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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웃아찌 May 22. 2020

옥희 아빠

사부곡


'옥희 아빠 온다. 옥희 아빠!"

한 살 많은 내 누이가 있다. 이름도 그 유명한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에 나오는 옥희다. 구슬 옥자를 써서 이름을 지으셨다. 아버지는 막내인 나보다 누이를 예뻐하셨다. 아니 누이만 유독 예뻐하셨다고 해야 맞다. 아버지가 동네 친구 분들과 어울려 술을 거나하게 드시고 집으로 오실 때면 나는 득달같이 달려 나가 그렇게 외치곤 했다.

이렇듯 어릴 적 아버지는 나의 아빠가 아니었고 옥희 아빠로 통했다. 내게 있어 아빠의 존재감은 거의 없었다. 형들은 나를 다리에서 주어왔다고 놀렸고 누이들은 내 친엄마는 따로 있다고 거들곤 했다. 어린 마음에 친엄마를 찾겠다고 울며 가출도 해보았지만 그래 봤자 동네 밖을 벗어나지 못했다.

아버지가 주는 용돈은 누이는 100원 나는 10원이었다. 한 살 터울인데 무려 열 배나 차이가 났으니 억울할 만도 하지만 내 아빠도 아니고 옥희 아빠였기에 떼를 쓸 수가 없었다.

누이는 손재주가 있어 그림을 그리거나 만드는 걸 곧잘 했다. 늘 예쁜 짓만 하니 아버지 사랑은 항상 누이 차지였다. 반면 나는 천방지축 까불이였고 밖에서 동무들과 어찌나 노는 걸 좋아했던지 비 오는 날에도 옷이 흠뻑 젖도록 공 차고 놀았고 심지어는 홍역에 걸렸는데도 뛰어놀 정도로 동네에서 유명한 개구쟁이였다. 그렇게 나는 천덕꾸러기로 유년시절을 보냈다.

5남 3녀 중 막내로 태어난 나는 어머니 말씀으로는 나를 낳을 계획이 없으셨다고 한다. 아들이 넷이나 있는데 뉘 집처럼 대를 이을 아들이 필요한 딸 부잣집도 아니고 다산을 장려했던 시절이긴 했지만 먹고살기 힘든 시절에 건사할 입이 하나 더 늘어나는 게 부담이 됐을 것은 당연했다. 어머니는 나를 임신한 걸 5개월이 지나서야 아셨다고 한다. 어느 날 배가 꼼지락 거려 혹시나 해서 병원에 가봤더니 애가 들어섰다는 것이다. 아마 일찍 알았다면 중절 수술을 했을 거라고 하셨다.

해산(解産)의 일화는 더 압권이다. 엄마와 둘째 누이랑 점심을 먹고 난 후 상을 부엌으로 내가고 있는 사이에 '응애'하고 아기 소리가 나더란다. 트림하다 낳으셨는지 방귀를 뀌다 낳으셨는지 모르겠으나 혼자서 산통(産痛)도 없이 쉽게 나를 으셨다는 얘긴데, 무슨 동물농장도 아니고 세상에 이런 일이 다 있나 싶은 이야기이다. 지금이야 가족들과 모이면 무용담처럼 웃으며 얘기하는 단골 메뉴지만 상상도 못 할 생존이 기적인 때였다.

원치 않은 자식이 태어났으니 아버지는 내가 예쁠 리가 없었다. 그런 아버지와 살가워진 때는 아버지가 칠순을 넘어 후두암으로 투병을 하게 됐을 때쯤이었다. 연세에 비해 건강하셨고 음악과 책 읽는 걸 좋아하셨던 한량(閑良)이셨는데, 암 발병 후 급격하게 야위시기 시작했다. 몸이 쇠약해지면 마음도 약해지는 법. 호랑이 같은 분이 순한 양이 되셨다.

어릴 때는 옥희 누이만 찾으시던 분이 유일하게 결혼 안 하고 객지에서 혼자 사는 막내가 맘에 걸렸는지 하루에도 몇 번을 내게 전화를 하셨다. 아직도 다정하게 내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귀에 선하다. 어릴 때는 왜 그렇게 매정하셨는지 이렇게 따뜻한 말 한마디로 행복할 수 있는 거였는데..

그렇게 무섭고 엄했던 기억만 있는 아버지와 이제야 부자지간의 못다 한 정을 나누는가 싶었지만 결국 암을 이겨내지 못하시고 6개월 후 소천하셨다. 난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눈물이 안 날줄 알았다. 자라오면서 애틋한 정도 못 느꼈고 아버지와 함께했던 변변한 추억조차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피는 물보다 진하다 했던가. 나는 어쩔 수 없이 아버지를 닮았다. 음악에 소질이 있는 것도 그렇고 이렇게 글을 쓰는 것도 그러하며, 심지어 눈꼬리가 쳐지고 머리숱이 없는 것도 아버지를 빼닮았다.

내게는 두 살 터울로 아들딸이 있고 그 밑에 늦둥이 막내아들이 있다. 이것도 아버지를 닮았는지 막내보다는 딸을 더 예뻐한다. 막내를 보면 내 자랐던 철부지 시절이 생각나 더 잘해줄 듯싶은데 부전자전은 어쩔 수 없는가 보다. 하지만 막내한테 아버지에 대한 원망이나 부정(父情)에 대한 한을 물려주고 싶진 않다. 그건 정말 서럽고 상처되는 일이라는 걸 너무 잘 알기 때문이다.

어느새 세월이 흘러 머리가 희끗한 중년이 되었고 자식 셋을 둔 아버지가 된 지금, 가장으로서 지치고 삶이 버겁게 느껴질 때면 아버지 생각이 문득 나곤 한다. 나는 셋도 키우기 힘든데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 없으셨을 아버지는 8남매를 어떻게 건사하셨을까. 짓누르는 무게감을 어찌 견뎌내셨을까..

벚꽃이 휘날리는 춘삼월을 지나 기일이 점점 다가올 때쯤이면 사무친 그리움은 고질병처럼 심하게 도져 온다. 옥희 아빠라도 좋으니 꿈에라도 한번 만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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