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하지 말고
올해도 어김없이 가족 친지들과 떡국을 먹었다. 식사 후에는 기다리고 기다리던 세뱃돈 수여식이 거행되었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 세뱃돈에 대한 대가를 톡톡히 지불해야한다. 좋게 말하면 어른들의 덕담, 솔직히 말하면 잔소리, 정확히는 오지랖이 그 대가이다. 명절 때 듣기 싫은 소리 중 늘 베스트3 안에 꼽히는 ‘외모 지적’은 우리 집안에서도 유효하다. 정확히는 ‘외모 칭찬’에 따른 ‘비교’가 되겠다.
나에게는 친가와 외가 각각에 사촌 여동생 2명, 사촌 언니2명이 있다. 친가에는 누가 봐도 너무 예쁜, 연예인 제의도 수차례 받아 봤을법한 여동생이 한 명 있다. 우리 엄마며 아빠며 할머니까지 모든 식구들이 입을 모아 예쁘다고 칭찬하기 바쁘다. 사실 나보다 예쁜 사람이야 세상에 얼마나 많은지 알기에 사촌 중 한 명이 출중한 미모를 가졌다는 것과 그걸 두고 칭찬하는 것에 별 생각이 없었다. 꽤 어렸을 때부터 그 한 명을 두고 예쁘다 예쁘다 칭찬하는 것에 익숙해졌고 그들의 칭찬세례에 동조한 적도 많다. 올해도 어김없이 이어지는 칭찬에 별 감흥이 없었지만 친가 식구들과의 모임이 끝나고 외가 식구들과 만난 뒤 내 생각에 변화가 생겼다.
외가 식구들이 모이면 내가 연예인이다. 내가 판단하기에 내가 제일 잘나서가 아니라 이모들과 이모부들, 외할아버지까지 하루에도 몇 번이고 나에게만 예쁘다는 칭찬을 하신다. 아래 상황은 이번 설에 실제로 있었던 일이다.
(나, 사촌언니, 둘째이모가 둘러 앉아 있었다.)
이모: 얘, 너는 진짜 이쁘다. 갈수록 이뻐지네. 딱 아나운서 하면 되겠다. 내가 진짜 이뻐하는 조카.
(옆에 있던 사촌언니를 그제서야 인식하셨는지 사촌언니 등을 쓸어내리며) OO도 내가 이뻐하는데 아무튼, 내가 진짜 이뻐하는 조카.
이모가 그렇게 말씀하시는 순간 헛웃음을 지어 보이는 사촌언니의 표정이 단박에 읽혔다. 그 아무리 덕 있는 사람인들 기분 좋을 리 있나. 예쁘다는 말까지는 백번 양보해서 그렇다쳐도 똑같은 조카인데 한 명만 ‘진짜’ 이뻐한다는 소리를 면전에서 듣게 된다면 얼마나 씁쓸한 기분이 들까. 그 사이에 있었던 나는 사촌언니에게 왠지 모를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렇다면, 친가의 예쁜 사촌동생을 두고 ‘예쁘다’고 말하는 것이 우리 이모가 나에게 ‘예쁘다+진짜 이뻐하는 조카다’라고 말하는 것과 크게 다른 걸까? 진짜 이뻐하는 조카라는 이모의 말은 외모 평가를 넘어서서 편애를 포함하기에 훨씬 나쁜 걸까? 내 생각에 그 둘은 크게 다르지 않다.
진짜 이뻐하는 조카라는 말은 예쁘다는 칭찬의 연장선상에 있다.
이렇게 생각하면 간단하다. 이모 눈에 내가 아닌 사촌언니가 훨씬 예뻤다면 그때도 내가 진짜 이뻐하는 조카였을까? 그렇지 않았을 것이라 확신한다.
이왕이면 다홍치마라고 예쁘고 잘생긴 사람 싫어하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나. 나도 예쁜 사람 보면 좋고 잘생긴 사람 보면 설레는데.
칭찬이든 아니든 누군가의 외모를 두고 이야기하거나 평가 하는 일 자체에 고민이 있었다. 웬만하면 외모 평가를 잘 안하려고 하는데 가끔 누군가에게 ‘너 정말 예쁘다.’ 혹은 ‘너 정말 잘생겼다.’라고 말하고 싶을 때가 있다. 그때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지혜로울지 생각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번 설을 계기로 그런 말이 정말 하고 싶을 때는 어떻게 할지 나만의 규칙을 세웠다.
첫 번째, 그 사람과 내가 단 둘이 있을 때만 외모 칭찬하기.
두 번째, 세 명 이상 있을 땐 눈으로 보고 생각만 하기. 말하지 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