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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하 Dec 31. 2015

하나님의 뜻은 없다

<예수는 없다>를 읽고

<예수는 없다>, 얼마 전에 교회오빠로부터 받은 책 선물이다. 하하.

이 글을 빌어 감사하다는 말 전하고 싶다. 다른 이들에게도 추천하고 싶을 정도로 훌륭한 책이다.    



책을 읽을 때 엄청난 희열감 내지는 보람을 느낄 때가 있다. 책에 있는 문구나 내용들이 나의 경험과 연결될 때가 그렇다. 비슷한 종류의 사건들이 띄엄띄엄, 어렴풋이 내 기억에 남아 있다가 그것들이 이어지면서 무언가 완성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이 책의 저자가 말하는 ‘하나님의 뜻’이 내 기억들을 불러 모았다.       


하나님의 뜻, 목사님들의 단골멘트 중 하나다. 얼마나 근사한가, 하나님 그리고 그 분의 뜻. 자연과 인간의 모든 섭리를 이처럼 ‘있어보이게’ 설명할 수 있는 말이 또 있을까.      


문득 대학입시를 앞두고 있던 몇 년 전의 나와 내 친구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매년 수능 전후가 되면 학교 분위기가 참 뒤숭숭한데 학교만 그런 것이 아니다. 교회도 그렇다. 수능을 보기도 전에 수시에 합격한 학생들은 얼굴에서부터 티가 난다. 얼굴 핀다는 게 저런거구나 싶다. 수능을 목전에 두고 고3 수험생을 위한 기도회다 뭐다 해서 고3수험생들을 격려하는 행사들이 이어진다. 그때마다 거의 모든 설교와 기도에 빠지지 않는 말이 있다.  


하나님의 뜻에 따라 좋은 결과가 있을거야.


여기서 말하는 하나님의 뜻은 대개 대입 ‘성공’을 전제로 한다.


수능이 끝나고 12월, 1월부터는 본격적으로 합격, 불합격 통보가 이어진다. 누구는 하나님의 뜻이 있었기에 좋은 결과가 있었다며 축하 인사를 듣는다. 그렇지만 누군가는 이 또한(불합격) 하나님의 뜻일 수 있다며 더 좋은 것을 예비하실 거라는 격려(?)를 듣는다. 내년을 기약해야하는 학생들에게 하나님의 뜻이라는 말이 과연 진정한 위로를 줄 수 있을까.     


대체 하나님의 뜻은 뭘까. 설사 누군가에게는 당장의 합격이, 누군가에게는 1년 후의 합격이 결과적으로 바람직했을지라도 그게 하나님의 뜻인지 아닌지 확신할 길은 없다.      


더 극단적인 예를 들어보자.     


작년 문창극 국무총리 후보의 발언에 여론이 들끓었던 적이 있다. 과거 일제의 식민지배와 남북 분단이 모두 하나님의 뜻이었노라 고백했던 문창극 장로님의 파격적 발언 때문이었다.


하나님의 뜻이 대체 어느 범위에까지 갖다 붙여질 수 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묻고 싶다.


식민지배가 하나님의 뜻이라면,     

그 원대한 뜻을 이루기 위해서라면, 일본군의 성욕 해결을 빌미로 아랫도리를 하루에 스무 번이고 서른 번이고 내 주어야 했던 위안부 또한 하나님의 뜻이냐고.         



(위안부 소녀상  출처-노컷뉴스)


저자의 말마따나 ‘하나님의 뜻’이 이현령비현령, 귀에 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식으로 주위에 난무하고 있다. 개인의 차원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대해 격려 혹은 위로 차 말하는 ‘하나님의 뜻’이라면 그것까지는 괜찮다. 적어도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는 않는다. 그러나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일에 함부로, 감히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하는 순간, 그것은 상처를 줄 수도 있고 때론 폭력적일 수도 있다.     


하나님의 뜻인 것만 같은 느낌적인 느낌이 들더라도 그건 내가 혹은 당신이 추측한 하나님의 뜻이다.     


(기독교인이든 아니든 권장하고픈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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