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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웃아찌 May 08. 2020

선한 부자

나눔을 실천하는 삶


동대문시장에서나 볼 법한 싼티 나는 배 바지 양복을 입고, 평범하다 못해 동네 백수건달같이 남루한 행색을 하고 있는 한 분을 만나고 있었다. 두 번째 만남이었다. 이분으로 말할 거 같으면 6.25 동난 때 똥구멍이 찢어지도록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혈혈단신으로 자수성가하신 분으로, 강남 테헤란로 그 비싼 땅에 건물 몇 채와 전국 요지에 주유소를 10개나 소유하고 있는 일명 강부자(강남 부자)다.

부자라 고하면 손목에는 비싼 로렉스 시계를, 온몸에는 이태리 명품 옷으로 도배를 하고 번쩍번쩍한 고급 외제 승용차를 끌고 다니는 것을 언뜻 떠올릴 텐데, 웬걸 그에게선 허세란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었고, 내가 알고 있는 부자와는 전혀 다른 이미지였다.

어느 책에서 부자가 되고 싶으면 그에게 식사를 대접하라는 글을 본 적이 있다. 그만큼 부자와 친해져야 뭐라도 배울 수 있다는 얘길 텐데 그걸 실천해보고자 용기 내어 다시 찾아간 것이다. 물론 투자 관련 상담을 핑계로 만난 거긴 하지만 사실 그가 부자가 된 그만의 노하우가 몹시 궁금했다. 내가 궁금해하는 것이 뭔지를 눈치를 챘는지,

"자네 부자 되고 싶나?"

대뜸 물었다. 경지에 이른 사람만이 할 수 있다던 그 관심법이었다. 어설프게 속내를 들켜버린 나는 기습적인 물음에 당황해서 어떨 결에 '네'라고 넙죽 대답하고 말았다. 그리고는 무슨 부자들만이 갖고 있는 노하우나 괜찮은 고급 정보라도 줄까 싶어 귀를 쫑긋하고 경청을 하고 있었다.

"쓰지 마!"

뜬금없는 의외의 한마디를 던졌다.

"네?"

"글쎄 쓰지 말라고.."

뭔 뚱딴지같은 소리인지.. 알아서 해석을 해야 했다. 쓰지 말라는 말은 돈을 쓰지 말고 악착같이 모으라는 의미로 들렸다.

'이런 자린고비가 있나. 사람이 벌만큼 벌었으면 적당히 쓸 줄도 알고, 하고 싶은 거 누리면서 살아야지 그 많은 돈을 무덤까지 가져갈 것도 아니고..'

기대가 커서 그랬는지 느닷없이 던지는 성의 없는 그의 말에 조금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하기야 자기돈 자기 맘대로 하겠다는데 쓰던 말 던 내가 참견할 일도 아니었고 실망할 것도 없었다. 그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적당히 있는 사람이 부자인척 한단 말이야. 알고 보면 쥐뿔도 없으면서.."

퉁명스럽게 혼자 중얼거렸다.

"재산이 정말 많은 부자는 돈 더 벌려고 아등바등 대지 않거든. 어설프게 많은 사람이 욕심부리는 거지. 절대 돈을 좇아가면 벌 수 없어. 돈을 벌려면 돈의 흐름을 알고 길목에 서있으면 돼. 그럼 돈이 알아서 좇아오게 되어 있어. "

그의 말은 알듯 모를 듯했다. 한마디로 돈의 통로가 되라는 말인 거 같은데 심오한 그의 말이 백 프로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뭔가 비밀이 있겠거니 했다. 어찌 수십 년간 산전수전 공중전까지 겪어가며 터득했을 비법을 한낱 피라미가 이 모든 걸 한 순간에 터득할 수 있겠는가! 모기도 반 지하에서 빨아먹는 피 맛과 고층 아파트에서 빨아먹는 피 맛이 다름을 알 텐데, 하물며 부자들도 그들만이 알고 있는 특별한 뭔가가 있을 거라 생각했다.

"부자는 자고로 겸손하고 검소해야 해"

그게 자신이 갖고 있는 평소의 소신이라며 그만의 비밀을 풀어내기 시작했다. 부자가 되고 싶으면 이 두 가지를 먼저 갖춰야 한다고 일러주었다. 그는 지금도 15년 된 소나타를 타고 다니고 있고, 웬만하면 대중교통을 이용한다고 했다. 한 끼 식사는 6천 원을 넘기지 않으며, 커피도 주로 자판기 커피를 마신다고 했다.

쓰지 말라는 말에는 이런 그의 철학이 내포하고 있었던 것이다. 난 그보다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가진 게 없으면서 15년 동안 더 탈 수 있었던 차를 대여섯 번이나 바꿨으며, 걸핏하면 맛집 운운하며 허세를 부리지 않았던가! 순간 부끄러웠다. 그러나 그게 끝이 아니었다. 나를 더 부끄럽게 하는 반전은 따로 있었다. 자신을 위해 쓰는 것은 아껴 쓰되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위해 쓰는 것은 아끼지 말고 베풀라는 것이었다.

그를 소개해준 사람을 통해 이 분의 선행에 관한 얘기를 들어서 대충 알고 있었다. 그는 누구보다도 기부를 많이 하고 있고 드러내지 않고 묵묵히 선행을 하고 있었다. 아프리카 기아들을 후원하고 있고 소년소녀가장을 돕는 건 물론, 독고노인들에게 쌀을 해마다 지원하고 있으며, 정기적으로 바쁜 중에도 중증 장애인을 위해 봉사하는 것을 게을리하지 않는다고 했다. 겸손은 낮아짐이고 그 낮아짐에서 능력이 나오는 거라 했다. 마치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한 신선한 충격이었다.

돈밖에 모르는 구두쇠로만 봤는데 그의 생각과 삶을 보고 존경스러운 마음이 들었고 그의 삶에 대한 확고한 신념에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그야말로 이 시대에 필요로 하는 진정한 부자의 모습이었다. 살면서 또 한 명의 고수를 만난 셈이다. 점심식사를 간단히 하고는 다시 만나기로 하고 헤어졌다. 황새가 봉황의 뜻을 헤아리기에는 아직 역부족이겠으나 확실히 한 가지 깨달은 건 부자가 되더라도 깨끗한 부자가 되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선 겸손과 검소함이 몸에 배야 한다는 것이다.

부자한테 식사를 대접한 건 결코 아깝지 않은 수업료였다. 한 수를 배우고 급수가 올라간 듯한 느낌이 들었다. 부자가 되는 것도 어렵지만 선한 부자가 되는 건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만큼이나 더 어려운 일일 것이다. 나는 한 가지 새로운 목표를 세웠다. 나도 저런 선한 부자가 되어 보자는 것, 그것이다. 아니 남들이 인정하는 부자는 못 되더라도 겸손함과 검소함을 실천해야겠다는 다짐을 해 보았다.

내일은 동사무소에 가서 명단을 뽑아봐야겠다. 코로나로 힘든 이웃들이 훨씬 많아졌을 것이다.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을 돌보는 일은 꼭 부자만의 특권도 의무도 아닐 것이기에 당장 작은 것부터 실천에 옮겨볼까 한다. 이미 마음은 부자가 된 느낌이다. 오늘따라 밤공기가 유난히도 상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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