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자언어 알파벳은 플러스․ 마이너스 두 개의 철자를 가진 이온이다. 이온은 자석처럼 다른 분자들을 끌어당기거나 밀어낸다.
이온이 모이게 되면 어찌 되었든 붙거나 떨어지거나 둘 중 하나다. 붙거나 떨어지는 그 자체가 분자들의 의사소통이다. 결합구조가 맞는 이온끼리 규합하면서 분자들은 점차 그룹을 이루고 덩어리가 된다.
덩치가 클수록 외부 환경 변화에 유리하다. 유해물질에 노출되었을 때 바깥쪽은 손상되어도 안쪽은 보호될 수 있다. 덩치가 작으면 상대편에 흡수되거나 파괴되기 쉽다. 때문에 덩치가 클수록 생존에 유리하다.
진화과정을 분자크기로 본다면, 저분자-고분자-유닛-그룹(집단)-연합체-단세포-다세포...로 진행된다고 볼 수 있다. 단계가 높아질수록 분자들의 의사소통은 증가하고 문법체계도 높아진다.
- 분자 공동체 -
분자군집은 생존을 위해 기능이 분화될 필요가 있었다.
그냥 모여있는 것보다는 분자의 화학성질에 따라 유해물질에 강한 쪽은 바깥에, 약한 쪽은 안쪽에 위치하는 편이 환경대처에 유리하다. 분자간의 역할분담인 셈이다.
이러한 기능분화는 다른 군집과의 경쟁을 위해서도 필수 불가결한 요소다. 같은 덩치더라도 효율적인 분자배치는 조직의 생존확률을 높여 준다.
집단의 크기가 클수록 생존에 유리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덩치가 무한정 커질 수는 없다. 때문에 분자유닛이나 작은 그룹들이 떨어져 나갔다. 대가족에서 세대가 분리해 나가는 식이다. 그렇게 떨어져 나간 분자유닛들이 촌락을 이루었다. 한 울타리 안에 분자 마을이 생긴 것이다.
- 공동체 분업 -
시간이 지나면서 분자유닛마다 고유한 기능이나 성질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외부 자극(재난)에 대응하는 전문가 집단이 나타났다. 반복되는 스트레스에 내성이 생긴 것이다. 마치 세균이 항생제에 내성을 갖는 것과 비슷한 현상이다.
산성에 강한 유닛, 알칼리에 강한 유닛, 융점이 높거나 낮은 유닛, 특정 화합물을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유닛... 등등 저마다 특별한 기술을 가진 물질들이 공동체에 포진하게 되었다. 즉 마을에 보안관, 소방서, 대장간, 물류창고 등이 생긴 격이다.
분자 공동체는 이들 유닛의 특성을 적절하게 배치하여 공동체 발전을 도모했다. 외부의 적이나 환경위험에 대비하기 위해 울타리(껍질)가 강화되고 여러 기능이 생기면서 분자 공동체의 안전성이 높아졌다.
- 아날로그 문명 -
공동체 지식이 축적되면서 마침내 고도로 발달된 문법체계를 갖춘 분자유닛이 나타났다. 바로 RNA이다.
분자문명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유닛은 지구가 수억 년의 제작기간을 들여 만든 첨단 물질이다. 이제는 두 개의 알파벳(이온)으로 의사소통하던 시대는 지났다. 분자 단위(AUGC)가 알파벳이 되었다.
고급 언어를 사용하면서 분자문명이 구전시대에서 기록시대로 넘어왔다. 고분자들은 그냥 덩어리가 아니라 텍스트 성질을 가지게 되었다. “텍스트”는 곧 지식이다. 노동기반 생산이 지식기반 생산으로 변화된 것이다.
분자유닛이 고장이 났을 때, 기존에는 필요한 부품을 외부에서 포획하거나 찾아야만 했다. 이제는 사냥할 필요가 없어졌다. RNA 텍스트에 있는 정보를 이용해서 무슨 부품이 필요한지 금방 알아낼 수 있었다.
따라서 내부에 있는 자원을 활용해 인프라를 보수하거나 유닛을 수리할 수 있다. 물질을 생산하는 공장이 전부 RNA두뇌들로 바뀌었다.
RNA 집단은 분자공동체의 도서관이자 수선공장이기도 했다. RNA 정보는 후대로 계속 전해지고, 다른 자원을 정복할 때마다 새로운 분자들이 유입되어 지식이 축적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러나 RNA 텍스트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다. 화학충격에 약해서 부서지거나 고장이 잘났다. 질서 정연했던 알파벳들이 마구 뒤섞여 버리는 일이 잦았던 것이다. 이것에 문제가 발생되면 공동체 전체가 불구가 되기 십상이었다.
- 디지털 문명 -
외부의 위협적인 환경은 끊임없이 반복되었다.
외부환경에 대응하는 방법은 두 가지뿐이다. 도태되거나 아니면 내성을 갖도록 진화하거나. 많은 RNA들이 도태되었지만 살아남은 것도 있었다.
마침내 강한 내성을 가진 진화된 형태의 분자유닛이 나타났다. 바로 DNA다. 이것은 오늘날 화석에서도 추출이 가능할 정도로 화학적으로 안정적이고 내구성이 높다. 이것은 RNA 두 개가 짝으로 겹쳐져 텍스트 보호막을 만든 것이다.
이때부터 지식정보가 외부 환경에 휘둘리는 경우가 적어졌다. DNA 조각들이 쌓이면서 차츰 칩으로 정형화되어 갔다. 공동체 내의 인프라 정보가 전보다 안정적으로 칩 속에 축적되었다.
DNA가 생기면서 분자유닛 수리가 빠르고 수월해졌다.
고장이 난 유닛 수리를 위해 필요한 부품을 일일이 찾아야만 했던 RNA 작업방식이 디지털로 바뀌었다. 찾는 것이 아니라 만드는 것이다. 필요한 부품은 알고리즘을 작동시켜 즉석에서 만들 수 있게 되었다.
공간적, 시간적 제약을 뛰어넘는 생산혁명이 일어난 것이다. 인류의 산업혁명과 비견될 수 있다.
그러나 에너지가 발목을 잡았다. 화학반응에서 얻어지는 에너지만으로는 복잡해진 분자사회 에너지를 충당하기 어려웠다. 때문에 한동안 분자문명 발전은 정체되었다.
그러던 중 뜻하지 않은 자원을 획득하게 되었다. 미토콘드리아다. 건축 재료로 쓸 요량으로 포획한 이 유기체는 분해되지 않았다. 소화되지 않은 채 노숙자처럼 분자 도시를 어슬렁거리며 기생했다.
미토콘드리아는 분자도시 식량을 축내기는 했지만 특이한 능력이 있었다. 자신이 먹은 것보다 더 많은 화학에너지를 배설해 냈다. 같은 양의 원료를 투입했을 때 기존보다 10배나 많은 에너지를 생산해 냈던 것이다. 이것은 인류가 석유를 발견한 것이나 마찬가지 사건이다.
이때부터 미토콘드리아는 노숙자가 아니라 당당한 분자도시 일원으로 역할을 수행했다. 에너지혁명이 일어난 것이다.
기술이 고도화되면서 촌락에서 출발했던 공동체는 생산도시로, 그것이 정보 도시로 빠르게 변화되어 갔다.
수많은 분자유닛마다 제각기 성질이 다르고 기능이 달라 분자도시의 질서와 기능 유지를 위한 법체계가 필요했다. DNA가 그 역할을 했다. 고장이 난 유닛을 폐기할 것인가? 재생할 것인가? 조직에 불필요한 것은 제거하고, 필요한 것만 선택하는 방법으로 도시체계를 정립하고 발전시켜 나갔다.
DNA는 중앙행정 관청이자 분자유닛들의 활동 매뉴얼이 되었다. 매뉴얼에 따라 분자유닛들은 저마다의 가지고 있던 지식을 기반으로 전문화된 역할을 수행했다. 도시 인프라도 확대되었다. 정보전달 메신저(RNA)나 물질 수송을 위한 도로(소포체)와 물류기지(골지체), 생산기지(리보솜) 등이 확충되었다.
- 무역과 국방외교 -
인접한 다른 분자도시와의 무역과 외교도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물질을 교환하거나 협력하는 국제관계가 형성되었다. 핵산이나 효소 같은 첨단 물질을 확보하기 위한 경쟁이 치열해졌다. 국제사회는 협력과 경쟁이 공존하는 양상을 보였다.
무역으로 전에 없던 새로운 효소들이 공동체에 유입되었다. 효소는 물질생산에 드는 비용을 대폭적으로 절감할 수 있다. 즉, 생산효율이 높아져 적은 공간에서도 생산력을 높일 수가 있다. 이는 생산설비가 집적되는 효과를 가져왔다.
또한 핵산(DNA)의 교역으로 지식정보가 다양해지고 기술 수준도 높아졌다. 이에 따라 분자문명 간에 수준 차이가 생겼다. 문명이 뒤처진 집단은 선진 문명에 흡수되는 일이 일어났다. 유럽 공동체 형태와 비슷하게 여러 분자도시들이 연방으로 묶이거나 아예 하나로 병합하기도 했다.
도시연방 안보를 위해 면역시스템도 생겨났다. 세포막을 출입하는 물질의 신분을 확인하는 국경수비대, 분자도시 내 불순분자를 색출하기 위한 보안단백질, 외부 적을 물리치거나 범죄자를 처리하기 위한 단백질 무기도 개발되었다.
분자문명이 제국화되면서 비로소 더 높은 패러다임을 향하여, 생명으로 진화를 위한 여정을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