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같은 통증이 몇 가지가 복합적으로 24시간 내내 찾아온다고 한다. 하루에도 몇 번씩 30분~1시간 통증이 지속된다고. 모르핀 같은 마약성 진통제가 아니면 하루하루 견디기 힘들다고 한다.
이 환자는 내가 알고 있는 사람이 아니다. 어제 이분이 내 블로그에 방문해서 알게 되었다. CRPS라는 병이 있다는 것과 그것이 어떤 병인지도 어제 처음 알았다.
꽃다운 나이에 난치병에 갇혀있는 그녀, 참으로 가슴 찢어지는 슬픔이 남의 일 같지가 않다. 나 역시 그녀와 비슷한 또래, 20대 후반의 딸이 있기 때문이다.
만일 내 딸도 그녀와 같은 난치병 환자라면 상상만 해도 견디기 힘들 것 같다. 현대의학으로도 치료약이 없고 대신 아파해 줄 수도 없는 노릇이니, 직접 겪는 본인의 고통은 말할 나위 없을 것이다.
행복의 궁극적인 가치는 기쁨보다는 고통 없는 삶에 있다.
인간도 생물학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육체적인 고통이 없는 것이 최우선 가치다. 고통을 느끼면서 기쁘고, 고통을 느끼면서 행복하다는 것이 있다면 얼토당토않은 말장난에 불과한 것이다.
만일 CRPS라는 병을 앓는 대신에 1조 원이라는 돈을 준다면 선택할 수 있을까? 평생 통증을 느끼며 살아가야 한다면 1조 원이라는 돈도 결코 기쁨이 될 수 없다.
어제 그녀를 떠올리면서 성경에 나오는 “욥기”가 생각났다.
나는 무신론자 무종교지만, 그리스로마신화처럼 성경을 하나의 교양서적으로 공부한 적은 있다. 일반상식 수준의 신학적 지식은 있는 편이다.
욥기는 성경에서 문학적 가치가 가장 높은 챕터에 속한다. 욥은 “선하고 의로운 사람”이었으나 하나님의 시험으로, 그녀가 적어 놓은 CRPS 통증과 버금갈 정도의 고통을 겪는다.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 종기가 생겨 매일같이 깨진 사기로 긁지 않으면 안 되었던 육체적 고통, 그것이 얼마나 괴로웠던지 “내가 태어났을 때 왜 죽은 채로 태어나지 않았을까?” 욥은 한탄했다.
그는 또 “나의 괴로움과 파멸을 저울 위에 모두 놓을 수 있다면 바다의 모래보다 무거울 것”이라고 고통의 깊이를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좌절하지 않았고 끝내는 건강과 재산 모두를 되찾는 것으로 결말을 맺는다. 신학자들 해석과 달리 나는 좌절하지 않은 욥의 “신념”이 결국 하느님까지 굴복시킨 것으로 본다.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말도 욥을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아무리 성인군자라도 직접 겪지 않은 이상, 고통에 빠진 사람에게 던지는 그 어떤 위로의 말도 위안이 되지 못한다. “깊은 고통이 없으면 구원은 없다”는 말도 있지만, 이 또한 CRPS 환자에게는 부질없는 말이다. 차라리 구원이 없어도 좋으니 통증이 없었으면 좋겠다는 갈망이 더 클 것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나 역시 그녀에게 어떤 위로의 말을 건네고 싶어도 마음만 있을 뿐이다. 그냥 감정적으로 같은 슬픔을 느끼는 것 외에 무슨 방법이 있을까?
어제 산책하다 보니 개나리 꽃망울이 부풀어 있었다.
조만간 거리마다 노란색 물결이 바람에 나부낄 것이다. “집으로 가는 길(Going home)” 영화에서도 불행으로 헤어졌던 사랑이 다시 만나던 날, 참나무에 노란 손수건이 바람에 나부꼈다.
불행이 느닷없이 찾아오듯, “불행 끝 행복 시작”도 느닷없이 찾아올지 모른다. 운명이나 우연은 아무도 알 수 없기에 욥처럼 신념을 끝까지 놓지 않는 편이 이길 확률이 높다.
20대 여자라면 욕심이 아니더라도 아름다워지기 위한 본능이 분출되기 마련이다.
특별한 날이 아니더라도 갈색 웨이브 파마를 하고 립글로스를 칠하고 핑크빛 펄을 바르고 싶지 않을까?
여름이면 푸른색 아이라인에 상큼한 탱크탑 차림을 한 도전적인 자신의 모습을 보고 싶지 않을까?
거품이 부서지는 파도를 거닐며 수평선을 향해 괴성을 지르는, 가슴 터지는 20대 자신의 모습을 그리고 싶지 않을까?
석양이 지는 아름다운 노천카페에서 연인과 커피를 마시며 유쾌한 잡담을 나누는 배우들처럼, 자기도 한 번쯤 그런 인생을 살고 싶기도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