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일하기 싫은 사람입니다 III

by Davca

'나, 이대로 괜찮은가?'



애써 괜찮은 척하며 버텨온 시간들은 순수했고 자유로웠던 나의 영혼과 정체성을 시간의 흐름에 희석시켰기에, 이 질문에 속 시원히 답하기가 쉽지 않다. 애써 정신을 부여잡고 이대로 정말 괜찮은 것인지 진단하기 위해서는 세심하게 점검해야 할 것들이 많을 텐데 도무지 엄두가 나지 않는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어긋난 나의 일과 삶이 원래의 자리를 찾을 수 있을까. 그게 이제와 가능하기는 한 것일까.

단순하게 지금 이곳에서 물리적 거리를 최대한 두려는 노력으로 회복될 수 있고 발견할 수 있는 나의 자아라면 이쯤에서 쉬운 선택 한 번쯤 내려보면 어떨까. 이직이 뭐라고.



어떤 선택이든 지금의 궤도를 이탈하려는 구상은 여전히 설렘보다 두려움이 앞선다. 이 사회의 보편적 잣대는 평범함이라는 평균이 공동체를 이끄는 주된 동력이라 여기고 있으니 절대다수가 속해 있는 이 그룹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무엇을 선택하기 이전에 '용기'가 필요하다.


용기라는 것, 눈앞에 진정한 나의 것이 놓여 있을 때 자연스럽게 장착되는 강인한 감정. 행위에 대한 수학적 계산보다 몸이 먼저 움직이고 그 자체가 나임을 느끼게 해주는 감정.


그렇다면 용기를 낼만 한 '진짜 나의 것'을 찾아내지 못했기 때문은 아닐까. 그래, 지금까지 정신없이 바쁜 나날들 뿐이었고 조직을 위해 헌신했다고 여기는 나 자신이니 그 정도의 짬은 내볼 수 있는 것 아니겠는가. 그런데 충분한 시간을 투자했다고 생각해도 정리가 수월하지 않다. 닿을 수 없는 곳에 있는 것만 같은 나의 이상은 현실세계와 어울리지 않아 보인다. 오랜 시간 지내 온 익숙함과 이질감이 공존하는 이곳에서 이상이라는 것은 섞이지 않을 물과 기름의 조합과도 같다. 그럴수록 이질적인 그 느낌을 나는 강렬하게 소유하고 싶었다. 분리된 감정이야 말로 원래의 나를 지킴과 동시에 불가피하게 종속되어야 할 조직에서의 충실함 또한 견지하고 있음을 알려주는 신호라 여겼다. 나의 정신만은 지속적으로 숨 쉬고 있음을 알려주는 산소호흡기의 수치와 그래프의 흐름처럼 말이다. 그러다 가끔 일이 잘 풀리거나 거래처로부터 좋은 얘기를 듣게 되는 날은 '그냥 이렇게 살아봐도 괜찮겠다.' 싶다. 장시간 간헐적 마취 증세는 나에게 이런 식으로 반복되었으니 기약 없는 나에게로의 여정 대신 현상유지라는 선택이 늘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는 격언을 몇 번만 중얼거리다 보면 어둠이 걷히고 아침은 찾아올 테니, 그 시간만 버텨내면 되는 것이었다. 번번이 부딪히는 나 자신과의 싸움을 지속하며 외부의 압력을 견뎌낼 필요는 잠깐의 어둠이 지나가면 늘 고개를 숙였다. 그렇게 서른을 맞이했고, 마흔이 지나갔으며, 또 다른 시절의 갈림길 앞에 놓여있다.



적당히 타협하여 극과 극 중간 언저리에 있는 분위기에서 경험했던 일은, 이전의 분위기와는 사뭇 다른 사람들과 어우러져 자신의 몫을 감당해야 하는 동일한 굴레의 생리를 목격한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예상과 다르지 않게 시간은 부지런하고 성실하게 흘러갔다. 어제와 오늘은 같은 공간 다른 시간이었지만 외부의 공기는 날이 갈수록 차가웠고 코 끝에 걸리는 바람의 속도는 남달랐다. 설상가상으로 누구도 경험하지 못했던 세계는 모두에게 공평하게 다가갔으며 수용에 대한 선택의 자유만을 남겨두었다. 빠른 변화가 내게 위안이 되었던 유일한 순간은, 스스로의 변화를 갈구하는 원초적 욕구의 확산이 어쩌면 이 시대에서는 자연스러운 것이 될지도 모르겠다는 깨달음이 찾아왔을 때였다. 그즈음, 쫓아가기 버거운 사회 전반과 세대의 변화 가운데 유목민에 가까운 삶의 형태도 충분한 가치를 지닐 수 있다는 이야기는 한 줌의 희망과도 같았다.



코넬 대학교 존슨 경영대학원의 매니징 디렉터 가라카와 야스히로는, '목표를 향해 최단거리로 움직여서 효율적으로 나아가기보다는 내면에서 샘솟는 무언가에 이끌려 인생을 즐기면서 정처 없이 돌아 가니는 '떠돌이 개미'야말로 최첨단 방식으로 일하는 것이다.'라고 했다.(<<조인트 사고>>에서 일부 인용)



어디에도 속하기 어려웠고 다수에게 환영받지 못했던 개인의 잠재력과 창의력이 온 우주에 파장을 가져 올 충분한 가치와 능력이 있다는 사실은 나에게 빛이 된다. 하물며 정처 없이 떠도는 개미의 위상도 높아지는 상황이라면, 그럴듯한 언변으로 무장하지 않아도 생존만 전제된다면 마침내 승리하는 스토리로 나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는 가능성이 커졌다는 것이 아닐까. 내가 진정으로 좋아하고 잘하면서 타인에게 이로운 일이라면 속 터지는 조직의 한 구석에서 눈치를 보며 근근이 살아내지 않더라도 이곳저곳에서 내가 가진 것을 공유하며 경제사회의 일원으로서 충분히 제 역할을 해낼 수 있다는 것이다. 10여 년 전이라도 이런 변화를 예측할 수 있었다면 지금의 나는 조금이라도 달라졌을까? 정답이 의미 없을 질문 뒤로 지금에서라도 영혼이 부르는 길로의 진입은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내일에 대한 예측은 불가능하다는 사실, 사람일 한 치 앞도 모른다는 사실이 내게 건네는 위로는 포기한 가치에 대한 미련이 불요하다는 것이다. 진정한 위로에 다름 아니다. 나에게는 충분히 나아갈 의지와 힘이 있으니 그저 오늘의 의미 있는 실행에 집중하고 몰입해보는 것이다. 꽤 살만한 하루가 된다. 그렇게 감사할 수가 없다. 물론 이 과정에는 다분히 현실적인 조건이 일정 수준, 즉 생계를 유지할 수 있을 만큼의 여유 자금을 보유하고 있는 지의 여부가 중요하다. 30~40대의 가장이라면 가장 먼저 이 지점에서 강한 심리적, 물리적 저항을 경험할 테니. 나 역시도 그러했다. 다만 이를 초월한 '가치 있는 생의 영속'에 대한 고민이 나에게는 더 절실했을 뿐이다. 이대로는 살 수 없다며 꾸역꾸역 억눌러온 개인적 고충이 임계점을 넘어가는 순간 나의 문제는 가족 모두의 문제로 확장되고 가계의 존립 자체가 위협받을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고조될 테니 말이다.






https://brunch.co.kr/@johncoach/173

https://brunch.co.kr/@johncoach/17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