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국수가 슬픈 이유

가족을 지켜요 다른 무엇보다

by Davca

제법 겨울 날씨 구나 생각하다, 12월 말이 되었음에 점차 빨라지는 시간의 흐름을 체감합니다. 이삼십 대와는 다른 속도에, 어떻게 하면 지금이 후회스럽지 않게 살 수 있을까에 대한 생각들도 늘어납니다. 중요한 건 지난 일들보다 '오늘을 사는 것'일 텐데 이 계절이 오면 어김없이 떠오르는 기억이 있습니다.






제 기억으론 아마 중학교에 입학하던 무렵이었던 것 같습니다. 건강이 안 좋으셨던 할머니께선 너무나도 빨리 저희 가족들 곁을 떠나셨고, 그 이후부터 할아버지와 한 집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고전적이셨고 보수적이셨던 할아버지께선 초등학교 입학 전부터 저에게 천자문과 붓글씨를 가르치셨습니다. 이유는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지만, '신문'을 읽어야 세상 돌아가는 것을 알 수 있고, 그 신문을 잘 읽기 위해선 한자에 능통해야 한다 정도의 말씀이 어렴풋하게나마 제 기억에 남아있습니다. 덕분에 살아오면서 '읽는 즐거움' 또한 발견할 수 있었고, 이제는 제 아이들에게 한자를 알려줄 수 있는 나이가 되었습니다.



대부분 철없던 시절의 남자아이들이 그랬듯, 저 역시도 참 말을 안 들었습니다. 공부에 관심이 없었던 것은 둘째 치고, 부모님과 할아버님 마음에 짐이 되고 상처가 되는 일들도 꽤나 했던 것 같아요. 사소한 것부터 굵직한 사고들까지, 일일이 열거하자니 가슴이 답답하고 눈앞이 아득해질 정도입니다.(깊이 반성하며 살고 있습니다.) 다른 것보다, 저는 무심했던 아들이고 손자였습니다. 집안일에 대해서, 일상생활에서 가족의 역할에 대해서, 그리고 저의 본분에 대해서 정말이지 무심했습니다. 깊이 생각하고 헤아리지 않더라도, 손톱만큼의 관심만 있었다면 더 따뜻한 지난날들로 기억될 수 있었을 건데 이제 와서 이 점은 사무치는 아쉬움이 되었습니다.



유독 할아버지께선 칼국수를 좋아하셨습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칼국수보다 손자와 마주 보며 앉아서 하는 식사 그 자체를 좋아하셨던 것 같아요. 어려서부터 저에게 밥을 해주시고, 맛있는 반찬을 직접 만들어주셨던 할아버지의 모습이 지금도 또렷하게 기억납니다. 그때 그 집, 그 공간, 그 온기, 창밖에서 스며들어오던 그때의 햇살. 모든 것들이 포근했던 추억들이었어요. 아마 할아버님에 대한 저의 기억은 '따뜻함'이었나 봅니다.


저는 여느 때처럼 취업준비에 적잖은 스트레스를 받으며 꽤나 예민했던 것 같습니다. 2007년 봄이 오기 전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제 방문을 열고 '칼국수 한 그릇 먹으러 갈래?'라고 물어보신 할아버님께 저는 눈길도 주지 않고, '생각 없습니다'라는 말로 차갑게 대꾸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솔직히 그때 뭔가 중요한 걸 하고 있지도 않았습니다. 그냥 책상에 앉아서 취업의 어려움을 불평하고 또 곱씹고 있었겠지요.

그로부터 1년이 채 지나지 않아 할아버지께서 떠나셨습니다. 생각지도 못했던 빠른 이별은, 더더욱 큰 아픔과 후회를 남겼습니다. 한동안 저는 칼국수를 먹지 못했어요. 근 10년 정도 그랬습니다. 지나가다 '칼국수' 간판을 보거나 얘기만 들어도 눈을 돌리고 피할 정도였으니 이십 대 후반 나이에 '가족'과 '효도'에 대해 꽤나 진중하게 받아들이기 시작했던 것 같습니다. 많이 늦었죠. 제가 그랬습니다. 늘 한 템포씩 느렸어요.


아, 할아버님께서 돌아가시던 그 해. 돌아가시고 6개월이 채 되지 않아 저는 은행원으로 사회생활을 해나가기 시작했습니다. 합격의 기쁨 이면엔 묵직한 슬픔이 있었습니다. 뭐가 그렇게 급하셔서, 그렇게 이뻐하셨던 손자가 취업하는 것도 못 보고 가셨을까. 죄인의 심정이었습니다. 수만 번 가슴을 내리쳐도 할아버지와 마주 앉아 칼국수를 먹을 수 없다는 현실을 한동안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시간을 흘러갔어요.





벌써 15년이 다 되어 갑니다. 다행히 지금은 아내와 둘이 앉아 칼국수를 먹으며, 저의 이런 지난 얘기들을 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습니다. 저에게 칼국수는 그런 의미가 된 것 같아요. 가족의 의미와 그 안에서의 내 역할,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 매 순간 잊지 않고 놓치지 않아야 하는 것, 다른 무엇보다 '나의 가족'을 지켜야 한다는 것.

꽤나 쌀쌀한 바람이 부는 날엔 어김없이 할아버지가 생각납니다. 너무나도 선명한 그 웃음소리와 목소리가 사무치게 그립습니다. 두 번 다시 볼 수 없겠지만, 그때 우리 할아버지의 사랑과 마음은 여전히 저에게 살아 숨 쉰다고 믿고 있습니다. 칼국수가 떠오를 때면, 지금 어딘가에서 나를 지켜보고 계시겠구나 생각하고 있어요. 늦었지만 지금에라도, 너무 죄송했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리고 너무 보고 싶다고.



오늘 점심은 메뉴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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