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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웃아찌 May 20. 2020

덤으로 사는 인생


우리 동네에는 오래된 재래시장이 있다. 한 구석진 곳에 자리를 펼쳐놓고 채소를 파는 할머니가 계시는데 퇴근길 지나가는 길에 어쩌다 상추나 나물을 사게 되면 어김없이 덤으로 한 움큼 얹어주곤 한다.

"할머니! 그렇게 팔아서 뭐가 남아요. 덤으로 안 주셔도 돼요."

그리고는 천 원을 더 주려하면 그럴 거면 다신 오지 말라며 도리어 화를 내곤 한다.

"알았어요. 그럼 천 원어치 더 살거니 그만큼 더 주세요. 그럼 됐죠?"

"그럼.. 뭐.. 암튼 담부터는 먹을 만치만 사고 다신 그러지 마쇼! "

나름 근성도 있고 신조(信條)가 있는 할머니다. 한창 젊었을 때는 어떤 장성한 남자들한테도 주눅 들지 않았을 여장부였을 것이다. 곱게 늙진 않으셨으나 늘 당당한 할머니가 멋있어 보였다. 하기야 그런 배짱 없이 치열한 시장바닥에서 어찌 살아 남았겠는가. 이 할머니가 얼마나 험난한 인생을 살아왔는지는 굽은 허리와 거친 손만 보아도 한눈에 알 수 있다. 나이가 여든은 족히 넘어 보이는데 한 푼이라도 벌어보겠다고 하루도 거르지 않고 악착같이 나오시는 걸 보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한편으론 무슨 사연이 있어 노년을 저렇게까지 사시나 짠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하여 집사람 명을 받고 대형마트에 가서 더 신선하고 쾌적한 환경에서 편하게 장을 볼까 하다가도 재래시장 할머니가 눈에 밟혀 일부러 찾아가곤 한다.

야채를 사러 갈 때마다 매번 덤을 주시길래 고맙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해서 한 번은 커피숍에 들려 과일주스 한잔을 들고는 할머니를 찾아갔다. 그런데 할머니가 안 계신 게 아닌가! 순간 무슨 일이 생겼나 싶어 걱정이 되었다. 옆에서 장사하는 아저씨한테 할머니 어디 가셨냐고 했더니 몸살 기운이 있어 집에 먼저 들어가셨다고 했다. 아프면 집에서 쉬실 일이지 왜 나오셨을까.. 가족이 있는지를 물어보니 일찍이 남편을 떠나보내고 자식들은 외지에서 살고 있어서 혼자 사신다고 했다.

할머니랑 그간 정이 들었는지 짠한 마음이 밀려왔다. 아플 때 챙겨줄 사람 없을 때가 가장 서럽다던데.. 나이 들어 아프면 회복도 잘 안 될 텐데.. 이 생각 저 생각이 들었다. 말년에 혼자 사는 외로움은 어떤 느낌일까? 어쩌면 그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매일같이 부지런히 장사하러 나오시는 게 아닐까 싶었다. 상인들과 수다 떨며, 분주하게 지나가는 행인들의 천태만상을 보는 재미에 적적함을 달랬을 것이다. 야채를 다듬고 흙을 털어내면서 혼자라는 외로움도 자식에 대한 그리움도 함께 다듬고 털어냈을 것이다.

언젠간 할머니가 있던 자리에 낯선 누군가가 대신할 날이 올 것이다. 할머니가 그랬던 거처럼 상인들과 치열하게 생존을 위해 몸부림 칠 것이다. 누군가 떠나면 누군가 그 빈자리를 채우고 하겠지. 산다는 게 뭔지 인생무상함이 느껴졌다.

할머니가 주셨던 덤은 마치 내가 덤으로 사는 인생임을 일깨워 주는 메시지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살면서 몇 번의 죽을 고비를 넘겼다. 어머니 태중에서 세상의 빛을 못 보고 사산될 수 있었고, 어릴 적 강에서 물놀이하다 깊은 웅덩이에 빠져 간신히 동네 형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졌으며, 트럭과의 충돌로 폐차 처리할 만큼 큰 사고에도 기적적으로 살아나기도 했었다. 이런 내가 덤으로 사는 인생인 것을 망각하고, 조금 더 내 것으로 취하려고 아등바등 욕심부리며 살아온 거 같다. 나 잘 난 맛에 사람들한테 상처 주고 원망하고 용서하지 못하고 옹졸하게 살진 않았나 돌아보았다. 덤으로 사는 인생 부질없는 욕심을 더는 부리지 말고 살자 다짐해 보았다.

나의 발걸음이 매번 재래시장 할머니를 무심코 향하는 이유는 이런 덤의 의미를 일깨워 주기 때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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