 연구하며, 그 과정에서 얻은 인사이트를 내부적으로 공유하고 유망한 스타트업들과의 파트너십을 개발하는 역할을 맡았다.


비록 더 좋은 기회를 만나 예상보다 일찍 팀을 떠나게 되었지만, 그 시간은 매우 값진 경험이었다. 아시아부터 유럽, 미국까지 폭넓은 스타트업 커뮤니티와 교류하며 시장 동향을 분석했고, 그룹의 내부 니즈에 부합하는 혁신적인 스타트업들을 발굴했다. 우리의 목표는 단순한 협력 수준을 넘어, 그룹 차원에서 본격적인 벤처빌딩(Venture Building)의 기반을 다지는 것이었다.


내 역할은 파트너십 매니저로서 그룹의 니즈를 분석하고, 외부 스타트업의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수용하여 프로젝트와 솔루션에 필요한 자원, 네트워크, 자문을 연결하는 지원적 역할을 수행했다. 이러한 점에서 인큐베이팅(Incubating)과 맥락을 같이하는 부분도 있었지만, 본부의 주요 업무에는 인큐베이팅이 포함되지 않았다. 이외 창업 과정 지원과 운영 주도를 담당하는 벤처 개발(Venture Development) 팀이 별도로 있었고, 이 팀은 직접적으로 혁신을 창출하며 그룹과 전략적으로 연계된 솔루션을 개발하는 역할을 맡았다. 


빠르게 변화하는 스타트업 시장 속에서 매일이 긴장감 넘치는 도전이었지만, 그만큼 보람찼다. 창업자들, VC 투자자들, 다른 대기업의 벤처빌딩 담당자들과 네트워킹하며 귀중한 인연을 만들었고, 트렌디한 스타트업 이벤트들을 통해 새로운 영감을 얻었다.



근무 환경도 좋았다. 베를린 Mitte 중심가, TV타워가 멋지게 보이는 모던하지만 옛 건축 양식이 그대로 남아있는 (렌트가 엄청 비싼...) 오피스 빌딩에서 근무했는데, 건물 내 혹 외부 힙스러운 카페에서 커피도 자주 마시고, 주변의 트렌디한 레스토랑에서 점심을 먹는 것도 일상의 즐거움이었다. 재택근무가 자유로웠지만, 팀원들과의 유대감을 위해 주 2-3회는 자발적으로 출근했다. 특히 봄과 여름에는 자전거로 출퇴근하면 45분은 걸려서 땀으로 흠뻑 졌는데, 건물 내 샤워실을 이용할 수 있어 쾌적했다.



베를린에서 싱가폴까지, 스타트업 시장에 대한 통찰력을 높이다


무엇보다 독일 스타트업계에서 만난 사람들은 내가 가진 독일 직장인들에 대한 고정관념을 완전히 바꿔놓다. '변화를 싫어하고 여유롭게 일하며 5시 칼퇴하는' 이미지와는 달리, 이들은 독일을 바꾸고 싶어하는 열정이 충만했고 매우 열린 마인드를 가지고 있었고, 독일, 더 나아가 유럽을 벗어난 글로벌 시장의 변화의 흐름을 깊이 이해하고 있었다


또한, 작지만 싱가포르에 아시아 지부가 있어는데, 그랩(Grab) 출신이자 싱가포르 및 상하이에서 창업 경험이 있는 지부장 덕분에 인도, 중국, 한국 등 아시아 스타트업 시장에 대한 통찰력을 얻을 수 있었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Crazy Rich Asian) 영화 남자 주인공처럼 싱가포르 올드 머니 가문 중 하나라고... (브리티쉬 엘리트 영어처럼 포쉬하고 예의가 엄청 바르고, 차를 소유하는 것 자체가 돈이 엄청 드는 싱가폴에서 포르쉬를 몰고 다니는걸 보면.... 아마?ㅎㅎㅎ)


너무 고맙게도 해당 일을 하면서, 한국 스타트업들의 유럽 진출을 돕는 분들도 만났는데, 그중 독일 베를린을 중심으로 유럽과 한국 스타트업 생태계를 잇는 역할 123 Factory의 이은서 대표님을 통해 한국 스타트업 생태계와 유럽 진출을 꿈꾸는 한국 기업들의 특징을 이해할 수 있었다.


업계 협력 워크샵 사진. 무단 복사, 배포 금지


아래는 내가 파트너십 매니저로 일하며 베를린 스타트업 생태계에서 느낀 점을 간단히 정리한 글이다. 


이은서 대표님이나 내 시니어 매니저, 디렉터들처럼 오랜 경험을 쌓아온 분들과 비교하면, 나의 경험과 지식은 아직 부족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따라서 이 글은 가벼운 마음으로 재미로 읽어주길 바란다. 또한, 내가 주로 경험했던 분야는 여행(비행기, 운송, 공항 포함)과 모바일 관련 산업이었기 때문에, 이 글에 다소 편향된 시각이 있을 수 있음을 미리 양해 부탁드린다.

 

1. 시장 초점의 뚜렷한 차이


한국과 베를린 스타트업은 각각 다른 시장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한국은 내수 시장에 특화된 미디어, 엔터테인먼트, 그리고 특히 IT 서비스 기반의 전자상거래, 모바일 앱, 게임 등의 B2C 분야가 강세를 보인다. B2B에서는 메디테크, 딥테크 등의 분야가 성장하고 있지만, 여전히 B2C가 압도적으로 강한 편이다.


반면 베를린은 B2B 모델이 더 지배적이며, 베를린 스타트업의 경우 시작부터 유럽 전체 또는 글로벌 시장을 목표로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특히 모빌리티, 친환경 기술, 그리고 SaaS(기업용 소프트웨어) 같은 영역에서 강세를 보이고 있다. 


실제로 우리 회사에서 스핀오프(Spin-off, 분사)한 스쿼크(Squake)는 여행, 모빌리티, 물류 산업을 위한 탄소 배출 계산 및 상쇄 플랫폼을 운영하며, 최근에는 에어비앤비(Airbnb)와의 파트너십까지 성사시켰다. 이 파트너십은 1년 이상의 치열한 협상 끝에 이루어진 성과로, 스타트업이 대기업과 협력하는 과정의 도전과 성취를 잘 보여주는 사례였다. 파트너십이 공식 발표된 날, 사무실은 축제 분위기에 휩싸였다. 비록 스쿼크는 독립했지만 CEO를 비롯한 대부분의 구성원이 같은 회사 출신이었고, 여전히 사무실 공간도 함께 쓰고 있어서, 이들이 독립 후 성공적인 홀로서기를 위해 얼마나 치열하게 노력해왔는지 모두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2. 대기업과 스타트업 협력 모델


대기업과의 협력 시 한국에서는 대기업들이 현대 크래들(Hyundai CRADLE)과 같은 CVC(Corporate Venture Capital)를 통해 직접 투자하거나, 스타트업의 기술을 흡수하는 형태로 협력하는 경우가 많다. CVC는 대기업이 전략적 목표에 맞는 스타트업을 선별해 투자하고, 그 기술이나 서비스를 자사 비즈니스에 통합하여 성과를 극대화하는 데 중점을 둔다. 이 과정에서 협력이 진행되더라도 대기업이 주도권을 갖는 경우가 많으며, 기술 도입 후 인수합병(M&A)으로 이어지는 사례도 흔하다. 이로 인해 스타트업이 대기업 생태계 안에서 종속적인 역할을 맡게 되는 구조가 만들어지기 쉬운 것 같다.


반면, 베를린 스타트업들은 초기부터 글로벌 시장 확장을 염두에 두고 전략을 수립하기 때문에 협력 과정에서도 독립성과 주도성 확보를 중시한다. 위에서 제시한 스쿼크의 예시처럼, 베를린 스타트업과 대기업 간의 협력은 주로 장기적인 공동 개발 또는 전략적 제휴를 통해 이루어진다. 인수합병(M&A)을 통한 소유권 이전보다는, 스타트업의 독립성을 보장한 상태에서 해당 산업 내에서 함께 혁신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협력이 진행된다. 이러한 방식은 스타트업이 대기업의 자원과 네트워크를 활용하면서도 본연의 창의성과 독창성을 유지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한다.


3. 글로벌 시장 진출 전략의 중요성


해외 시장 진출을 준비하는 한국 스타트업들이 보완해야 할 부분도 발견했다. 파트너십 제안 시 현지 시장에 대한 구체적인 전략과 가치 제안이 부족한 경우가 많았다. 보통 20개 팀 중 1개 팀 정도만이 현지화된 제안서를 제출했고, 대부분은 일반적인 회사 소개와 제품 설명에 그쳤다.


특히 비즈니스 미팅에서 영어 의사소통의 어려움으로 기업의 가치를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물론 산업을 뒤집을만한(!) 혁신적인 기술력이 있다면 결국 언어는 큰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스타트업은 치열한 경쟁 속에서 대기업과의 파트너십을 따내야 하는 입장이다. 획기적인 아이디어를 가지고 있더라도, 이를 효과적으로 전달하고 설득하는 능력이 필수적일 것이다. 결국 해외 진출을 염두에 두고 있다면, 서구식(혹 해당 지역의) 비즈니스 문화에 맞는 스토리텔링과 커뮤니케이션 스킬이 파트너십 성사의 중요한 열쇠가 된다고 생각한다.



4. 스타트업 생태계의 지원


베를린의 스타트업의 경우, 유럽연합(EU) 전역을 대상으로 하는 규제 혜택과 자금 지원을 받을 수 있다는 큰 장점이 있다. EU는 단일 시장(Single Market) 체제를 통해 27개 회원국 간의 무역 장벽을 제거하고, 제품 및 서비스의 자유로운 이동을 보장한다. 이러한 표준화된 규제 환경 덕분에 스타트업은 한 국가에서 인증이나 허가를 받으면 EU 전역에서 동일한 조건으로 비즈니스를 운영할 수 있다. 예를 들어, 핀테크 스타트업은 한 번의 금융 규제 허가로 유럽 전역의 금융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으며, 친환경 스타트업은 유럽 내 모든 국가에서 동일한 탄소 배출 규제를 준수하면서 확장을 도모할 수 있다. 또한, 베를린은 Berlin Startup Scholarship이나 Investitionsbank Berlin(IBB) 같은 추가적인 자금 지원과 보조금을 통해 스타트업의 초기 비용을 줄이고, 안정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 준다.


반면 한국의 경우, 대부분의 지원은 공공 주도로 이뤄지며 정부의 스타트업 육성 프로그램(K-Startup)과 정책금융을 통해 초기 지원은 강력한 편이다. 하지만 이러한 지원은 주로 내수 시장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며, 해외 확장에 필요한 네트워크나 자금 지원은 상대적으로 부족하다. 예를 들어, 글로벌 시장 진출을 원하는 스타트업은 해외 투자자를 스스로 발굴하거나, 현지 네트워크를 구축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많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최근에는 베를린과 같은 해외 스타트업 허브 도시에 한국 스타트업의 해외 진출을 돕는 전문 지원 기관이나 컨설팅 업체들이 많이 생겨나고 있다.


5. 창업 생태계의 세대 격차


한국 스타트업 창업자들 중에서는 해당 분야에서 15년 이상의 경력을 가진 40대 이상의 전문가들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이는 많은 관련 종사자들이 공감하는 부분이다. 40대가 훌쩍 넘은 나이에도 안정을 추구하기보다는 과감하게 창업에 도전하는 모습은 분명 높이 평가할 만하다. 그들의 전문성과 경험은 스타트업을 안정적으로 운영하는 데 강점으로 작용한다.


그러나 반대로 20~30대의 젊은 창업자들이 상대적으로 적다는 점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이는 한국 사회에서 실패에 대한 사회적 압박, 재정적 부담, 그리고 제한적인 공공 지원 등의 구조적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로 보인다. 예를 들어, 젊은 세대는 실패를 용인하지 않는 사회 분위기에서 창업 후 발생할 수 있는 재정적 리스크를 크게 우려할 수 밖에 없다. 또한, 안전 지향적인 교육 시스템은 도전 정신보다는 안정된 직업을 선호하는 경향을 강화하며, 창업을 진로 선택지에서 배제하는 경우가 많다. :'(


이와 대조적으로, 베를린과 같은 유럽의 스타트업 허브에서는 젊은 창업자들이 중심에 있다. 베를린의 창업 생태계는 실패를 배움의 과정으로 여기는 문화와 풍부한 초기 자금 지원 프로그램, 그리고 창업을 장려하는 교육 환경이 결합되어 젊은 세대가 창업에 적극적으로 뛰어들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한다.


한국에서도 젊은 창업자들이 더 많이 나타날 수 있도록 사회적 인식 변화와 함께 제도적 지원이 필요할 것이다. 실패에 대한 부담을 덜어주는 정책적 장치, 청년 창업자들을 대상으로 한 초기 자금 지원 확대, 창업을 장려하는 교육 프로그램의 도입 등이 그 해결책이 될 수 있지 않을까? 결국 세대 간 균형이 잘 맞춰진 창업 생태계는 더욱 혁신적이고 지속 가능한 스타트업 문화를 형성할 수 있는 토대가 될 것이다.





전반적으로, 한국과 베를린의 스타트업 생태계는 누가 옳고 그르다거나, 더 낫고 못하다를 논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 각자의 환경과 목표에 따라 뚜렷이 다른 초점과 강점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 글에 담긴 내용은 내 짧은 경험과 관찰에서 나온 주관적인 견해이기 때문에, 이를 하나의 참고 자료로 봐주었으면 좋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개인적으로 언젠가 한국과 유럽의 스타트업 생태계를 연결하는 가교 역할을 하고 싶다는 꿈을 품고 있다. 더 나아가, 나만의 비즈니스를 창업하는 것도 하나의 목표다. 이러한 관점에서, 앞으로도 베를린과 글로벌 스타트업 생태계에 대한 관심은 지속적으로 이어질 것이다. :)




사진 무단 복사 배포 금지

약 7년 전, 한국을 떠나기 전 우연히 접한 책 "Berlin Start-up". 당시엔 단순히 표지가 예뻐서 호기심에 샀을 뿐이었다. 그런데 지금 이렇게 베를린에서 스타트업 업계의 한가운데서, 파트너십 매니저로 일하며 핫한 스타트업 담당자들과 네트워크를 확장하고 있을 줄 누가 알았을까. 인생은 참 재밌다. :D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