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1회 호국문예 백일장 우수상 수상
우리는 생각하지 못했던 곳에서 삶의 중요한 순간과 마주한다.
의도와 염원의 수준과는 상관없이 지금까지 쌓아둔 나의 모습이 시간과 공간의 도움을 받아 아름답게 빛나는 때를 맞게 되고 나는, 내가 생각보다 꽤 괜찮은 사람일 수 있겠다는 설렘에 감사하게 된다.
한 달 전 첫째 아이로 인해 참여했던 '제31회 호국문예 백일장 및 제17회 그림 그리기 대회'가 바로 그런 순간이었다. 아주 어렸을 적, 학교에서 의무적으로 참여하게 했던 백일장 대회를 제외하고 자발적으로 참여하게 된 것은 처음이지 싶었고 대회 당일 주제가 발표가 된다는 점은 흥미로운 요소였다. 무엇보다 아이는 그림 그리기 대회에, 아빠는 백일장 대회에 참여한다는 사실은 가족 모두에게 의미 있는 경험이 아닐 수 없었다.
어제 오전, 결과가 발표되었고 일반부 백일장 부문 우수상을 수상했다. 묘한 기분이었다. 거액의 상금이 주어지는 대회도 아니었고, 수년간 칼을 갈며 기다려 온 것도 아니었는데 나는 스스로에게 '참 잘했다'는 말을 오랜만에 해주었다. 그날의 기억, 현충원의 바람과 햇빛, 묘역에서 들려오던 이름 모를 새소리 모두를 되짚어보며 현장에서 써 내려간 나의 글을 이곳에 남기려 한다.
주제:
백일장
1) 현충원에 안장되어 계신 순국선열과 호국영령 중 한 분이나 현충원의 묘역이나 추모비를 선정하여 감사의 마음과 나라사랑을 다짐하는 마음을 담아 편지를 써 보세요.
2) 현충원에 와서 묘역과 전시관 등을 둘러보며 드는 생각과 느낌을 자유롭게 글로 써 주세요.
제목: 기억의 轉移
등나무 사이로 들어오는 볕에 이내 부끄럽다. 자애롭게 불어오는 오월의 바람은 오래전 잊혀진 이름 모를 누군가의 기억을 싣고 온다. 지나온 기억은 과거가 되고,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잊혀질 수밖에 없었던 조각된 시간일 뿐이다. 그렇기에 生(생)을 누리는 모두에게 허락된 지금은 오래전 그날, 스스로의 생의 가치를 조국의 위태에 헌신하고 떠난 고귀한 영혼들의 마지막 숨결로 말미암아 가능했음을 짐작조차 하기 힘들다.
공간은 기억을 지배하고 기억은 시간을 채운다. 셀 수 없이 많은 문헌과 영상 기록물을 통해 조합된 기억의 단편들은 어떤 이의 눈물이 나의 것이 아님에 안도하기도 했던 철없는 시절의 나를 소환하였다. 잊혀지지 않는 목소리였을 것이다. 멈추지 않는 눈물이었을 것이다. 써 내려가지 않을 수 없는 이야기였을 것이다. 내가 아닌 누군가에게는 변할 수도, 바뀔 수도, 대체된 수도 없는 유일함이었을 것이다. 그 유일함은 지금의 평범한 다수를 위한 자양분이 되었고 우리는 어느덧 그 시간들을 잊고 살게 되었다.
그때의 그들은 무엇에 응답한 것일까
세월의 흐름에 함께 나이 들어간 소나무가 내어주는 한 폭 너비의 그림자로 흡족할 삶을 꿈꾸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루 내 인사하는 새들과 쉬지 않고 그들의 자랑스러움을 알리는 동남풍의 태극기 만을 기대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靈(영)의 召喚(소환)이 가능하다면, 누군가 물어와 주길 바라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렇게라도 기억해주는 이가 있음에 다행스러움을 안고 잠들지도 모르겠다. 차가운 새벽의 이슬도 함께 자리한 이들과 나눌 수 있어 때로는 행복하지는 않을까 생각하다 절로 머리가 숙여진다.
눈을 감고 가늠조차 되지 않는, 70년도 더 지난 시간들을 힘겹게 떠올리다, 종군기자의 소임을 다하며 기록으로 역사를 되살리셨던 외조부의 암실에서 오래전 마주한 사진 몇 장이 떠올랐다. 앙상하게 남은 가지만을 품은 나무에 기대 선 더벅머리의 소년을 담은 흑백의 사진 한 장은 고요하고 참혹했다.
구직의 팻말을 목에 건 고개 숙인 청년은 포화의 역사가 남겨준 교훈이 삶의 필연적 흔적일 이유가 전무함을 알려주고 있었다. 가능한 만큼 웅크린 채로 무언가를 집어먹는 전쟁고아는 잠시 나를 멈춰 세웠다. 모든 것이 재가 되어버린 그곳에서 그가 찾은 것은 삶의 희망이었음을, 그래도 그의 삶은 계속됨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기억은 기록을 통해 전이된다. 그간의 지난 기억은 조금은 다른 의미로 재해석된다. 산 자의 기쁨이 되는 이곳의 무대는 떠난 이가 조국을 위해 반납한 이 생에서의 삶의 대가였다. 우리가 결코 쉽게 포기하지 않을 단 한 가지를 그들이 아낌없이 내어 준 것이다.
우리의 어때 위를 스쳐가는 바람과 다리를 비추는 햇빛은 결코 사소함이 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가 차지하는 이 공간은 당연함이 되어서는 안 된다.
얼을 기리는 것이 생소하다면 구체적 대상이 불특정 다수가 되는 감사함이라도 품고 살아내야 하는 것이 지금의 우리에게 주어진 보편타당한 소명일 것이다.
그리고 기록해야 한다. 쉼 없이 계속해서 써 내려가야 한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전이된 기억을 기록하고 되새기며, 다시 그 기록들을 역사적 유산들을 후세에 전이하는 것이다. 왜곡되지 않은 감정의 진실을 우리가 지나 온 역사에 새로운 숨을 불어넣고 그렇게 또 오랜 세월 우리와 함께 숨 쉬게 될 것이다.
그러니 우리의 땀과 눈물에 고통스러워하지 않기를
이곳에 흐르는 공기와 바람과 물과 온기는 모두 그들의 꺼진 生(생)으로 말미암은 것임을 잊지 않기를.
제한된 시간에 생각을 정리하고, 초안을 쓰고, 원고지에 옮겨 적는 것까지 하려니 시간이 빠듯했다. 200자 원고지 10매 내외의 글이라 부담 없이 생각했던 나의 오만함이 부끄러웠다. 다시 읽어보니 수정하고 싶은 내용들, 수정해야 하는 문장들이 여럿 보인다. 결국 누적된 성실함의 시간들이 결과물로 나온다는 단순한 진리를 새삼 느끼게 된다. 꾸준히 기록해야 하는 이유를 다시 한번 생각해볼 수 있었던 의미 있는 경험, 더불어 수상까지 뿌듯하고 감사하다.
예상하지 못했던 순간에 충실해야 하는 것, 우리에게 주어진 휴식을 삶의 가치와 연결해보고자 하는 시도가 생각보다 중요할 수 있음을 깨달은 순간은 내게 또 다른 선물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