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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웃아찌 Jun 05. 2020

슈퍼우먼 아줌마

더불어 사는 세상 이야기


세상에는 나를 남자로 보지 않는 여자 셋이 있다. 첫 번째 여자는 올해로 91세 되신 늙으신 어머니이신데 안부전화라도 할라치면 밥은 제때 먹고 다니는지, 아픈 데는 없는지 오십 줄을 넘긴 아들을 노심초사하시면서 물가에 내 논 철부지 아이를 대하듯 늘 걱정이 태산이다. 가끔 용돈을 드리면 안 쓰고 꼬불치고 있다가 손주들한테 고스란히 주곤 하신다. 아내가 나랑 싸우고는 어머니한테 고자질을 했는지 댓바람에 전화를 하시고는 어미한테 잘하라고 뭐라 잔소리를 해대신다. 어머니한테는 나는 다 큰 남자가 아니라 여전히 코흘리개 애송이일 뿐이다.

두 번째는 아내인데, 나와 첫눈에 반해 남자 중 내가 최고라고 하면서 하루에 적어도 세 번은 볼에 뽀뽀를 해주더니만 아이 셋을 낳고는 씌었던 콩깍지가 벗겨졌는지 그 고귀한 순정은 일찌감치 한강에 던져 버린 지 오래고 지금은 친구로, 아니 어떨 땐 나를 철딱서니 없는 큰아들처럼 대하기도 한다. 나를 편하게 대하는 것에 그다지 불만은 없지만 젊은 시절의 남자로 봐주지 않는 거 같아 서운할 때가 있다.

나를 남자로 보지 않는 마지막 여자는 바로 내가 근무하는 빌딩에서 일하는 일명 슈퍼우먼이라 불리는 청소하는 아줌마다. 뭔 또 실없는 소리 하려나 싶겠지만 가끔 그 아줌마가 스토커가 아닌가 의심 갈 정도로 자주 부딪힌다. 그 밀회 장소는 다름 아닌 남자화장실. 그 아줌마의 일하는 스케줄과 나의 생리적 리듬이 어찌나 딱 들어맞는지 젊을 때 이 정도의 만남의 인연이면 분명 정분나고도 남았을지 싶다.

나이 먹으면 부끄러움이 없어진다고 했던가! 남자화장실에 남자들이 볼일을 보고 있으면 멈칫할 만 도한데 이 아줌마한테 그따위 매너를 바라는 건 차라리 우주선을 타고 달나라 여행을 가기를 바라는 것만큼이나 요원한 일일뿐이다. 심지어는 한창 방화수를 뿌리고 배설의 희열을 맛보며 집중하고 있을 때 발밑으로 느닷없이 대걸레가 불쑥 들어오기도 한다.

"아저씨 발 좀 치워 봐요!"

"아~아줌마!"

" 남자들은 왜 이리 야물지 못 한지 몰라. 남자가 흘리지 말아야 할 건 눈물만이 아니라는 거 몰라요!"

그 바람에 방화수가 끊기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무슨 주도권을 잡기 위한 사랑싸움도 아니고 일부러 그러는 거 같기도 한 아줌마의 이런 대범한 행동이 이젠 놀랍지도 않다. 한마디로 적응이 됐단 얘기다. 이젠 그 아줌마가 등장하면 아예 순한 강아지처럼 다리를 들 준비를 한다. 당당해도 너무 당당해서 건물 주인도, 자기를 채용한 용역 실장도 무서워 않는다. 내 일만 할 테니 자르려면 잘라보라는 두둑한 배짱마저 있다. 슈퍼우먼이라 불리는 데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하지만 그 누구도 불만이나 민원을 제기하지 않는 건 아줌마의 손길이 거쳐 간 곳은 완벽하리만큼 청결한 까닭이다. 그렇게 야무지게 일을 하니 누가 감히 뭐라 하겠는가. 그의 청소하는 모습을 보면 달인의 포스에 전율이 느껴질 정도다.

아줌마는 맡은 구역을 주어진 시간에 임무를 완수해야 하기에 매너고 나발이고 그런 걸 신경 쓸 겨를이 없다. 하나, 그런 아줌마가 이해가 되면서도 아줌마조차 날 남자로 봐주지 않으니 집에서나 밖에서나 나의 남성성을 인정 못 받는 거 같아 서글픈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작년 겨울이었다. 왼쪽 유두 부위에 몽우리가 잡혀 혹시 유방암은 아닐까 싶어 우선 인터넷으로 남자의 유방암 발병 가능성을 검색해 본 적이 있었다. 여자보다 백분의 일정도 발병할 확률이 있다는 게 아닌가! 유방암이 남자에게 무풍지대가 결코 아니었다. 혹시나 해서 모 종합병원을 찾아가 정밀 검사를 받아 보았다. 검사 결과를 받기 위해 며칠 후 찾았더니 의사 왈..

"~으음.. 선생님! 결과가 나왔는데요.."

잔뜩 긴장한 나는 혹시나 유방암이라고 할까 봐 내심 걱정하고 있었다. 의사로부터 결과를 기다리는 것이 마치 사형선고를 받는 죄수처럼 긴장되었다.

"아무것도 아니고요. 남자가 나이 들면 남성호르몬이 줄어들고 여성호르몬이 늘거든요. 선생님 몸이 여성화되는 과정입니다. 크게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내 몸이 여성화되어 가고 있다니.. 남자로서 사형선고를 받은 것과 매한가지 아닌가! 그래서 그리 별 것도 아닌 것에 쉽게 삐치고 떨어지는 낙엽에도 눈물이 그리 났던 건가? 주변 여자들이 날 남자로 아니 보는 이유가 이 때문인가 싶었다. 여자들은 폐경기에 갱년기 우울증이 온다더니 남성성을 잃어가는 갱년기가 나한테도 온 게 분명했다.

몸에 근육 량을 늘리면 좀 나아질까 싶어 헬스클럽을 끊어 열심히 운동도 해 보았지만 안 하던 운동을 무리하게 했더니 온몸에 알이 배겨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나랑 적성에 맞지 않는 거 같았고 또 가만히 생각해보니 내가 이런다고 달리 봐줄 거 같지도 않아 금세 포기하고 말았다.

허튼 돈 쓰지 말고 사무실 건물 10층까지 오르내리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 생각이 들어서 하루는 씩씩거리며 건물 계단을 오르고 있던 중이었다. 깜짝이야! 귀신보다 무서운 게 사람이라더니 7층 비상구 계단 구석에 벽에 기대어 곤히 자고 있는 여자가 있는 게 아닌가! 바로 아침마다 매번 나랑 실랑이를 벌이는 청소 아줌마였다. 청소를 마치고 잠깐 쉬다가 잠이 들은 모양이었다. 그렇게 슈퍼우먼처럼 강인하게만 보였던 아줌마가 풀에 지쳐 자는 모습을 보니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

그래 저 아줌마도 한 남자의 아내이자 아이들의 엄마일 거고 며느리이겠지.. 어쩌면 이 일을 하기 전에는 사모님 소리를 들으며 우아하게 살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각자 저마다의 사연을 가진 사람끼리 어울려 더불어 사는 것이 세상살이 아니겠는가! 저 아줌마를 도와줄 수 있는 건 대걸레질할 때 다리를 흔쾌히 비켜주는 것과 용무를 볼 때 튀지 않게 조절을 잘하는 것 밖에 없구나 생각이 들었다. 곤히 잠든 아줌마 유니폼 오른쪽 주머니에 만원 한 장 넣어주고 행여 잠이 깰까 봐 까치발로 조용히 계단을 올라갔다. 그리곤 무언의 메시지를 전했다.

'슈퍼우먼 아줌마! 힘내시고 내일 아침 화장실에서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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