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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웃아찌 May 08. 2020

닭볶음탕 맛집

연시내 제일식당

산들산들 바람 불어 좋은 날, 불연 듯 닭볶음탕이 먹고 싶어 졌다. 음식 맛있기로 소문난 연신내 제일식당으로 친구와 함께 바람 따라 발길을 옮겼다.

가게는 뜻밖에 협소했다. 대여섯 테이블이 전부인 데다 시끌벅적한 것이 꼭 시골 장터 같았다. 저녁을 하기에는 이른 시간임에도 북새통을 이뤘다. 안쪽 구석에 빈자리로 이동해 의자 끄트머리에 걸쳐 놓아져 있는 신문을 궁둥이로 슬쩍 밀치고 앉았다.

뜻밖에 나이 지긋한 분들이 많았다. 이 난리 통에도 외식하러 집 밖을 나온 걸 보면 살만 하신 분들이거나 정말 중독성이 강한 맛집이거나 둘 중 하나일 게다. 가게 분위기는 내 취향이 아니었지만 일부러 먼 길까지 왔으니 맛만 있으면 다 용서가 된다는 심산으로 가게 구석구석 둘러보았다.

먼저 눈에 뜨인 건 투박한 글씨체의 메뉴판이었다. 생선조림부터 각종 볶음요리까지 선택 장애를 유발할 만큼 종류가 많았다. 저리도 많은 음식을 이 좁은 가게에서 그것도 주방보조도 없이 주인아줌마 혼자서 만든다고? 믿기지 않았지만 방송국에서 '생활의 달인' 취재를 나온 것도 아니기에 차차 시간 내서 검증해 보기로 하고 토종닭볶음탕 1마리를 주문했다.

그렇지. 닭볶음탕은 화려한 곳보다는 약간 허름한 곳에서 먹어야 더 맛이 난다. 좁아서 아늑해야 하고 적당히 지저분해야 한다. 가스레인지는 기름얼룩이 묻어 있어도 좋다. 그런 털털함이 있어야 정이 가고 맘 편하게 먹을 수 있다. 이 집은 이 모든 조건을 충족했으니 일단 합격이었다.

주인아줌마는 뚱뚱한 데다 궁둥이마저 펑퍼짐했는데 그만큼 인심도 푸짐하고 후해 보였다. 뚱뚱한 살 뺄 여유 없이 장사에만 전념하였을 것이니 그만큼 음식 맛이 얼마나 대단하겠는가! 풍채(風采)에서 달인의 아우라가 느껴졌다.

닭은 토종닭이 몸에 좋고 훨씬 맛있다고 권하는 주인의 속 보이는 친절이 상술인 걸 뻔히 알면서도 얄밉지 않았다. 오히려 마누라도 아닌데 내 몸을 걱정해주니 빈말이라도 감사할 일이었다.

그래 몸에 좋다지 않는가! 한창 건강을 챙길 나이가 되고 나니 귀가 습자지처럼 얇아졌다. 아무튼 토종닭이면 어떻고 물 건너온 닭이면 또 무슨 상관이랴. 맛을 알아줄 임자를 제대로 만났으니 뭐든 상관없이 제대로 맛이 날 거다.

드디어 주문한 음식이 나왔다. 예열을 마치고 나온 탕을 중불로 잠시 끓인 후에 토종닭임을 알 수 있는 길고 늘씬한 닭다리를 한 점씩 먼저 사이좋게 집었다. 가스 불에 살짝 그슬린 앞 접시에 덜어 먹으니 시골에서 먹는 듯해 정겨운 감칠맛이 더했다.

갖은양념과 재료가 들어가는 닭볶음탕엔 뭐니 뭐니 해도 감자가 필수다. 감자가 빠진 닭볶음탕은 고무줄 없는 팬티와 같다. 그 감자가 울퉁불퉁하고 못생긴 강원도산이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이다. 닭볶음탕은 밑반찬 없이도 공기 밥 몇 그릇은 뚝딱 해치울 수 있는 밥도둑이다. 근데 이 집은 기본 반찬도 그들먹하고 감칠맛이 나서 밥 도둑질을 부추겼다.

힘들게 살던 어린 시절엔 닭 요리는커녕 계란 프라이도 감지덕지인데 닭볶음탕이야 언감생심이었다. 특별한 날 키우던 닭을 잡아 온 가족이 먹을 수 있게 삶아서 갈기갈기 찢어 백숙을 해 먹으면 그만이었다.

닭볶음탕의 맛을 알게 된 것은 힘든 세월을 지나 철이 들 때쯤이었다. 늦게 배운 도둑질 날 새는 줄 모른다고, 매콤 달콤한 그 맛에 홀딱 반한 나는 동료들과 어울려 닭볶음탕을 자주 먹곤 했다.

먹고살기 힘들어서, 혼자 외로워서, 일이 잘 안 풀려서, 시련당해 괴로워서... 닭볶음탕을 먹는 이유도 가지가지였다. 얻어먹을 때는 미안하고 내가 살 때는 주머니 사정이 여의치 않아 허리가 휘청하니 이래도 부담 저래도 부담이었다. 그래도 쪼들렸던 그 시절에 먹었던 그 맛이 더없이 그리울 때가 있다.

예나 지금이나 서민들의 입맛을 달래주는 이런 가게는 오래도록 보존되어야 한다. 장사가 잘 돼서 새 시설을 갖추고 가게를 확장하여 이전할 순 있을 거다. 세련되고 청결하며 맛은 유지할 수 있겠으나 이 가게만이 가진 운치와 멋은 없어질 테니 분명 아쉬울 것이다.

한 푼이라도 더 벌자고 장사하는 주인 입장에서야 나보다 더 멋지고 돈 많은 고객을 맞고 싶은 것을 어찌 뭐라 하겠는가마는 이런 가게는 오래도록 그대로 남아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서울 서북쪽 끝자락에서 오래도록 터를 잡고 사는 서민들의 애환과 추억이 서려있을 것이기에 더욱 그렇다.

그러면 나도 이 집 단골손님이 되어 어느 날 해가 질 무렵, 술 고프고 출출할 때 내 친구들을 몰고 내가 아는 그 집이라며 자랑삼아 쳐들어갈 것이다.


소주 한 병과 맥주 두병을 우선 시켜 첫 잔을 시원한 소맥으로 조제한 후 탕이 끓는 아까운 막간에 한잔 쭉 들이키자고 할 것이다.

"위하여!"를 외치며 내일 일은 내일 걱정하고 오늘 일은 이 술 한 잔과 함께 날려버리자고 제안할 것이다. 그리고 걸쭉한 국물과 먹기 좋게 적당히 익은 닭고기 한 점을 덜어주고 최고의 맛을 나누며 인생을 위로할 것이다.

술병들이 대책 없이 식탁 위에 볼링 핀처럼 쌓일 때쯤이면 알딸딸한 기운을 빌어 옆 상에 외로이 혼술 하는 이에게 벗이 되어 주고, 닭볶음탕 한 접시와 소주 몇 병을 기꺼이 쏠지도 모른다.

그러면 그 사람도 나처럼 세상을 법 없이도 사는 착한 사람일 것이고 이 집 맛을 알고 자주 오는 사람이라면 언젠가 내가 혼자 오게 되더라도 행여 마주치게 될 때 나의 외로움을 달래줄 친구가 되어주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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