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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웃아찌 May 26. 2020

호수

보고픈 선생님

제목 : 호수


얼굴 하나야
손바닥 둘로
폭 가리지만

보고픈 맘
호수만 하니
두 눈 감을 밖에

- 정지용


1988년 월북 시인들이 대거 해금되기 전에는 이 시가 주인 없이 작자미상으로 떠돌고 다녔었다.

돌이켜 생각하면 지금도 마음이 아린 사람이 있다. 고등학교 시절 글짓기를 잘하고 노래도 곧잘 하는 나를 무척이나 예뻐하셨던 국어 선생님이 계셨다. 군대를 갓 제대하고 사립 고등학교에 임용되어 국어교사를 하게 된 지 얼마 안 된 20대 중반을 넘긴 총각 선생이었다. 그림도 잘 그리고 책도 많이 읽고 수업할 때 가끔 유행하는 이문세 노래를 불러주곤 했는데 원곡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로 감동을 주곤 했다. 도대체 저분의 정체는 뭘까? 지성과 감수성을 겸비했고 체형도 요절한 거북이 터틀맨(임성훈)처럼 아담하고 다부지게 생겨 학생들한테 인기가 많았다.

교내 문화 행사가 있으면 내 재능을 알아보고 담임이 아님에도 나를 추천하여 예능의 끼를 함께 발휘하곤 했었다. 클래식 기타를 제법 쳤던 내가 '하얀 연인들'을 연주하면 선생님은 그 음률에 맞춰 자작시를 멋들어지게 낭송을 하였는데 누가 봐도 최고의 앙상블이었다. 동료 선생님들과 학생들의 환호와 반응은 연예인들의 공연을 방불케 할 만큼 뜨거웠다. 발표가 끝나고 수고했다며 대견하다는 듯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갈비뼈가 부서져라 꼬~옥 안아줬던 기억은 삽 십여 년이 지난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고등학교를 졸업을 하고 대학을 갔을 때도 국어 선생님과 꾸준히 연락을 하고 지냈다. 스승의 날이나 크리스마스 때면 예쁜 그림을 그려 그 속에 시를 적어 보내기도 했는데 함께 적어 보낸 그 시가 정지용의 '호수'였다. 그리고 나는 대학원 졸업 후 직장생활을 하게 되었고 부산으로 발령받아 한 달에 한두 번 정도 서울에 올라오곤 했었다. 그럴 때마다 안부차 선생님께 전화를 하면 맛있는 거 사주겠다며 불러내서는 강남 주변 맛집을 데리고 다니셨다.

영화도 보고, 강남 신사동 예쁜 찻집에서 차를 마시며 문학 얘기도 나누고, 어쩌다 노래방을 가기라도 하면 누가 국어 선생이 아니랄까 봐 노랫말이 시적인 발라드를 좋아하셨는데 특히 애창했던 노래 중 하나가 김규민의 '옛이야기'였다. 때론 친구처럼, 때론 다정한 연인처럼 선생님과의 추억들이 하나 둘 쌓여갔다. 선생님과 나랑은 예닐곱 살 차이가 났는데, 피를 나눈 친형제보다 돈독했고 여느 사제관계 이상으로 각별하게 서로를 아껴주고 존중해준 사이었다.

부친상을 당했을 때도 장례 첫날부터 모든 장례를 마칠 때까지 함께하며 나를 위로해 주셨고 살면서 힘들 때마다 마치 키다리 아저씨처럼 든든하게 힘이 되어주셨다. 아버지를 여의고 1년이 지나 나는 대학원 졸업 후 어머니의 성화에 못 이겨 결혼을 하게 되었다, 결혼식 날 선생님이 축사를 하셨는데 준비한 원고를 읽다가 격하게 우시는 바람에 결혼식 분위기를 숙연하게 만들기도 했었다.

결혼 후 아이 둘을 낳고 사는 동안에도 선생님은 여전히 노총각이셨다. 몇 번 소개팅도 주선했지만 뭐가 맘에 안 들었는지 매번 퇴짜를 놓곤 하셨다. 선생님과 만날 때 어떤 때는 내 아이들도 데리고 나가기도 했는데 그럴 때도 굳이 자기가 사겠다며 항상 먼저 계산을 하셨다. 나도 대접할 만큼은 충분히 번다고 해도 그런 기회를 절대 주지 않았다. 애들 키우는데 힘들지 않냐며 오히려 걱정을 하고는, 애들 용돈까지 손에 쥐어주던 마음 따뜻한 분이셨다. 교사 월급이 박봉인 걸 뻔히 아는데 말이다. 그렇게 10년이 넘도록 사제지간의 정을 쌓아갔다.

그러던 중 나는 러시아 쌍트 페테르부르크로 파견 근무를 가게 되었다. 출국하는 날 인천공항까지 배웅을 나오셔서 러시아가 아직은 위험한 국가이니 몸조심하라며 꼭 안고는 눈시울을 붉히셨다. 그 당시에는 연락할 방법이 이메일 말고는 마땅치 않았는데 러시아 생활에 적응하다 보니 선생님과 연락이 뜸하게 되었다.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고 했던가. 선생님도 어느 순간부터 보낸 이메일을 확인도 안 하고 답장도 없었다. 그럴 때마다 무소식이 희소식이겠거니 하고 넘어가곤 했었다.

그렇게 2년여 시간이 흐른 뒤 한국에 오게 되었고 어느 예식장에서 선생님의 누나를 우연히 만나게 되었다. 그 누나라는 분도 음악을 가르치는 선생님이었는데 나를 아끼는 제자라고 소개받은 후 나의 음악 재능을 보고 귀엽다며 국어 선생님만큼이나 무척 나를 예뻐해 주셨던 분이셨다. 근데 그분이 나를 보자마자 껴안고 엉엉 소리 내어 우는 게 아닌가!

그날 내가 그렇게 좋아했던 선생님이 불의의 사고로 돌아가셨다는 걸 알게 되었다. 왜 이메일 회신이 없었는지 그럴 분이 아니었는데 그 이유를 비로소 알게 되었다. 죽은 동생이 제자인 나를 너무나도 아끼고 예뻐했던 걸 알았기에 나를 보자마자 동생이 생각났던지 껴안고 울었던 거였다.

청천벽력 같은 얘기를 듣고 나는 망연자실했지만 정신을 차리고 나니 왠지 모를 먹먹함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번 터지기 시작한 눈물은 멈추질 않았다. 순간 결혼식장이 장례식장이 되어버렸다. 아무도 없는 화장실에서 세면대 수도꼭지를 크게 틀어놓고 그리움과 죄송한 마음에 서럽게 펑펑 울었다. 선생님과 함께했던 무수한 추억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환갑을 바라볼 나이가 되셨을 선생님이 살아계셨다면 황혼을 함께 의지하며 인생을 즐길 수 있었을 것이다. 죽기 전 해보고 싶은 버킷리스트를 작성해서 전국을 돌며 맛있는 것도 먹으러 다니고, 언젠가는 꼭 가보자던 핀란드 오로라도 보러 가고, 북한산 정상에 올라 노을 진 석양을 바라보며 인생을 함께 위로했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당신이 나에게 그랬던 거처럼 이제는 내가 선생님의 키다리 아저씨가 되어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남한테 신세 지는 걸 누구보다 싫어했던 선생님은 나한테조차 그런 기회를 주지 않고 뭐가 그리 급했는지 매정하게 서둘러 가버리셨다.

나는 정지용의 시를 대할 때마다 너무나 멋스러웠던 국어 선생님이 생각나곤 한다. 수업시간에 가장 좋아하는 시인이 정지용이고 많은 사람들이 그의 작품 중에 '향수'를 기억하지만 당신은 '호수'를 가장 좋아한다며 읊어줬던 시...

짧고 강렬한 시처럼 생을 마감하신 선생님이 몹시 보고 싶다. 그 보고픈 마음 호수만 해서 나는 오늘도 속절없이 두 눈을 감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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