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마운 나의 츤데레에게
남녀 사이에 친구가 될 수 있을까?
끊임없는 논쟁을 초래해 왔던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나의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나는
“Yes.”
다음은 군입대 이후로 첫 휴가를 나온, 나와 가장 친한 남자 사람 친구(S군이라 부르겠다.)와 나눈 카카오톡 대화이다.
장난기가 발동한 나는 위의 카톡 대화 내용을 고등학교 친구들이 있는 단체 카톡방에 그대로 올렸다. S군의 반응은 다음과 같았다.
나: (위의 사진을 올린 뒤) 미쳤냐 S군?
S군: 뭐
가족 사랑한다고
가 족같은것아
ㅈㅅ
이런 츤데레 같으니라고...
한참을 웃었다. 그렇지만 마냥 코믹스러운 건 아니다. 그와 나 사이엔 “가 족같은 것아” 라고 하는 말이 꽤 진지하고 진실된 말일 수 있으니까. 이 참에 그와 나와의 관계를 새삼 되새겨 보게 되었다. 남녀 사이인 우리가 이렇게 '가 족같은' 우정을 유지하게 된지 올해로 5년이 된 것을 기념하며 그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하고 싶다.
S군과는 고등학교 3년 내내 같은 반이었다. 얼핏 보면 산적같은(?) 이미지를 가진 S군은 평소 원만한 성격에다가 유머까지 갖춘 인기 많은 친구였다. 짝궁도 여러 번 했었다.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우리가 급격히 가까워지게 된 건, 2학년 중국어 시간이었다. 중국어 시간만 되면 눈꺼풀의 하강 운동을 아무런 죄책감 없이 허락하는 S군의 등짝을 자주 후려치곤 했다. (지금 생각하면 너무 짓궂게 군 것 같아 미안하다.)
이렇게 저렇게 친해진 우리는 대학교에 오면서 더 친해졌다. 대학교에 오자마자 물 만난 고기처럼 신나게 연애를 시작한 나와는 달리 S군은 한 번도 연애를 하지 못(‘않’보다는 ‘못’에 훨씬 가깝기에...)했다. 나는 얄밉게도, 남자친구와의 관계에서 속상한 일만 생기면 외로운 S군 앞에게 모두 털어놓았다.
그에게 정말 정말 고마운 에피소드 두 가지.
에피소드1)
작년 추석 당일이었다. 당시 남자친구와의 관계를 지속하는 게 너무 힘들어서 즐거워야할 명절 때마저 내내 기분이 안 좋았다. 친척들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도 편하게 밥을 먹거나 웃고 떠들 수 없었다. 우리 집 명절의 꽃이라 할 수 있는, 섰다치기 게임판을 뒤로하고 나는 외할머니댁 옥상에 올라가 S군에게 전화를 걸었다. 밤 11시가 넘은 시간이었다.
S군: 여보세요? 뭐야 이 시간에 왜?
나: 야 뭐하냐.
S군: 무슨 또 쓸데없는 소리 하려고. 지금 식구들 다 자서 전화 오래 못 받으니까 빨리 말해.
나: 아 그래? 명절인데 벌써 자? 나 할 말 많은데...
S군: 아 또 뭔데... 내가 말하기는 어려우니까 듣기만 해야 돼. 빨리 말해.
나: 있잖아... (엉엉)
이렇게 시작한 전화 통화는 1시간이 넘어갔다. 전화 통화를 마치고 난 뒤에 내 눈은 부어있었지만 마음의 붓기는 한결 가라앉았다.
에피소드2)
올해 초, 남자친구에게 이별을 통보하기로 결심한 날이었다. 유난히 비가 많이 내렸고 하루종일 ‘뭐라고 말을 하고 헤어져야 할지’ 생각한 하루였다. 음식을 떠올리기만 해도 토할 것 같아 아침에 빵 한 조각 먹고 저녁까지 쫄쫄 굶은 상태였다. 도저히 안되겠다 싶어 저녁 7시가 다 된 시간에 나는 다짜고짜 S군에게 전화했다.
나: 야, 너 지금 시간 돼?
S군: 나 이제 수업 끝나서 집에 갈거야. 왜?
나: 야 잠깐 나 좀 보자. 나 지금 너무 우울해. 내일 남자친구랑 헤어질 건데 진짜 계속 토할 것 같고 아무것도 못 먹겠어. 속 비니까 계단 내려갈 때 막 다리 후들거리고. 지금 학교 안 계단에 앉아 있는데 계단 내려가는 것도 겁나네. 잠깐 나 좀 보자.
S군: 헐... 다리가 후들거린다고? 알았어. 학교에 있어봐. 니네 학교로 갈게. 삼사십분 걸릴거야. 다리 후들거릴 정도면 부축해줘? 비와서 미끄러울텐데.
나: 아냐 옆에 난간 잡고가면 돼. 도착하면 전화 해.
40분 뒤에 S군을 학교 앞에서 만난 뒤 신촌 골목에 있는 닭발 집에 들어갔다. 닭발세트(닭발+계란찜+오돌뼈 주먹밥+쿨피스로 만든 샤베트)와 소주 1병을 주문했다. 온 종일 목 구멍 깊숙이 뭔가 차 있는 기분이었는데 그건 내가 털어놓지 못한 말 들이었나보다. 안에 있던 것들을 목구멍 밖으로 다 뱉어버리고 나니 그제서야 눈 앞에 있는 오돌뼈가 맛있어보였다. 대부분 S군의 입 속으로 들어갔지만 결국 우리는 앞에 있는 접시를 모두 비웠다.
문득 S군 없는 나의 학창시절과 대학생활은 어땠을지 생각해봤다. 학교 급식으로 맛있는 음식이 나오던 날, 내 몫을 다 먹은 뒤 처음 받는 척하며 식판 들고 서 있는 나를 보고 ‘두 그릇’이라고 놀렸을 사람도 없었을거고, 그 때를 떠올리며 추억팔이 할 사람도 없었을거고. 아무 때나 심심하면 전화 걸 사람도 없었을테고. "아 나는 연애 안 해봐서 몰라~나한테 말해봤자 뭐하냐."라고 말하면서도 남자친구 험담 처음부터 끝까지 들어주는 사람도 없었을거고. 카톡으로 시덥잖은 농담하는 사람도 없으니 이건 마치 “응답하라 1988”에서 “반갑구만, 반가워요. 반갑구만, 반갑습니다~ 하며” 등장하는 성균(정환 아버지)이 없는 것과도 같다.
S군이 군입대한지도 벌써 4개월이나 됐다. 동생에게 손편지 달랑 한 장 썼던 내가 S군에게는 손편지, 인터넷 편지 합쳐서 10장은 쓴 것 같다. 가끔 가다 이상한 번호(누가봐도 군대에서 오는 전화)가 핸드폰 화면에 뜰 때면 어찌나 반갑던지.
드디어 모레. 4개월 만에 '가 족같은' 그를 만난다. 사진으로 봤을 땐 밤톨 머리가 생각보다 잘 어울리던데 실제로는 어떨지 확인하고 와야겠다. 맛있는 거 많이 사줘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