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아포리스트 Apr 28. 2019

아픈사람들에게 과연 신이 존재할까요?

가나안 성도가 쓰는 신앙 에세이  

참, 오랜만에 신앙에 대한 글을 씁니다. 어느날 보니 가나안 성도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고보면 최근 5년은 '비그리스도교인'들과 대화를 참많이 나눴습니다. 몇 가지 생각나는 것들 중에 하나는 "정말 신이 존재할까?"라는 물음입니다.


신이 존재할까요? 신을 믿는데 아픈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신은, 개신교의 말로 하나님은 왜 자신을 믿는 사람들을 이렇게 아프게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불의한 세상이 펼쳐지고, 강자가 약자를 짓밟아 버리고 있습니다. 왜 누군가는 '금수저'로 태어나 아르바이트 한 번 안해보고 잘 사는데, 왜 누군가는 흙수저로 태어났을까요. 작게는 군대 선임, 직장 상사를 잘못 만나서 마음 고생하는 사람들은 대체 왜 생길까요.


이 질문은 오랜 시간 동안 신앙인들을 교회에서 발을 돌리게 했습니다. 많은 신앙인들이 자신의 불우한 환경을 교회와 신이 해결해주지 못한다 생각해서 교회를 떠났습니다. 그 누군가는 간증대 위에서 '하나님을 믿었더니 잘됐다'는 고백을 합니다. 이를 통해 누군가를 교회 안으로 끌어들였고,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보는 증거가 되기도 합니다.  


또 다른 점은 신의 존재는 과학적으로 증명이 불가능합니다. 창조과학회가 아무리 노력해도, 신의 존재를 과학적으로 입증할 방법은 현실적으로 없습니다. 그렇다면, 신은 필요없는 존재가 되어 버릴 것 같습니다. 신의 가르침이라고 불리는 성경은 이러한 '권능함'을 묘사하는 '고전'은 될지 몰라도, '과학서'는 될 수 없습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대체 이런 현실에서 신의 존재를 우리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성경을 믿는 분들은 '예수의 신앙'이 필요하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예수는 항상 힘없고, 소외받은 그들의 손을 잡아주었습니다. 엘리트들의 우월함을 부끄러움으로 바꿨습니다. 그 시대, 하층민에게도 소외받던 그들의 손을 잡아주었습니다. 불의와 싸우는 정의를 보여주었습니다. 성경 속 정의는 남의 말이 틀렸다는 무례함이 아니라, 그 시대 아픈 내 이웃들의 손을 잡아주는 행위였습니다.


인간은 "신의 형상(창 1:26)"으로 만들어졌다고, "친히 지음받은 존재(창 2:7)"라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과학적으로 신의 존재를 증명하려는 노력만큼 무력한 일은 없었습니다.  신의 존재를 옹호하고, 증명하는 길은 '신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인간이 어떻게 사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그 삶은 성경 곳곳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가난한 정의의 길을 걷다가 외톨이가 된 사람, 강자의 부당함을 지적하다가 곤란해진 사람, 하나님과 이웃에게 헌신하기 위해 자신의 것을 포기한 분들의 삶이 회자되길, 신의 존재가 증명되길 기도합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창문 없는 방> 책소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