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노력, 그리고 부모의 노력이 더 많이 필요하다.
화두는 불평등
화두가 불평등이다. 최근 사회과학 출판 시장을 달군 책은 대부분 불평등에 대한 책들이다. 특히 세대 문제와 연결되어서 좋은 저작들이 많이 나왔다. 이철승 서강대 교수의 <불평등의 세대>, 조귀동 선생의 <세습 중산층 사회> 등이 그것이다. 이제 화두는 불평등이다.
불평등이 문제인 것은 모두가 알지만, 뭔가 불충분하다. 우리나라에서는 '도덕적 차원' 정도에서 이를 접근하는 듯한 느낌이 든다. 약간의 불평등이 있더라도, 성장이 우선 되어야만 하는 것이 아니냐고 묻는다. 결정적으로 불평등한 것이 뭐가 그리 큰 문제냐는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이 있다. 불평등이 자신의 이야기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불평등하다는 것은 격차가 벌어지는 것이다. 쉽게 말해서 "잘사는 사람은 잘살게 되고, 못사는 사람은 못살게 되는" 상황이 심화되는 것이다. 성장이 되는 것 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분배가 되는 것이다. 혹자는 성장하여서 파이를 키우면 되지 않겠냐고 얘기하지만, 큰 파이가 만들어진다고 하여서 그것이 내 몫이 되지 않는다 몫이 커지는 것과 파이가 커지는 것은 다른 문제다.
경제성장은 물가도 함께 오른다. 2000년 대에 700원에 사먹던 삼각김밥이 이제는 1100원정도는 주어야 사 먹을 수 있다. 짜장면 한 그릇에 2500원이었던 시절에서 이제는 4500원은 주어야 사먹을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물가가 오르는 만큼, 임금이 오르지 않을 수 있다. 물가가 3%오를 때, 임금이 그 이상으로 오르지 않는다면 우리 삶은 점점 어려워지게 된다. 그러니 커지는 파이만큼이나 내가 가져갈 몫이 공적으로 커져야 한다. 그래야만 실제적으로 임금이 오른다는 이야기다. 경제학에서 말하는 '실질임금'이라는 개념이 그것이다.
노력으로는 안 되는가?
불평등에 대해서는 노력에 대해서, 그리고 공정성에 대해서 늘 시비가 있다.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해서는 기업이든, 국가든 복지를 실시해주어야 한다. 한국의 고용구조는 산별보다는 기업별로 이루어져 있다. '어떤 기업에 들어가느냐'가 그래서 굉장히 중요한 일이었다. 과거에는 비교적 괜찮은 복지와 높은 임금을 가지면서도, 안정적인 일자리들이 많았다. 쉽게 말해서 '대기업 내지 공공기관 정규직' 일자리이다.
그러나 이러한 일자리에 신규 채용은 줄어들고 있다. 여기에 대한 자료들은 굉장히 많다. 한 가지만 보자. <동아일보>에 2018년 11월 05일자로 실린 "비정규직 비중 더 커진 기업 일자리"에 따르면, 전체적으로 비정규직 일자리와 정규직 일자리 수가 이제 비슷해지게 됐다. 그뿐 아니라, 공공행정 부문 저임금 일자리가 계속해서 증가를 하고 있다. 300인 이상 대형 사업장에서 지속적으로 '정규직 일자리'가 감소하고 있다.
이러한 점은 일자리의 변화로 인한 구조적인 문제다. 탈산업화가 진행되고, 인터넷 중심 산업이 오면서 사무직 일자리가 지속적으로 감소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대졸자가 갈 수 있는 일자리가 줄어드는 것이다. 문과 출신들은 잘 알겠지만, 최근 뽑는 일자리는 소수 전문직과 해외 영업직이다. 공학대 일부만 뽑는다. 대졸자가 일반적으로 취업할 곳이 마땅치 않은 것이다.
노력을 하면 이정보다는 좋은 곳에 갈 수 있다. 또한 중간 이상 갈 수 있다. 그러나 불평등이 심화되면 심화될 수록 이러한 노력을 더욱 더 기울여야 한다. 구조 변화에 걸맞게 설계된 복지제도와 사회안전망은 개인이 노력하지 않아도 빈곤에서 벗어나는 디딤돌이 되어 준다. 그러나 이를 노력으로 넘어간다는 것은, 재능적으로 100M를 뛸 수 있는 사람이, 150M를 뛰려고 하고자 하는 것이다. 능력이 좋아도, 그에 걸맞는 구조가 뒷받침이 안 되면 노력만으로는 어려운 게 현실이다.
개인의 노력만으로 안 될때, 우리나라에서기댈 곳은 부모 혹은 가족이다. 국가 복지제도가 되어 있지 않았던 시기 사람을 길러냈던 것은 헌신했던 부모세대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불평등이 심화된다는 것은 이런 부모의 노력이 더 필요하다는 이야기다. 좁아져가는 중산층의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 더 많은 비용을 투자해야지만이 과거만큼 누릴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