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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웃아찌 May 19. 2020

손톱

손톱으로 등을 긁는다는 의미


"아니 아니 거기 말고 좀 더 위에.. 어 거기 거기.."

난 어렸을 때 어르신들이 걸핏하면 왜 등을 긁어달라고 하는지 이해를 못했었다. 안 씻어서 그런가? 어머니 말로는 나이 들면 혈액순환이 잘 안 돼서 등이 가려운 거라 하셨다. 시간이 흘러 오십 줄을 넘기고 나서부터는 나도 옛 어른들이 그랬던 거처럼 등을 긁어달라고 하는 일이 잦아졌다. 손이 안 닿는 곳에 가렵기라도 하면 정말 대략감이다. 그렇다고 지나가는 행인을 붙들고 긁어달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친한 지인일지라도 쉽게 등을 들이밀 수도 없는 일이다. 등을 긁어준다는 건 그만큼 허울 없이 지내는 사이라는 반증이니 관계의 깊이를 재는 척도가 되기도 한다.

한 번은 집에 애들은 다 나가고 없고 나와 집사람 밖에 없을 때였다. 등이 가려워 등을 긁어야 했는데, 이번에도 손이 닿지 않는 날갯죽지 밑이 가려웠다. 아무리 손을 등 뒤로 뻗어 봐도 통아저씨가 아닌 이상 도저히 닿질 않았다. 평소 같으면 아내한테 달려가 웃통을 홀라당 벗고는 등짝을 보이며 어 달라 하면 될 일이었지만 전날 사소한 일로 다툰 터라 그러지도 못했다. 등 긁어주는 걸로 알량한 자존심을 버릴 수가 없었다. 그런데 이 날따라 가려움의 정도가 메가톤급이었다. 어찌나 가렵던지 벽에다가도 등을 문질러보고 젓가락으로도 해보는 등 별 생쇼를 부려봤지만 말짱 도루묵이었다.

사실 아내의 손톱이 가장 날카롭고 내 몸 구조를 너무 잘 아는 터라 가장 시원하긴 했다. 난 가려움을 도저히 참을 수 없어 어제 일은 미안하다고 하고선 천연덕스럽게 등짝을 들이밀었다. 자존심이고 나발이고 일단 급한 불부터 꺼보자는 심산이었다. 아내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못 이기는 척하고는 미워 죽겠다고 등짝을 한 대 힘껏 때리고선 평소보다 날카로운 손톱과 강도로 피가 날 정도로 박박 긁어댔다. 감정이 실리다 보니 좀 아프긴 했지만 가려움을 참는 것보다 차라리 그게 나았다. 얻은 소득은 하나 더 있었다. 등을 긁어주는 가벼운 스킨십만으로 아내의 꿍했던 화가 풀렸다는 것.

신혼초에 집사람이 나에 대해 잘 몰랐을 때는 등을 긁어달라고 하면 가려운 데를 찾는데 시간이 걸렸고 말 안 해도 척척 긁어줬던 엄마랑 비교가 되다 보니 그거 하나 제대로 못 긁냐고 짜증을 내고는 관두라며 삐치는 일도 잦았었다. 20년이 지난 지금이야 내가 어디가 가려운 지를 귀신같이 알고는 한 번에 시원하게 긁어주니 아내의 손톱은 이제 내 등을 긁기 위해 최적화된 효자손이 되었다. 아니 내 등짝이 아내의 손톱에 중독되었다고 해야 맞다. 그때 그 시원함이란.. 나만이 느낄 수 있는 희열, 카타르시스를 만끽한다. 그리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표정으로 애정의 눈빛을 보내곤 한다. 내 불편함을 해결해 줬으니 뭔들 못 해주겠는가! 그때만큼은 아내는 나를 지켜주는 수호신이자 여신이 된다. 이런 사람한테 감히 겁 없이 대들었단 말인가!


 등을 긁을 땐 사람의 손톱만큼 좋은 것이 없다. 아마 신이 사람을 만들 때 손톱을 만든 이유는 내가 컨트롤할 수 없는 등이 가려울 때 서로 도와가며 등을 긁으라고 만드신 게 아닌가 싶다. 손톱은 피부 일부가 각질로 변해서 딱딱해진 것으로 사물을 잡거나 걸을 때 충격으로부터 손가락을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 또한 여자들에게 있어서 손톱은 자신을 지키는 최후의 무기로 사용되기도 한다. 귤 같은 과일 껍질을 벗기거나 음료 캔을 따거나 할 때도 용이하한때는 머리에 이를 잡아 죽일 때도 요긴하게 사용되었다. 지금은 네일아트다 뭐 다해서 손톱을 생활 도구가 아닌 패션 혹은 미를 추구하는 용도로 활용하는 추세지만 뭐니 뭐니 해도 손톱은 등을 긁을 때 그 가치가 가장 빛난다 할 것이다.

어느 날 아내가 마트에 장을 보러 갔다 오더니 닭발 모양처럼 생긴 희한한 물건을 하나 들고 왔다. 다름 아닌 등긁기였다. 1미터까지 길이도 충분히 늘어나서 손이 안 닿는 곳이 없는 데다가 닭발 모양처럼 생겨서 시원하게 긁을 수 있으니 참으로 편리했다. 참신한 아이디어가 돋보이는 제품이었다. 이젠 별걸 다 만드는구나 싶었다. 하지만 뭔가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아내가 등긁기를 사 왔다는 건 앞으로 내 등은 알아서 긁으라는 얘기 아니던가! 사실 등을 긁는 건 가려움을 해결하는 것만이 아니라 체온을 느끼고 상대의 필요를 채워주는 마음의 교류였으며, 회해의 방법이기도 했는데 이런 편리함보다 불편함이 사라지는 게 몹시 씁쓸했다. 나는 사람의 손톱으로 긁어주는 게 좋다. 상대가 귀찮아하더라도 내가 살아있는 한 손톱으로 긁어달라고 할 것이다. 내 등만큼은 문명의 이기(利器)에 의존하고 싶지 않아서다.

글을 쓰는 지금도 등이 살살 가려온다. 오래 앉아있다 보니 혈액순환이 안 서 그런 듯하다. 마무리를 빨리 짓고 아내한테 등 긁어 달라고 해야겠다. 온기를 느끼며 마음의 교류를 나눠야 할 시간이다. 등 긁어줄 사람이 곁에 있다는 게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르겠다.


"여보! 나 등 좀 긁어주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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