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일하 Nov 30. 2015

응답하라 1988 말고 2010

보라에게 감정이입되는 이유

“응답하라 1988”


며칠 전부터 격하게 감정이입하며 보고 있는 드라마다. 이제 막 50대에 접어드신 내 부모님 세대부터 10대 학생들에게 이르기까지 다양한 세대들에 걸쳐 호응을 얻고 있는 것 같다. 어느 시대든 사람 사는 모습은 비슷한가보다.


드라마의 스토리는 덕선(혜리)을 중심으로 전개되지만 나는 덕선의 언니인 보라(류혜영)가 더 중심인물처럼 느껴진다. 보라를 보면 학창시절의 나를 보는 것 같다. 그렇게 보라에게 감정이입하면서 보다보니 다른 인물보다도 보라가 등장하는 장면들이 기억에 많이 남는다.     


극 중 보라와 덕선은 세 살 터울 자매지간이지만 나와 내 동생은 한 살 터울 남매지간이다. 때문에 동성 간의 부딪힐 수 있는 지점들이 우리 남매간에는 없다. 가령, 언니의 화장품을 몰래 쓰거나 옷을 몰래 가져가서 벌어지는 싸움, 좋아하는 사람을 두고 벌어지는 삼각관계와 같은 갈등은 나에게 없었다. 그런 몇 가지를 제외하고 내가 ‘그 땐 그랬지.’ 하며 불과 몇 년 전을 회상할 수 있는 장면들이 몇 가지 있다. 그 장면들을 떠올려보려 한다.        


장면1)

보라: 뭐? 지가?

덕선: 그래 지가!!

보라: 너 지금 나한테 지라고 했냐?


(저 정도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동생 참 많이 잡았다. 동생아 미안...)


어렸을 때 동생과 시비가 붙으면 동생은 꼭  “지는,” 이런 말을 자주 했다. 그 말만 들으면 왜 그렇게도 화가 나던지. 극 중 보라도 덕선에게 그 말만 들으면 발끈해서 눈을 치켜뜨는데 그 모습이 꼭 옛날의 나와 내 동생 같다.      


동생이 초등학교 4학년때까지(5학년이 되면서부터 동생의 사춘기로 인해 상황은 전복되었지만...) 나는 겨우 한 살 터울 나는 누나이면서 누나질 노릇을 열심히 했다. 정말 쥐잡듯이 잡을 때도 많았다. 몰래 학원을 빼 먹고 PC방에 들어가 있는 동생을 부모님께 신나서 고자질하기도 했고 맛있는 음식이 있으면 어떻게 해서든 내가 더 먹으려고 했다. 부모님께 이야기하면 동생이 호되게 혼날 것을 알면서도 있는 그대로 일러바치는(?) 것이 누나의 본분이고 잘못된 행동은 그 즉시 바로 잡아야 한다고 생각했던 날들이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나는 참 얄미운 누나였다. 그냥 한 번 눈감아주면 좋았을 것을.     



장면2)

다음은 보라와 자신의 생일이 3일 차이밖에 안 난다는 이유로 보라 생일 축하 겸 아직 오지 않은 자신의 생일까지 같이 챙기는 가족들에게 서운해하는 덕선의 대사이다.     


(아빠 생일이랑 며칠 차이 안 난다는 이유로 저렇게 한 적 있다... 저 기분 잘 안다...)


“하지마 진짜! 내가 얘기 했잖아! 언니랑 같이 안한다고 내가 얘기 했잖아!

왜 맨날 내 말은 안듣는데? 내가 언니랑 생일하기 싫다고 엄마랑 아빠한테 얘기 했잖아!!

작년에도 그랬잖아! 재작년에도! 왜 맨날 나한테만 그래? 내가 만만해?

난 뭐 아무렇게나 해도 되는 사람이야?“     


‘아무렇게나 해도 되는 사람이야?’ 라는 덕선의 말을 듣는 순간 가슴이 ‘쿵’하면서 머리에 떠오른 일이 하나 있다.     


나는 고등학교를 동네에서 꽤나 떨어진 지역에서 다녔다. 스쿨버스를 타기 위해 새벽 5시 반에 기상해서 밤 11시 반 정도나 되어야 집에 올 수 있는 빡센 학교 스케쥴 때문에 수면 부족에 시달렸고 자주 아팠다. 그런 나를 보다 못한 우리 아빠는 나 하나 때문에 학교 근처로 이사를 결정하셨다. 그때 동생은 이제 막 고등학교에 입학해야하는 시기였고 일명 뺑뺑이 방식을 통해 학교를 배정받아야 했다. 불행하게도 우리가 이사 간 곳 주변에는 내가 다녔던 고등학교 외에 다른 학교가 없었다. 그 지역에서 가장 가까운 고등학교라고 하더라도 버스 타고 이십분은 가야 도착할 수 있었다. 동생은 아빠의 간곡하고도 반강제적인 부탁에 '어쩔 수 없이' 이사 가는 것에 동의했고 그 때부터 우리 집은 동생의 짜증으로 하루하루가 폭풍같았다.      


동생은 아빠차를 타거나 버스를 타고 등교했는데 두 가지 모두 동생에게 엄청난 스트레스를 주었다. 아빠 차를 탈 때면 평소 느긋한 성격으로 아침 등교 준비가 느렸던 동생은 아빠의 면박을 들어야 했고 버스를 탈 때면 아침부터 버스에 서서 가야할 때도 많았다. 이렇게 험난한 등굣길을 감수해야 했던 동생은 그 분노의 화살을 나에게 쏘았다.


누나는 학교까지 걸어서 등교하는데 자신은 그런 개고생을 하고 있으니, 아마도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덕선의 말마따나,     

‘나는 아무렇게 해도 되는 사람이야?'


당시 학교를 다니면서도 동생에게 사과를 하곤 했지만 아직도 그때 그 이사는 동생에게 두고두고 미안한 일이다. 나는 그것이, 내가 앞으로 살면서 동생에게 갚아 나가야할 큰 짐처럼 느껴진다.      



장면3)

선우(고경표)가 보라를 짝사랑한다는 것을 알게 된 덕선은 선우에게 대체 성보라 어디가 좋냐며 따져 묻는다. 그 말에 선우는 이렇게 대답한다.     


(저런 멋진 동생이 좋다고 따라 다니는데 철벽치는 성보라님...)


“예쁘고, 착하고, 똑똑하고 그리고 눈 옆에 점도 예뻐.”     


자기 누나 빼고 다른 누나들은 다 예쁘고 착하다는 내 동생의 말이 비단 내 동생의 말만은 아니었나보다. 내 동생의 친구들 중에도 나를 사모하는 남학생들이 있었다. 사실 동생의 친구로부터 대놓고 “누나 좋아한다.” 라고 고백 받아본 적은 없지만 친구 아무개가 누나를 좋아한다느니, 아무개가 누나 예쁘다고 했다는 이야기는 동생으로부터 간혹 듣곤 했다. 극 중 보라의 속마음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내심 기분이 좋았다.


평소에는 귀찮아서 사과 한 번 안 깎아주던 누나가 집에 동생 친구들 놀러오면 사과를 깎고 주스까지 내어오는 그런 친절한 누나로 변하기도 했다. 한 번도 동생 친구를 좋아해 본적은 없지만 (물론, 선우 같은 남학생이었다면 이야기가 달랐을지도 모른다.) 선우를 보며 옛날 그 남학생들이 나를 보며 그렇게 생각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웃음이 났다.




겨우 몇 년 전 일들인데 이렇게 떠올려 보니 오래된 일처럼 아득하게 느껴진다.  동생과 나 모두 대학생이 되면서, 불과 이삼 년 사이에 서로 부대끼며 지내는 시간들이 갑자기 거의 사라져버렸다. 동생은 대학 진학과 동시에 다니고 있는 대학 근처에서 자취를 하고 지금은 군대에 가 있다. 근 2년 동안 일주일에 한 두번, 그것도 잠깐씩 얼굴만 내비췄던 게 전부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참 별 것 아닌 일들로 많이도 싸우고 서로에게 상처를 주었다. 친구들에게는 양보도 잘 하고 화 한 번 내 본적 없던 내가 동생에게는 왜 그렇게도 야박하게 굴었던 건지.


그렇다고 해서 지금 내가 인정 많고 자상한 누나인 것은 아니다. 아직 한참 멀었다 나는.


아직 덕이 많이 부족한가보다.

작가의 이전글 처음으로 그가 울던 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