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업복 입은 이들의 교회

가난한 자를 섬기는 교회를 바란다

by 아포리스트


작업복 차림으로 교회에 갈 수 없던 아버지

우리 아버지는 작업복 차림으로 출근 하신다. 세상에 주 6일 일 하는 직종이 사라졌다지만, 지금도 아버지는 6-7일을 일하신다. 우리집 일에 특성상 현장 일이 많은 까닭에 이런 일이 과반수다. 넉넉히 산적도 없었다. 어쩌면 우리 아버지는 넉넉히 사는 법을 모르실 수도 있다. 매일같이 일을 준비하고, 일을 하시며 저녁에 잠시 쉬는 것에 일평생을 사셨다. 지금도 새벽에 나가셔서 저녁 늦게 들어오신다. 사업을 하시면서 다른 사람을 속인 일도 없으시고, 인건비는 너무 많이 주어서 적자가 날 지경이었다. 다른이들의 사정을 봐주느라 사업은 늘 어려웠다. 그래도 아버지는 성실히 정말 일하셨다. 지금도 일하신다. 내 아버지는 그런 분이셨다. 그래서 작업복 차림일 때가 많으시다. 아니 작업복 외에는 다른 옷은 잠옷 밖에 없다.

우리는 넉넉히 산 적이 없다. 우리 가족은 내가 25년을 살면서 단 한 번도 휴가를 간 적이 없다. 나는 대학생 때 학비지원도 받은 적 없다. 용돈은 물론 휴대폰비도. 우리가족은 좋은 곳에서 외식한 적도 없다. 아버지는 살면서 빕스와 같은 패밀리 레스토랑에 가신 적이 없는 분이시다. 그런 아버지이지만, 헌금은 내신다. 십일조는 물론 감사헌금도 내셨다. 내가 크면서 성경에 대해서 지식이 쌓이면서 ① 십일조는 돈이 있는 사람이 내는 복지자금 ② 세금과 모든 것을 떼고, 남는 돈만 하면 되는 것 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아버지는 단 한 번도 그런 수를 쓰시지 않았다. 자신이 낼 수 있는 모든 것을 하나님께 드렸다. 시간도 드렸다.


아버지는 그랬다. 아버지의 체험 때문인지, 일평생 교회의 가르침대로 사셨다. 아버지는 내 나이 또래에 큰 병을 앓으셨다. 걷지를 못하고, 듣지도 못하셨다. 의사도 못 고치는 병을 오롯이 신앙으로 고치신 이후 아버지는 신앙의 확고함이 생기셨다. 지금도 아버지께서는 한쪽 청력에 문제가 있으시다. 지금도 왼쪽에서 얘기를 하면 듣지 못하신다. 그러나 ‘이만하길 다행’이라며 자신의 삶을 낙관하신다. 아버지의 일생은 병마와 힘든 노동과 싸우셨다. 그런 아버지의 삶을 말해주는 게 작업복이다. 일요일을 제외하고는 그 옷을 그대로 입고 계신다. 작업복이 아니면 잠옷이다. 일요일은 그래도 하나님께 드리는 날이라고 하여서 양복을 입으신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내가 중학교 3학년에서 고등학교 1학년 사이로 기억한다. 아버지가 일찍 교회에서 오셨다. 교회를 가지 않으셨다고 했다. 아버지의 교회 출석 여부는 나로서는 신경 쓰지 않았다. 문득, 아버지와 어머니의 얘기를 들어보니, 아버지가 작업복 차림으로 일을 갔다가 교회에 갈 수 없다고 얘기한 것이다. 부끄러워서라고 한다. 특히 그렇게 교회를 다니면 교회 사람들이 아버지가 하는 일을 이용해서 교회의 잡일을 맡길 때가 많다고 한다. 그런데 양복이라도 입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는 것이 아버지의 말씀이었다. 결국에는 교회 앞을 서성이다가 결국에는 집에 오셨다고 했다(아버지가 입고 다니시던 양복은 단 한 벌 뿐이었다. 여름용 하나, 가을 겨울용 하나가 전부였다.). 아버지의 말은 10년이 지난 지금도 내 마음을 후려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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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업복 입은 자들의 교회
교회는 누구에게나 열린 곳이다. 복음서는 하층민들의 기록이다. 예수는 목수였다. 어쩌면 예수께서는 양복이 아니라, 작업복 차림으로 하나님 나라를 전했을지 모른다. 목수인 예수께서 지금의 양복같은 옷을 입을 리 없다. 또 한 가지 어부들이었던 제자들도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값싼 옷을 입고, 어부들의 작업복을 입고 복음을 전했을 것이 확실하다. 그런데 지금 교회는 양복을 입지 않고서는 들어갈 수가 없다. 그런 곳이 교회다. 성경 대신에 자신들의 의에 취해버린 성도와 목사들, 하나님이 아니라 물신을 섬기는 곳이 교회가 되어 버렸다. 그런 교회에 당연히 기름냄새가 나고, 흙이 묻은 작업복이 어디를 들어갈까? 작업복을 입고 들어가면 성경에도 없는 격식 문제가 될 것이다.


나는 교회 안에 진동하는 향수 냄새가 싫다. 향수 자체보다는 그 의미가 싫은 것이다. 그것은 삶의 고된 현장에서 일하는 대다수의 국민들의 냄새가 아니다. 종교와 자기 체면으로 자신의 삶의 냄새를 가리는 방편으로 느껴진다. 함석헌 선생님의 말씀대로 삶은 고난이다. 고난한 삶의 문턱을 넘은 이들은 피로와 비린내가 나기 마련이다. 자신을 가리기 위해 하는 모든 행동이 가식이다. 예수께서는 가식하는 이들을 싫어하셨다. 교회에서 높고 낮음이 있음을 예수께서 증오하셨다. 그럼에도 교회는 예수와 하나님이 싫어하는 가식과 차별을 떳떳하게 하고 있다. 본인들이 신이다. 본인들이 알고 있는 얄팍한 신학적 지식이 세상 분별의 기준이 된다. 그런 교회는 예수께서 교회가 아니라고 단호하게 말씀하실 것이다.


작업복 차림의 사람들을 통해 복음이 전파된다는 사실을 믿는다. 소외받고 힘없는 민중에서 예수께서 오셨다고 믿는다. 격식을 차리기에 바쁜 이들을 위해 예수께서 오시지 않았다. 단정함, 경건함, 정결함이나 따지면서 사회적 소외층을 밀어내는 신학을 걷어내는 것이 반 성경적이라고 확신한다. 내 아버지와 같은 분이 나는 작업복 차림으로 당당히 교회로 걷어나가기를 간절히 바라고 바란다. 안식일에 월요일을 준비할 수밖에 없는 우리 아버지와 같은 사람들이 월요일을 준비하며 입는 그 작업복과 기름 냄새가 교회에 가득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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