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산본-(1)

아픔을 치유하기 위해 아픔을 들여다보다

by Davca

무턱대고 덮어두는 것만이 답은 아니다.


그때의 상황과 사람, 감정에서의 도피는 근본적인 문제의 해결책이 되지 못했다. 그러나 도망쳤던 경험은 습관이 되었고. 이제와 어른이 된 척 그때의 일들을 용서하고 없던 일이 되길 바라는 것은 아니나 지난 시간들 가운데 내가 가장 후회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따라가다 보니 2015년, 산본에서의 일이 떠올랐다.




언젠가 그런 시도를 할지도 모르겠지만 원래 이때의 생각을 하게 된 것은, 소설로 써볼 법한 주제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 덕분이었다. 그리고 만약에라도 세상의 빛을 보게 되는 순간이 나의 글에게도 찾아와 준다면, 그것으로 나의 상처가 치유될지도 모르겠다는 기대감도 있었다. 그리고 역시나 비슷한 경험 혹은 상처로 남은 기억을 가지고 사는 누군가에게는 작은 위로와 공감이 될 수도 있을 테니 그것으로도 쓰는 의미는 차고 넘쳤다. 어디에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소설 쓰기를 배운 적 없는 나로선 쉽지 않은 시도가 될 터였다.



우선 조금 더 그때의 일들을 하나둘 들여다봐야 했다.

그리고 왜곡된 기억의 일들은, 개인적인 상처의 영역에선 지워버리고, 글의 영역에선 생생하게 되살리는 작업이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서 난, 아프더라도 객관적인 관찰자가 되어야 했다. 상처를 받은 이는 어차피 의식이 있는 내가 아닌, 행위자로서의 또 다른 나이기에 그것을 분리해서 보아야 객관적 묘사와 섬세한 극화가 가능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10년 전, 은행원 시절의 나의 모습으로 되돌아갈 필요가 있었다. 일을 하고 있는 육체를 가진 대상으로서의 나와 관찰하는 '의식의 나'가 함께 돌아가는 것이 말이다.






아마도 그는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술에 취한 혀로 도려내던 나의 마음을 말이다. 그것도 지점 직원들과의 회식자리에서.

그때 그 호프집 특유의 기름냄새, 비 온 뒤의 습기를 머금은 적산목의 퀴퀴함이 그 공간에 가득했다. 몇 마디에 고개를 숙인 날 보고, 내 옆에 앉은 차장님이 내 오른 손목을 잡아주었다.



내가 너 첨 봤을 때부터 맘에 안 들었어 새끼야




말이 안 되는 얘기도 상사가 하면 말이 되는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철없는 중고등학생들의 기싸움도 아니고, 처음 봤을 때부터 마음에 안 들다니 저게 지금 세 자녀를 키우는 아빠 입에서 나올 수 있는 말인가. 나 역시도 누군가의,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새끼일 것인데.


그의 주사는 기가 막혔고, 편리했다.


다음 날이 되면, 늘 다른 사람이 되었으니.

체육대회에서 여직원과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어도, 그는 은행을 잘 다녔다. 당시의 상황은 지금과는 사뭇 달랐기에 이런 이슈들은 뒤에서 쉬쉬하는 분위기였다. 이러저러한 문제들이 많았던 그는, 나의 팀장이었고 부지점장이었다. 대리였던 난, 그저 위치만으로도 어려웠던 사람인데 이제 불편한 사람이 되어버린 것이다.


언젠가부터 출근하는 것이 괴로웠다.

기업창구의 특성상 회식도 많았고, 그는 잘 마시는 편은 아니었으나 술자리를 즐기는 듯 보였다. 오늘은 별일 없겠지, 하고 바라며 피하고 싶은 회식자리에선 매번 욕설이 난무했다. 그리고 다음 날은, 수줍고도 비열한 팀장이 되어있었다. 어느 순간부터는 나를 바라보며 기분 나쁜 한숨을 내뱉기 시작했다. 도무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마흔 중반이 되어 한 기업의 임원을 한 관점에서 당시의 나를 보더라도, 나는 일을 잘하는 행원이었다. 게다가 열심이었다. 매일 7시 이전에 출근해서 빠르면 밤 10시에 퇴근하는 삶을 10년 가까이 살았다. 실적도 물론 좋았다. 아이러니하게 2015년, 최우수행원으로 선정되어 해외은행 벤치마킹 출장도 다녀왔다.


아, 그것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발령 난 지 얼마안 된 상황에서 최우수행원에 선정된 팀의 대리가 있으면, 뿌듯하지 않을까? 수백 번을 더 생각해 봐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팀과 지점의 실적이 최고를 유지하기 위해 어느 팀보다도 단합이 중요했고 필요했다.



이때부터 아침 7시부터 밤 10시까지 이어지는 '원인 모를 갈굼'이 10개월간 지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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