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웃아찌 May 08. 2020

가까이하기엔 너무 먼 커피

미처 몰랐던 일상


'쏴아~ 쏴아'

마치 오줌을 누는 거 같다. 참으로 지독한 설사다. 벌써 다섯 번이나 화장실을 들락거렸다. 이게 다 어제저녁에 마신 커피 탓이다. 카페인 과민성 대장증후군이 있는 나에게 커피는 쥐약이다. 어떤 경우에도 커피를 마시면 예외 없이 직방(直放)이다. 누가 들으면 참 촌스럽다 하겠지만 사실 내가 그렇다. 그걸 누구보다도 잘 알면서 커피를 마시게 된 사건의 전말(顚末)은 이렇다.

어제저녁 집사람이 가정용 커피머신을 선물 받았다며 자랑을 했다. 커피를 그냥 타 먹으면 될 것을 웬 기계까지 집에 들여와 부산을 떨었다. 신이 난 아내는 포장을 뜯어 설치를 하더니만 마치 바리스타라도 된 양 직접 만들어 보겠다고 팔을 걷어붙였다. 잠시 후 뿌듯한 표정으로 커피 두 잔을 거실로 들고 나왔다.

"당신도 한잔 마셔 볼래요?"

"나 커피 못 마시는 거 알면서..."

"당신 체질 개선한다고 건강보조식품 먹고 있으니 한번 테스트해봐요. 당신 말대로 좋아졌는지.."

나를 생각해 주는 거 같지만 분명 비아냥 섞인 말투였다. 몸에 좋다면 무엇이든 사서는 집에 바리바리 싸들고 오는 걸 아내는 늘 못마땅했었다. 그동안 쌓아둔 제품의 종류를 헤아리자면 열 손가락뿐만 아니라 열 발가락까지 동원해도 모자랄 판이다.

"당신 과소비보다 안 좋은 게 뭔 줄 아세요? 오(誤) 소비예요. 오 소비.. 잘못된 소비라고요. 이런 거 안사고 모았으면 강남에 빌딩을 샀겠네.. 차라리 운동을 하세요. 운동. 어이구 내가 못살아..."

신혼 때부터 귀가 따갑도록 듣는 잔소리는 이제 이골이 났다.

"거.. 가장이 건강해야지! 내가 쓰러지면 이산가족 되는 거 몰라? "

아내의 말이 틀린 게 하나 없다는 걸 알면서도 가장의 목숨을 운운하며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렸다. 사실 건강식품을 판매한 사람의 말대로라면 저 많은 걸 다 먹고 나면 나는 병치레 없이 불로장생을 해야 마땅하다. 하지만 그동안 체질이 바뀌었거나 체력이라도 좋아졌다면 내 행위에 정당성을 주장할 수 있겠으나 여태껏 그러지 못했다. 그래도 언젠가는 효험(效驗)이 있음을 증명해 보이리라 단단히 벼르고 있었던 참이었다. 마침 그 기회가 온 것이다. 커피를 마셔도 끄떡없음을 보여주고 다시는 찍소리 못하게 하자는 얄팍한 노림수가 있었다.

"알았어.. 날 위해 커피를 탔으니 함 먹어보지 뭐.."

평소에 커피를 마시질 않으니 커피 맛을 제대로 알 리가 없었다. 사약을 받은 듯 비장한 마음으로 한 모금을 마셔보니 예상했던 대로 쓰기만 했다. 이런 걸 사람들은 뭐가 그리 좋다고 마시는 걸까. 그러나 내색을 하면 안 되는 타이밍이었다.

"음.. 생각보다 풍미가 느껴지고 맛있는데? 이래서 커피, 커피 하나 보군.. 매일 마셔도 되겠는 걸! "

그 알량한 자존심 때문에 배우 송강호급 연기까지 해가며 홀짝홀짝 마시고는 한 잔을 더 마시겠다고 과욕까지 부렸다. 그러나 그 허세는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탄로가 났다. 아랫배에서 신호가 오더니 기어코 사달이 나고 말았다. 몸에 좋다는 제품을 그리 먹고도 나의 몹쓸 몸은 달라진 게 하나도 없었던 것이다.

이런 이유로, 나는 커피의 그윽한 향기조차 좋은 걸 모르겠고 빈속에 모닝커피를 먹는 사람도 납득이 안 가며, 심지어 커피로 만든 우유나 껌은 왜 만드는 건지도 도대체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적당히 마시는 커피는 몸에도 좋다는데 왜 나한테만 이런 가혹한 저주가 내린 걸까? 만인(萬人)이 다 하는 걸 나만 못하는 것도 은근 짜증 나는 일이다.

여느 사무실을 방문하면 커피 한잔 드시겠냐고 묻는다. 커피 드실 줄 아냐고 물어보는 경우는 없으니 당연하다. 커피를 마시면 설사한다고 하면 없어 보일까 봐 이실직고도 못하고 오늘 많이 마셨으니 시원한 물 한잔이나 달라고 에두르곤 한다. 그렇다고 다방도 아닌데 쌍화차에 노른자 띄어 달라고 할 순 없지 않은가!

한 번은 성수동 모 카페에서 미팅을 가진 적이 있는데 인테리어도 독특하고 주변 경관도 훌륭해서 이런 곳에서 커피를 마시면 분위기 있겠다 싶었다. 그러나 막상 다들 취향에 맞는 커피를 주문할 때, 나만 생뚱맞게 생강차를 시켜야 했다. 무슨 인사동 전통 찻집도 아니고 모던한 카페에서 생강차나 시키는 꼴이라니. 내가 봐도 참 멋대가리 없어 보였으나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나는 언제쯤이나 남들처럼 풍광 좋은 카페에서 그윽한 커피 향을 맡으며 우아하게 커피를 마셔볼 수 있을까? 이것도 타고난 내 운명이라면 겸허히 받아들여야 할 것이고, 하는 수 없이 커피를 대신하여 보리차를 진하게 우려 에티오피아 예가체프 커피를 마시듯 분위기라도 한껏 내봐야겠다. 아... 가까이하기엔 너무 먼 커피다.

커피를 마시는 평범한 일상이 나에겐 그토록 누리고 싶은 로망인 것처럼 내가 지금 아무 생각 없이 누리고 있는 걸 부러워하는 이가 분명 있지 않을까? 커피는 아니더라도 더 많은 걸 누릴 수 있음에 감사할 일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