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나안 성도가 쓰는 신앙 에세이
참, 오랜만에 신앙에 대한 글을 씁니다. 어느날 보니 가나안 성도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고보면 최근 5년은 '비그리스도교인'들과 대화를 참많이 나눴습니다. 몇 가지 생각나는 것들 중에 하나는 "정말 신이 존재할까?"라는 물음입니다.
신이 존재할까요? 신을 믿는데 아픈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신은, 개신교의 말로 하나님은 왜 자신을 믿는 사람들을 이렇게 아프게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불의한 세상이 펼쳐지고, 강자가 약자를 짓밟아 버리고 있습니다. 왜 누군가는 '금수저'로 태어나 아르바이트 한 번 안해보고 잘 사는데, 왜 누군가는 흙수저로 태어났을까요. 작게는 군대 선임, 직장 상사를 잘못 만나서 마음 고생하는 사람들은 대체 왜 생길까요.
이 질문은 오랜 시간 동안 신앙인들을 교회에서 발을 돌리게 했습니다. 많은 신앙인들이 자신의 불우한 환경을 교회와 신이 해결해주지 못한다 생각해서 교회를 떠났습니다. 그 누군가는 간증대 위에서 '하나님을 믿었더니 잘됐다'는 고백을 합니다. 이를 통해 누군가를 교회 안으로 끌어들였고,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보는 증거가 되기도 합니다.
또 다른 점은 신의 존재는 과학적으로 증명이 불가능합니다. 창조과학회가 아무리 노력해도, 신의 존재를 과학적으로 입증할 방법은 현실적으로 없습니다. 그렇다면, 신은 필요없는 존재가 되어 버릴 것 같습니다. 신의 가르침이라고 불리는 성경은 이러한 '권능함'을 묘사하는 '고전'은 될지 몰라도, '과학서'는 될 수 없습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대체 이런 현실에서 신의 존재를 우리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성경을 믿는 분들은 '예수의 신앙'이 필요하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예수는 항상 힘없고, 소외받은 그들의 손을 잡아주었습니다. 엘리트들의 우월함을 부끄러움으로 바꿨습니다. 그 시대, 하층민에게도 소외받던 그들의 손을 잡아주었습니다. 불의와 싸우는 정의를 보여주었습니다. 성경 속 정의는 남의 말이 틀렸다는 무례함이 아니라, 그 시대 아픈 내 이웃들의 손을 잡아주는 행위였습니다.
인간은 "신의 형상(창 1:26)"으로 만들어졌다고, "친히 지음받은 존재(창 2:7)"라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과학적으로 신의 존재를 증명하려는 노력만큼 무력한 일은 없었습니다. 신의 존재를 옹호하고, 증명하는 길은 '신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인간이 어떻게 사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그 삶은 성경 곳곳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가난한 정의의 길을 걷다가 외톨이가 된 사람, 강자의 부당함을 지적하다가 곤란해진 사람, 하나님과 이웃에게 헌신하기 위해 자신의 것을 포기한 분들의 삶이 회자되길, 신의 존재가 증명되길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