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든 'PAUSE'가 필요했던 순간
18년간의 커리어를 정리하며 이제와는 다른 삶을 준비하고 설계하는 시간을 가지겠다고 결정한 지 6개월이 지났다.
그냥 '놀고 싶어서'가 아니냐는 절대 T 아내의 말에 발끈했다.
6개월이 지난 시점에서 보면 틀린 말은 아닐 수도 있겠다 싶었다. 이전보다 더 치열한 삶을 위한 퇴사는 아니었으니 말이다. 그렇다고 유흥을 위한 시간이 아님을 아내도 알 것인데, 보기에 좋지 아니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여러모로 귀찮은 설명들이 필요할 테니 말이다. 당장 아이들, 부모님, 주위에서 마주치는 친한 학부형들까지 꽤 귀찮은 일들이 생기지 않겠는가.
쉬는 동안 이전과는 다른 커리어 제안을 받기도 했다. 조직 컨설팅을 의뢰해 주시는 대표님들도 있었고, 단기 프로젝트로 함께 일해보자는 흥미로운 제안도 있었다. 나는 모두 거절했다. 앞날에 대한 자신감, 스스로에 대한 신뢰가 충만해서는 결코 아니었다. 다만 지난 커리어들을 스스로 정리하고 복기할 시간이 필요했다. 월화수목금토일, 주 7일을 일해온 삶이었다. 돈을 얻고 머리숱을 잃었다. 젊음을 쏟아부었고 술도 쏟아부었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온 내 일들의 텃밭이었다. 매 순간을 소중히 여기고 가꾸지는 못했으나, 진심이었고 충실했다. 그래서 이제 냉정하게 그 시간들을 정리하고 기록할 시간이라 판단했다. 다음 스텝을 결정할 수 없었던 이유이기도 했다.
애초에 6~7개월 정도를 염두에 두었으나, 막상 6개월이 지나고 나니 두려움이 커진다.
이렇게 가다 보면, 그 끝이 무엇일까.
마흔 중반의 외벌이 가장이 무슨 패기로 직장을 그만두고 그간의 커리어를 정리한단 말인가. 그리고 그것을 왜 꼭 지금 해야 하는가. 한창의 업적을 쌓아가야 할 시기에 말이다. 그래, 그것도 맞다. 그래서 난 몇 가지 선택들을 했다. 현금성 자산을 늘리고 시간을 확보하고 나의 커리어와 삶을 조금만 더 가꿔보자고 말이다.
생각보다 '가꾸는' 일은 만만치 않았다. 스스로와의 규칙을 만들어야 했고, 지켜야 했고, 나태함에 빠지지 말아야 했으며, 시간과 돈 모두를 아끼는 태세로 전환해야 했다. 여기에는 나 혼자만의 인생이 있지 않았고 아내와 두 아이가 있었다.
아내와의 시간, 두 아이들과의 시간 그리고 우리 가족.
갭이어라는 명분은 어쩌면 가족과 함께 보내는 시간을 갈구했던 가장의 핑계였을지도 모른다. 어떻게 흘러갈지 모르는 앞으로의 일들에도 불구하고 용기를 내어 더 가치 있는 시간을 만들어가고 있는 나의 선택을 칭찬한다. 결정적인 순간에 직감적인 판단은 내게 힘든 시간을 안겨주었지만, 훗날 후회하지 않는 삶을 살게 해 주었다.
그리고 알게 되었다.
회사 생활이 길어질수록 나의 갇힌 사고는 굳은살이 되어갔다는 것, 새로운 도전과 창의적인 생각대신 안전과 안정을 생각하고 그어진 선 밖으로 나가길 두려워했다는 것, 그렇게 좋은 기회와 감사한 인연들을 놓쳤다는 것. 내 눈에 씌워진 색안경으로 숨은 의도를 걱정하고 시간을 흘러보내며 정작 나는 장막뒤에 숨어 있었다는 것을.
명분이든, 핑계든 잠시 멈춘 지금의 시간이 감사하다. 또 한 번 새로운 내가 몇 년 후면 다가올 50을 일찌감치 준비할 수 있다는 것은 나로서 행운이다. 결정적인 순간마다 좋은 운이 작용했음을 알기에, 이제 이 좋은 운들을 잘 나눌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해봐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