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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웃아찌 Jun 01. 2020

분리수거를 하다가

막내아들의 그림장에 얽힌 사연


수북이 쌓여있는 재활용 쓰레기가 집안에 한가득이다. 5인 가족이 일주일간 먹어 치우는 양이 상상을 초월한다. 한창 클 나이이니 당연한 일일 테지만 매번 놀랍기만 하다. 마트에서 장을 보는 일은 그나마 즐거운 일이지만 쓰레기를 처분하는 일은 여간 귀찮은 일이 아니다. 그런데 그 일이 철저히 내 몫이 돼버렸다. 내게 마나님의 하명이 내렸기 때문이다. 어쩌다 내가 가사를 돕는답시고 설거지를 하면 아내는 기겁(氣怯)을 하곤 한다. 난 깨끗하게 한다고 했는데 세제가 묻어있거나 이물질이 남아있거나 하는 일이 잦아서 내가 설거지를 하고 나면 집사람이 꼭 다시 하기 때문에 이중일 한다고 설거지 당번에서 나를 제외시켰다.

얼핏 생각하면 귀찮은 집안일을 줄여줬으니 기분이 좋을 만도 한데, 그나마 내가 할 수 있고 또 생색낼 수 있는 일이 줄어드는 거 같아 그다지 좋은 것만은 아니다. 하여, 나는 쓰레기 치우는 일에 집중하기로 했다. 일주일에 한 번 하는 일이니 그 정도야 즐거운 마음으로 하자는 생각으로 그날도 재활용 쓰레기를 한 아름 안고는 흥얼거리며 엘리베이터를 타려고 기다리고 있었다.

스르르 문이 열리자 40대 초반으로 보이는 남자가 타고 있었다. 재활용 쓰레기를 들고 있는 걸 보면 애처가 아니면 공처가일 텐데 뾰로통한 표정을 한걸 보니 마누라한테 심한 잔소리를 듣고 한바탕 한 듯 보였고 쓰레기도 마지못해 치우러 가는 것처럼 보였다. 미루어 짐작컨데 마누라한테 쥐여사는 공처가임이 틀림없었다. 서로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형식적인 목례만 끄떡하고는 분리수거장으로 향했다. 둘이 무슨 경주를 하듯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걸었다. 경쟁심이 발동한 나는 이에 질세라 빠른 잔걸음으로 그를 앞질러 먼저 도착을 했다. 일단 기선제압에는 성공한 셈이다.

나는 심호흡을 크게 하고 어깨와 목을 간단히 푼 후 재활용 쓰레기 분리수거는 이렇게 하는 거라는 걸 보여주기라도 하려는 듯 본격적인 착수에 돌입했다. 종이는 여기, 비닐은 저기, 빈병은 이쪽에..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니기에 휙휙 던져가며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나의 능수능란한 분리수거 능력에 그는 꽤 놀라는 눈치 었다. 반면 그 사람은 초짜 티를 물씬 풍겼다. 어설프기 짝이 없었고 무슨 쓰레기를 신줏단지 다르듯이 세월아 네월아.. 강태공처럼 여유를 부렸다. 저러다 밤새겠다 싶어 도와주려 하다가도 그것도 다 경험이고 과정이라는 생각에 말년병장이 신병을 바라보듯 느긋하게 지켜보고만 있었다.

거의 마무리가 돼가고 있을 때쯤 라면박스 밑바닥에 눈에 띄는 노트 하나 있었다. 아.. 이건 막내의 그림장이 아닌가! 그림장을 한 장 한 장 넘겨보니 손으로 그린 건지 발로 그린 건지 분간이 안 갈 만큼 유치하고 우스꽝스러웠다. '녀석! 그린 거 하고는..' 하고 너털웃음을 지으며 그림장을 넘기다가 붕어 떼가 그려져 있는 그림을 발견하였다. 전에 살던 집에서 키우는 붕어를 그린 것 같았다. 쓸데없는 그 남자와의 경쟁을 멈추고 막내의 손떼가 묻어있는 그림장을 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곳으로 이사하기 2년 전이었다. 그 당시 붕어를 사서 길렀는데 산란을 하더니 다 죽고 몇 마리만 살아남아 붕어들도 가족을 이루었다. 막내는 붕어에 일일이 이름까지 지어줘 가면서 애지중지 했고, 호수에 방사하는 날도 어찌나 울던지 달래느라 애를 먹었었다. 막내가 그린 그림에는 날짜도 적혀 있었는데 3년 전 막내 생일이었다. 잘 기억이 안 나지만 아마 해외 출장으로 막내 생일 파티에 참석을 못했던 일이 어렴풋이 생각이 났다.

아빠 붕어, 엄마 붕어 형 누나 붕어 등 붕어 가족을 그린 그림이었는데 아빠 붕어만 멀찌감치 떨어져 있는 게 아닌가! 그 당시 막내가 아빠에게 느끼는 정서적 감정을 말해주는 거 같았다. 그러고 보니 막내가 태어나서는 많이 못 놀아줬던 거 같다. 바쁘기도 했지만 나이 들어 저질 체력이 되다 보니 귀찮아했던 것이 사실이다. 학교 운동장에서 막내와 축구를 한 적이 있었는데 10분을 뛰고는 심장이 멈추는 줄 알았다. 도저히 못 뛸 거 같아 그 후로는 이리저리 핑계를 대고 막내와 공놀이를 하지 않았다. 친구들 아빠처럼 함께 놀아주길 원했을 텐데 용돈을 더 주거나 선물을 사주면 되겠거니 쉽게 생각했었다. 아차 싶었다. 분리수거하면서 막내가 갖었던 아빠에 대한 서운했던 마음을 비로소 알게 된 셈이다. 사랑의 언어에는 '칭찬, 선물, 스킨십, 봉사, 함께하는 시간'이 있다고 하는데 막내는 선물보다는 함께하는 시간을 원했던 것이다.

미안한 마음이 밀려왔다. 그리고 막내아들이 그린 그림을 차마 버릴 수가 없어서 간직할 요량으로 가지고 올라왔다. 내가 오늘 알게 된 일을 금세 망각할까 봐서다. 막내아들 방문을 열고 살며시 다가가 사랑한다 말하며 한참을 꼭 안아주었다. 다음에 쓰레기를 버리러 가서는 일에 대한 지나친 욕심, 게으름, 아이들에 대한 무관심도 함께 분리수거해 보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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