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러스는 복제수단(리보솜)을 가지고 있지 않기에 증식을 위해서는 숙주의 것을 이용하는 수밖에 없다. 숙주가 없는 바이러스란 존재할 수 없다. 바이러스가 숙주 세포에 침입하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조건이 맞아야 한다.
먼저 숙주 세포의 문을 열 수 있는 열쇠가 필요하다. 세포는 자물쇠(단백질수용체)로 자신의 출입문을 쇄정하고 있다. 바이러스는 그것을 열 수 있는 단백질을 가지고 있어야만 한다. 키(key) 단백질이 세포의 것과 맞지 않으면 그 어떤 것도 세포 안으로 들어갈 수 없다.
생물마다 자물쇠 모양이 다르기 때문에 그에 맞는 키도 다를 수밖에 없다. 이 때문에 바이러스는 제각기 숙주가 다르다. 돼지 바이러스는 돼지에만 침입이 가능하다. 그러나 간혹 우연히 다른 동물에게도 키가 맞는 경우도 있다. 이때는 돼지에만 걸리던 질병이 다른 동물에게도 전이된다.
키를 가졌다고 세포 침입에 다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바이러스가 침입한 순간부터 면역시스템도 작동된다. 세포방어시스템을 뚫는 것은 만만치 않다. 적절한 타이밍에 정확하게 작업하지 않으면 세포의 공격을 받게 된다.
백혈구와의 싸움에서 살아남은 바이러스들도 세포방어시스템에 죽어 나가는 경우가 많다. 세포방호시스템은 여러 겹으로 무장되어 있다. 그 하나하나 뚫기가 쉽지 않다. 이 방호시스템을 어떻게 바이러스가 뚫고 증식을 하는지 그 기술이 놀라울 뿐이다.
이것은 수 억년 동안 진행되어 온 “지키려는 자와 해킹하는 자”의 치열한 싸움이다. 매커니즘이 밝혀지지 않았거나 사실관계가 명확하지 않은 부분은 상상력이 동원되었다. 스토리텔링 부분은 나중에 사실이거나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질 수도 있다.
- 세포의 출입보안 -
세포에는 문지기(막단백질)가 있다.
문지기는 세포 내부를 들락거리는 출입자 명단을 가지고 있다. 영양분, 호르몬, 효소 등 세포에 필요한 물질만 출입이 가능하다.
문지기는 세포의 출입구를 경계하면서 출입자 신분을 리스트와 대조한다. 리스트에 없는 침입자를 발견하면 그 즉시 표적물질을 쏜다. 표적물질이 침입자에 부착되면 그것이 바로 공격대상이 된다.
어디선가 수많은 보안단백질이 몰려와 침입자를 고치 모양으로 감싸버린다. 단백질 감옥을 만드는 것이다. 동시에 세포 밖으로 경고물질(사이토카인)을 내보내 면역세포에게 비상사태를 전달한다. 문지기를 속이지 않으면, 그 어떤 외부 물질도 세포 침입이 불가능하다.
- 단백질검증 -
바이러스가 증식하기 위해서는 세포 안에서 자신의 유전물질(RNA)과 단백질을 복제해야만 한다. 그런데 세포에는 단백질을 검증하는 효소가 있다.
세포에는 단백질 합성에 필요한 여러 도구들이 존재한다. 그런데 그것들이 모두 RNA로 되어 있다. (mRNA, rRNA, tRNA, aRNA, miRNA...등) 기능에 따라 조금씩 분자구조가 다르다.
이 때문에 세포는 자신의 RNA와 바이러스 RNA를 식별할 필요가 있다. 외부에서 침입한 RNA를 자신의 것으로 오인하여 복제하게 되면 큰 낭패를 보게 된다.
단백질검증효소의 임무가 바로 이것이다. 자신의 RNA와 외부에서 침입한 RNA를 식별하는 것이다. 이 효소는 정품 RNA, 즉 자신의 세포에 있는 RNA 리스트를 가지고 있다.
단백질검증효소는 리보솜이 작업할 때 작업 중인 RNA가 정품인지 검사한다. 자신의 RNA가 맞는지 리스트와 대조한다. 리스트에 없는 것이 발견되면 그 즉시 단백질 생산을 중지시켜 버린다. 리스트에 없으면 외부에서 유입된 침입자로 판단하는 것이다.
때문에 단백질검증효소를 회피하지 못하면 외부에서 들어온 바이러스는 자신의 RNA는 물론 필요한 단백질을 복제할 방법이 없다.
- 단백질절단 -
바이러스 껍질은 벽돌 모양의 단백질을 쌓아서 만들어진다. 그러기 위해서는 단백질이 생산되었을 때 단백질절단효소가 벽돌모양으로 예쁘게 잘라주어야 한다.
자르지 않은 기다란 단백질로 고무줄처럼 칭칭 감고 다닐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런데 이 효소는 단백질 용도가 자신 것이 아니면 자르지 않는다. 자를 부분에 특정한 효소가 붙는데 그 효소에는 자신의 DNA에서 나온 것이라는 표식이 있다. 일종의 정품 바코드다.
정품이면 효소가 자극받아 단백질을 자르게 되지만, 정품이 아니면 단백질절단효소가 반응하지 않는다. 만일 절단효소가 단백질 덩어리를 잘라주지 않으면 바이러스는 곤란한 입장에 처하게 된다. 껍질 없이 헐벗은 채 나가거나 그 자리에 눌러앉아 분해되거나 둘 중 하나의 운명에 처하게 된다.
- 항원제시 -
세포들이 수행하는 항원제시도 바이러스에게 골칫덩어리이다.
세포들은 자기가 생산한 단백질 샘플을 세포 표면에 표출시킨다. 세포의 항원제시 기능이다. 이것이 세포의 신분증 역할을 한다. 적군과 아군을 구별하기 위해서다. 순찰하는 면역세포(세포독성T세포)가 샘플을 일일이 검사한다. 이름에 나타나 있듯이 독한 세포다. 발각되면 에누리 없다.
그런데 세포에 침입한 바이러스가 증식하게 되면 세포의 항원제시 특성이 달라진다. 가령 평상시에는 하얀색이었던 것이 바이러스가 증식하면 빨간색으로 바뀌는 식이다. 이것은 면역세포에게 적이 침입했다고 알리는 신호가 된다.
킬러세포(세포독성T세포)는 비정상적인 세포만 찾아다닌다. 항원제시가 부정확한 세포는 통째로 제거된다. 항원제시가 너무 많아도 적어도 안 된다. 세포가 단백질을 많이 생산해도 이상한 것이고 적게 생산해도 문제가 있는 것이다.
문제는, 세포 안에서 바이러스가 증식하다 보면 비정상 단백질 생산이 늘어난다. 즉 세포 표면에 빨간색(비정상) 항원제시가 많아지게 된다. 이것은 바이러스 신분 노출이나 다름없다. 킬러세포가 발견해 세포를 제거하면 그 안에 있는 바이러스도 같은 운명이 된다. 항원제시 문제를 풀지 못하면 외부 침입자는 증식 자체가 불가능하다.
- 체액면역 -
사실 박테리아나 바이러스에게 세포 안쪽도 문제지만, 밖에서의 생존환경이 더 험악하다.
B세포, T세포, NK세포, NKT세포, 대식세포, 수지상세포, 중성구, 호중구, 호산구, 호염구… 세포 밖에는 별의별 괴물 같은 면역세포들이 돌아다닌다.
이들 하나하나 상대하기도 침입자에게는 힘겨운 일이다. 그런데 이들이 떼거리로 몰려온다면 웬만한 병원균도 감당하지 못한다.
병원균이 숙주에 침입하게 되면 보통 수지상세포나 대식세포를 처음 만나게 된다. 두 세포의 기능은 거의 비슷하다.
이 세포는 침입자를 식별하는 방법부터 예사롭지 않다. 숙주에는 없고 병원체에만 있는 특정한 분자를 가려낼 수 있다. 패턴인식이라고 부르는 면역세포 기능이다. 이것은 스마트폰 패턴인식과 같이 신분을 확인한다. 상대 물질에 비밀로 지정해 둔 패턴이 보이지 않으면 외부물질로 단정하고 공격한다.
항체를 이용한 식별기능도 있다. 항체가 침입자에 달라붙어 물질구조를 검사한다. 이것은 신체검사나 마찬가지다. 신체검사에 통과하면 다행이지만, 검사결과가 적이라고 판단되면 항체는 그대로 달라붙어 표적 역할을 한다. 표적은 면역세포에 의해 즉시 제거된다. 항체는 수억 가지 물질구조를 분석할 수 있다.
외부 침입자에 대한 입국심사가 패턴인식과 항체검사 이중으로 시행되는 셈이다. 침입자가 정상적인 방법으로 입국에 성공하기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심사에 탈락되면 대식세포 공격을 받게 된다. 대식세포가 활동에 들어가면 연쇄적으로 다른 면역세포들이 신호를 받고 출동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