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kg, 2,500㎡에 해당하는 작은 뇌에 우리는 스스로를 가둔다.
과거와 미래를 오가며 현재 존재하는 나를 잊고 온갖 후회와 두려움에 쌓여있다. 일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잠자는 시간을 제외한 나머지 시간 가운데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곳이 우리의 직장이고 그곳은 좋든 싫든 내가 선택한 일을 하는 곳이다. 잠깐의 나를 돌볼 겨를 없이 8시간에서 10시간 혹은 그 이상을 성과에 대한 압박, 미래에 대한 우려, 벗어나고 싶은 지금이 주는 스트레스를 고스란히 받아낸다. 조금만 머리가 가벼워진다면, 잠시나마 이런 생각들을 멈출 수 있다면 왠지 나의 일은 더 잘 풀릴 것 같고, 이 일만 아니라면 내 삶은 최고의 기분을 누릴 수 있는 곳으로 향할 수 있을 것이란 자신감도 생긴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멋모르고 퇴사한 이후 삶은 더 진창으로 흘러가기도 하고, 구관이 명관이라는 말과 함께 깊은 한숨을 담배연기에 섞어 보내기도 한다. 대체 그 이유는 무엇인가. 지옥 같던 생활과 그 환경만 벗어나면 나의 문제가 해결되어야 맞을 텐데 나는 왜 여전히 혹은 이전보다 더 답답하기만 한 하루를 살고 있는 것이며 게다가 다시 돌아갈 여지가 없는지 기웃거리게 되는 것인가. 그런 나 자신을 보게 되었을 때 밀려드는 한심함은 이전 퇴사에서도 느꼈던 감정의 데자뷔와도 같다. 자신감은 지구의 핵까지 추락한다. 내가 뭘 할 수 있을까.
자, 조용히 눈을 감아보자
내 삶의 일대기가 10년을 기준으로 마디가 생긴 일직선이라고 생각하고 지난 시간, 앞으로 있을 시간의 정가운데에 나를 위치시키자. 눈을 감은 상태에서 나의 머리는 이미 검은 선 하나를 그었을 것이다. 10, 20, 30, 40... 그래 120세 시대이지만 겸허한 마음으로 90까지만 마디를 만들어보자. 마흔 중반에 다다른 지금의 난 '삶의 직선' 한가운데에 서있다. 지금 내가 있는 이곳을 제외한 앞뒤의 모든 마디를 잘라낸다. 내가 보는 곳, 나의 시선이 머무는 곳은 오직 지금 여기뿐이다. 내가 할 수 있는 것도 오늘, 지금, 여기에서만 가능하다. 후회로 가득한 어제로 돌아갈 수도 없고 예측할 수 없는 내일을 미리 살아볼 수도 없다. 내가 있어야 할 곳도 여기고, 있을 수 있는 유일한 곳도 지금 여기다. 여기까지 어려움 없이 도달했다면 다음 단계로 넘어가 보자.
1. 산 중턱 그리고 정상에서 내려다보기
일과 개인의 삶 그리고 가정에서 내가 있는 위치를 객관적인 시각으로 조망해 본다. 나는 지금 어떤 상황에 처해있는가, 나의 커리어는 어디를 향해 가고 있고 직장에서의 내 생활은 어떤 모습인가. 가정에서 난 어떤 남편이며 가장인가. 아빠로서 해야 하는 것들을 잘 해내고 있는가. 진심으로 아내와 아이들을 아끼고 사랑하며 그에 맞게 행동하고 있는가.
이에 대한 답변을 관조적인 시각으로 할 수 있다면 이미 나라는 산의 정상에 서있다고 볼 수 있다. 명쾌하게 이뤄지지 않는다면 여전히 중턱 언저리일 텐데 괜찮다. 어차피 이 작업은 매일을 반복하고 쌓아가는 과정의 어느 끝자락에 경험할 수 있을 것이고 오히려 그런 시간을 겪어냈다는 것이 후에 도움이 많이 되었다고 느낄 것이다. 내가 드론이 되어 나를 아주 잘 내려다볼 수 있는 위치까지 떠오른다고 생각하면 훨씬 수월해진다.
2. 감정이 내리는 정의와 해석이 아닌, 객관적으로 정리해 보기
환경이 내게 주는 무언의 메시지를 해석하는 것은 나 자신이다. 감정 또한 마찬가지다. 부정적이고 어두운 생각이 감돌 때 '내가 느끼는' 이것이 무엇인지를 냉정하게 파악할 수 있어야 실체 없는 오해의 소용돌이에 휩쓸리지 않을 수 있다. 나만의 비즈니스를 하고 있든, 조직에 속해있든, 리더이든, 팀원이든 마찬가지다. 내가 정의 내리는 것에 따라 같은 상황에 있는 사람들은 제각기 그 상황을 각자의 언어로, 매우 다르게 받아들이다. 이를 수월하게 해내기 위해서는 알아차릴 수 있어야 한다. 현재 느끼는 감정에 근거하여 상황을 해석하고자 한다면 객관성을 잃는다. 또한 감정의 파도 안에 머무른다면 난 점점 가라앉을 것이다. 두려움에 갇혀 무용한 시간을 보내고 있음을 후회하면서도 아무것도 할 수 없던 순간들은, 대게 나라는 존재를 제대로 알아차리지 못하고 지금 느끼는 감정 자체가 나라고 생각하는 습관 때문이었다. '나'와 '객관성'이 모순된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감정을 느끼는 '행위자'로서의 나와 그런 행위자를 바라보는 '관찰자'로서의 나를 분리하기 시작하면 모순은 해결된다.
3. 행위하는 나를 움직일 수 있는 진정한 나는 관찰자임을 기억하기
어떤 감정을 느끼는 존재는 특정 행위를 할 수 있고 느낄 수 있고 반응할 수 있는 존재로서의 나이다. 관찰하는 존재로서의 나는 행위자보다 무한한 능력을 갖고 있다. 관찰자는 원하는 대로 방향을 틀 수도 있고, 감정의 해석을 언제든 바꿔버릴 수도 있다. 행위자가 갇혀 있는 특정 순간에도 관찰자는 여유롭다. 내가 어떤 소설을 읽고 있으면서 주인공에 감정 이입이 되는 순간 우리는 슬픔을 느끼고 기쁨을 경험한다. 새로운 국면이 펼쳐질 때의 흥분은 마치 내가 소설 속으로 빨려 들어간 것만 같은 감정을 선사하고 결말에 다다르는 어느 시점엔가 줌아웃(zoom out)되면서 관찰자로서의 독자로 돌아온다. 그리고 평가한다. 읽는 내내 수많은 감정의 파도를 만났지만 결국 나의 경험들과 직관 그리고 나다운 표현으로 소설의 평이 마무리된다. 단편적인 감정 자체는 서평으로 남지 않는다. 일부를 구성하더라도 전반적인 해석의 결과물이 기록된다.
행위자로서의 나는 인생이라는 소설의 주인공이다. 진정한 나는 관찰자가 된다. 감정에 붙들리지 않은 관찰자로서의 내가 인생을 해석해 나가는 것이다. 그렇다면 관찰자로서의 나는 매일 어떤 하루를 보내고 어떤 해석을 하고 싶을까. 내가 관찰자라면 충분히 의도해 볼 여지가 있지 않나. 심지어 우리의 삶은 소설보다 더 소설 같은 자신의 고유한 이야기가 아니던가. 나는 좀 더 따뜻하고 평안하며 사랑이 가득한 삶으로 해석하고 싶다. 그렇다면 관찰자인 나는 행위자인 나를 어떻게 움직여볼 수 있을까.
4. 고통은 그저 흘려보내고 맞서지 않기
부정적 감정은 부정적 결과만을 갖고 온다. 어렸을 때부터 들어온 콩 심은 데 콩 나는 이치와 같은 것이다. 몸에 좋은 음식을 넣어야 건강해진다. 하루 1시간을 운동에 쓰고 땀을 흘려야 안 좋은 것들이 배출되고 건강한 몸을 유지할 수 있다. 사랑과 용서의 언어로 치유라는 것을 할 수 있다. 원망과 증오와 살의는 치유의 결과를 얻을 수 없다. 스스로 정의하는 치유가 잔인한 복수가 아닌, 보편적인 것이라면 말이다. 시간은 걸리겠지만 원망과 증오도 흘려보내려는 의도를 통해 지나갈 수 있다. 각자의 상황과 이야기의 농도에 따라 차이가 클 수는 있겠으나 결국 이 또한 지나간다.
어느 순간 내가 느끼는 고통들로, 그 크기에 압도되어 숨을 쉴 수 조차 없다고 느낀다면 '이것은 진정한 나의 것이 아니다'라고 생각할 필요가 있다. 그럴 때마다 그 감정이 버스와도 같다고 생각해 본다. 아주 잠깐 머무르긴 하지만 곧 떠날 수밖에 없는 버스라고 말이다. 나는 이번 정류장에서 내렸고 버스는 떠났다.
고통은 지나갔다. 잔상이 있고 후유증이 있을 수도 있다. 그 또한 나의 것이 아니라고 여긴다. 눈을 감고 들숨에 긍정의 감정이라는 새로운 버스가 오고 있음을 떠올리고, 날숨에 내게서 멀어져만 가는 부정적 감정의 버스를 떠올려본다. 고통은 그저 지나가는 것이다. 흘려보내고 맞서지 않는다. 어두운 감정에 체류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부정적 감정의 소용돌이 한가운데로 들어가는 셈이다. 부정적 에너지의 자기장은 나의 모든 것들을 잠식해 버릴 만큼 강하다. 가까이 가지 않고 피하는 것이 나를 위해 현명한 선택이다. 아주 잠시 머무르긴 했지만 곧 떠나버린 버스라고 생각하고 그 뒤에서 손 흔들지 말아야 한다.
명상이 비즈니스 성공의 유일한 정답이 될 수는 없다.
어떤 경우는 머릿속이 더욱 복잡해질지도 모를 일이며, 오히려 이러한 시도가 시간만 잡아먹었다는 강한 심리적 저항에 부딪힐 수도 있다. 그러나 명상을 통해 반복하는 호흡을 통해 내가 누구인지를 알아차리고, 진정한 나는 관찰자로서 존재하며 감정에 휘둘리고 괴로워하는 나는 진정한 내가 아님을 깨달을 수 있다. 이것을 비즈니스의 성공에 접목시키는 무기를 갖추면 되는 것이다.
내가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이제는 솔직해질 수 있다. 일로서 내가 얻고자 하는 것, 나의 목표를 타인의 그것과 비교하는 것이 아닌 오직 '내가 주인이 되는' 순수함에 집중할 수 있다. 설령 그것이 누군가는 보잘것없다 폄하해도 그런 타인의 감정에 휘둘릴 필요도 없고 그 감정 따위가 나를 흔들 수 없을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명상은 나의 존재를 알아차리게 한다. 그렇게 관찰한 내가 지금의 비즈니스에서 성취하고자 하는 것을 변함없이 원하고 있는 것이 맞는지, 전심을 다해 달려 나가는데, 내 몸의 감각에서 이를 거부하던 때를 경험한 적은 없었는지 살펴보자. 이를 언제든 편하게 수행할 수 있다면 이미 명상은 내 삶의 무기가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