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
어릴 때 외웠던 속담 중 하나이다. 시험에 나온 적도 있는 것 같다. 선생님께서는 이 속담을 설명하시면서 여자와 남자를 등장시키셨다.
“남학생들, 잘 들어. 여자한테 딱 고백했는데 여자가 거절한다고 해서 바로 포기하면 바보같은거야. 포기를 하더라도 10번까지는 찍어봐야지. 그래야 나중에 미련도 안 남는다.”
그래 뭐, 사랑을 쟁취하기 위해선 할 수 있는 데까지 다 해봐야한다는 의미로 말씀하셨겠지만 나는 그마저도 조심스러워야한다고 생각한다.
거절이 거절로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자칫 폭력이 될 수도 있다.
거절을 거절하는 사례 #1
대학교 1학년 봄, 모든 일을 뒷전으로 하고 미팅에 매진하던 시절이 있었다. A대학 학생들과 4:4로 미팅하던 날, 나를 무척이나 마음에 들어 하는 남학생이 있었다. 한참을 놀다가 어느덧 집에 갈 시간이 되었고 그 남학생은 자연스럽게 나의 번호를 물어보았다. 수줍어하며 휴대폰을 내밀던 이들과는 달리 꽤나 용감하게 번호를 물어보길래 번호는 알려주었다. 그렇지만 썩 마음에 드는 상대는 아니었기에 깊은 관계로 발전할 것 같진 않았다. 밥 한 번 먹고 말자는 생각이었다.
문제는 그날 밤부터였다. 그는 이미 내 남자친구라도 된 것 마냥 카톡을 보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그러려니 했는데 갈수록 이건 뭐지 싶었다. 당혹스러움과 함께 조금 겁이 났던 것도 같다. 밥 먹기로 했던 약속, 그냥 없던 걸로 하면 좋겠다고 최대한 조심스럽고 정중하게 내 의사를 그에게 전달했다. 그러자, 간이고 쓸개고 내어줄 것 같이 친절하던 그가 갑자기 돌변했다. 내가 그렇게 칭찬해주고 매너있게 대해줬는데 어떻게 자기에게 이럴 수 있냐는 말부터 시작해서 학교에 찾아 갈 거라는 말까지. 지금보다 훨씬 어리숙했던 당시의 나는 그저 그 상황이 무섭게만 느껴졌다. 별 생각을 다했다.
내 시간표를 알아내어 내가 하교하는 시간에 맞추어 교실 앞에 서 있으면 어쩌지. 이성을 잃은 나머지 나에게 손찌검을 하면 어쩌지. 우리 집 주소까지 알아내서 찾아오면 어쩌지.
겁에 질린 목소리로 친구에게 전화를 했다.
친구: 차단해버려.
나: 아니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차단을 해. 그러다가 더 열 받으면 어떡해. 나 죽이러 올 수도 있잖아.
지금 생각해보면 왜 저렇게도 무서워했는지 이해할 수 없지만 저 날, 잠도 잘 못 잤다. 그 정도로 무서웠다.
3년 정도의 시간이 흐른 지금, 나는 그때만큼 바보는 아니지만 여전히 거절을 거절하는 자와 사투를 벌이고 있다.
거절을 거절하는 사례 #2
정말 열 번 찍어보자는 생각에서였을까. 사귀어보자는 이야기만 세 번째 듣던 날, 한 번만 더 같은 이야기하시면 정말 불편할 것 같다고 하자 그는 그제서야 내 말을 좀 알아듣는 것 같았다. 웬걸, 상대는 끈질겼다. ‘사귀자’ 라는 말만 안 했을 뿐 거의 매일 하루도 빠짐없이 연락하는 것부터 시작해서 지나친 내 건강 걱정, 가끔은 달갑지 않은 맨스플레인까지. 그래, 거기까지는 단답형일지라도 꼬박꼬박 답장을 보냈다. 앞으로도 계속 볼 사람이라는 생각에. 미숙한 면이 있어서 그렇지, 좋은 사람이라는 생각에.
그러나 지금은 답장이 꼭 필요한 최소한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답장을 잘 하지 않는다. 거절도 잘 못하고, 남한테 싫은 소리 잘 못하는 내가 어쩌다 이렇게?
결정적인 사건이 있었다. 내가 묻지도 않은 본인의 성적 페티시를 횟수로만 세 번째 이야기하던 날이었다. 처음 이야기를 들었을 땐 그다지 거슬리지 않았는데 이쯤되니 화가나기 시작했다. 본인의 성적 취향을 말해주는 의도가 뭔지. 다른 사람도 아니고 내가 세 번씩이나 거절한 걸 알면서 같은 이야기를 세 번이나 하는 이유는 뭔지. 뭐 어쩌자는 건지.
거절당하는 사람도 마음 아프고 힘들지만 거절하는 사람도 힘든 건 마찬가지이다. 특히 거절하는 것에 큰 스트레스를 느끼는 나같은 이들에겐. 최근 핸드폰을 쥐고 어떤 거절이 효과적이면서 정중한 것일지 고민하는 나를 발견했다. 그리고 거절은 거절이라는 당연한 이야기를 써보고 싶다는 생각에 노트북을 켰다.
거절은 거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