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기성세대, 무능한 청년을 탓하다.

보수의 '노오력 부족론'과 진보의 '20대 개새끼론'

by 아포리스트



들어가는 말
본격적인 청년담론을 논하기전에 우선적으로 기존청년담론을 보는 것이 먼저다. 진보에서는 20대에 정치참여에 대해서 비판한 '20대 개새끼론', 보수에서는 '노오력 부족론'으로 요약될 수 있다. 우선 이 담론을 먼저 접한 후에 본격적인 이야기를 시작하도록 하겠다. 이 이야기를 통해서 기존 담론이 청년들을 어떻게 봤는지를 생각해보고자 한다.

너희는 무능한 존재야!

최근 가장 눈에 띄는 현상 중 하나는 청년이 빈곤층이 됐다는 것이다. 사회적으로 청년 문제가 대두가 되면서 청년이 복지의 수혜를 받는 계층이되었다는 것이다. 청년들에 대한 지표는 양적으로만 문제가 있는 게 아니다. 사회 담론에서도 청년들은 취약 계층으로 지목되었다. 청년들은 고용, 주거, 생활 전반에 걸쳐서 도움이 필요한 계층으로서 바뀌었다. 과거 ‘사회변혁의 주체’였던 청년들은 ‘무능한 존재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이것이 사실상 20대 담론의 시작이었다.

20대의 부족을 탓하는 것은 진보와 보수를 가리지 않는다. 우리나라에서 20대라는 존재는 나약하고, 무능한 존재일 뿐이다. 2000년대 급등한 실업률 등에 대해서 제대로 대응도 하지 않은 채 스펙 쌓기에 집중하는 청년들이 무능하기 짝이 없게 보인다. 보수 입장에서는 열정이 없다. 새로운 일에 도전하지 못한다. 최선을 다해서 삶을 개척했던 기성세대와는 달리 안정적인 일을 찾는 것이 현재의 청년 세대다. 진보입장에서는 정치에 무관심한 20대는 황당하기 짝이 없다. 살얼음판이었던 군사정권의 탄압 속에서도 학생운동을 이어 갔던 기성세대와는 달리 청년들은 할 줄 아는 게 없다.


보수의 청년세대 비판: "해보긴 했어?"

보수에서 하는 청년 비판은 ‘노오력담론’과 이어진다. 지금까지도 보수에서 하는 20대개새끼론을 비꼬는 것이 바로 이 노오력 담론이다. 최근에는 조금 지난 담론이지만, 20대들의 청년고용 등의 문제는 나약한 20대 탓이라는 것이 보수에서 말하는 20대 담론이었다. 이런 청년 세대들의 무능을 탓하는 것도 당연하다. 현 청년들의 아버지, 어머니 세대의 청년기에는 사회가 정말 빠른 속도로 바뀌었다. 교과서적인 얘기로 한국은 서구가 200년 만에 이루어낸 것을 50여년 만에 이루었다. 그 부작용으로 기성세대는 정말 빠르게 변화하는 사회를 경험했다.

산업화에 역꾼으로서 도전하면 이루어내는 것이 현 기성세대였다. 정주영 같은 이들은 ‘하면 된다’로 일관하여서 지금의 한국 담론을 만들어냈다. '하면 된다'라는 시대의 살았던 사람들이 볼 때, 청년들의 무능은 답답하기만 하다. '노가다'라도 뛰면서 돈을 벌었다. 자기계발서에서 나오는 여럿 성공신화는 지금의 청년들이 답답해 미칠지경으로 보이게 만드는 안경 역할을 하고 있다.

기성세대가 경험한 세상과 지금의 세상은 다르다. 사회는 정말 천천히 변화하고 있다. 이제 빠른 변화와 역전을 경험하기는 어려운 세대가 현재의 청년세대다. 그럼에도 그들이 변했던 청년시기의 변화는 20대들이 못하는 것에 화가 날 뿐이다. 보수의 ‘노오력 담론’은 정말 암담한 얘기다. 사실 허황된 일에 여럿 투자했다가 안된 사람들을 보고자란 청년 세대가 그런 일을 하기는 쉽지가 않다.


진보의 비판: 보수보다 더 두려운 "20대 개새끼론"

보수보다 더 두려운 20대 개새끼 담론이 진보의 20대 담론이다. 이들은 정치 문제와 이를 잇는다. 20대 개새끼론의 주된 이들은 주로 ‘중년 진보층’이다. 이들의 논지는 20대들이 투표를 하지 않아서 그렇다는 결론으로 이어진다. 대표적인 ‘20대 개새끼론’ 중 하나가 프랑스, 독일 등의 대학생 투표율이다. 대학생 투표율이 80%가 넘는 유럽에 비해서 우리가 등록금이 높은 것은 당연하다는 식이다. 이들의 정치로서 성공한 세대들에 걸쳐 있다. 하나의 글을 보자. 이 글은 진보지식인 중 홍세화의 글이다. 후술하겠지만, 홍세화의 88만원 세대의 담론 때는 그 입장이 바뀌게 된다. 칼럼을 발췌해보면 이렇다.

[특별칼럼] 그대 이름은 '무식한 대학생' - 홍세화

그대는 대학에 입학했다. 한국의 수많은 무식한 대학생의 대열에 합류한 것이다. 지금까지 그대는 12년 동안 줄세우기 경쟁시험에서 앞부분을 차지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영어 단어를 암기하고 수학 공식을 풀었으며 주입식 교육을 받아들였다. 선행학습, 야간자율학습, 보충수업 등 학습노동에 시달렸으며 사교육비로 부모님 재산을 축냈다. 그것은 시험문제 풀이 요령을 익힌 노동이었지 공부가 아니었다. 그대는 그 동안 고전 한 권 제대로 읽지 않았다. 그리고 대학에 입학했다. 그대의 대학 주위를 둘러 보라. 그 곳이 대학가인가? 12년 동안 고생한 그대를 위해 마련된 '먹고 마시고 놀자'판의 위락시설 아니던가.

그대가 입학한 대학과 학과는 그대가 선택한 게 아니다. 그대가 선택 당한 것이다. 줄세우기 경쟁에서 어느 지점에 있는가를 알게 해주는 그대의 성적을 보고 대학과 학과가 그대를 선택한 것이다. '적성' 따라 학과를 선택하는 게 아니라 '성적' 따라, 그리고 제비 따라 강남 가듯 시류 따라 대학과 학과를 선택한 그대는 지금까지 한 권도 제대로 읽지 않은 고전을 앞으로도 읽을 의사가 별로 없다. 영어영문학과, 중어중문학과에 입학한 학생은 영어, 중국어를 배워야 취직을 잘 할 수 있어 입학했을 뿐, 세익스피어, 밀턴을 읽거나 두보, 이백과 벗하기 위해 입학한 게 아니다. 그렇다면 차라리 어학원에 다니는 편이 좋겠는데, 이러한 점은 다른 학과 입학생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 '인문학의 위기'가 왜 중요한 물음인지 알지 못하는 그대는 인간에 대한 물음 한 번 던져보지 않은 채, 철학과, 사회학과, 역사학과, 정치학과, 경제학과를 선택했고, 사회와 경제에 대해 무식한 그대가 시류에 영합하여 경영학과, 행정학과를 선택했고 의대, 약대를 선택했다.

2003년의 홍세화에 인식에서 20대는 무능한 존재다. 주입식 교육과 줄 세우기 경쟁 속에서 새로운 것을 개척하지 못한다. 홍세화는 현재까지도 진보를 대표할 수 있는 인사다. 한 번 얘기하지만, 홍세화의 당시 인식에서 이런 말이 나오는 것은 답답하기 짝이 없는 청년들을 보고 한 말이다. 청년들은 전공에 대한 흥미, 학문에 대한 흥미가 거의 없는 이들이다. 사회 문제 의식 따위는 찾아볼 수조차 없다. 그런 청년들이 인문학의 위기, 그리고 이 사회의 위기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홍세화만 이 '20대 개새끼론'을 주장했던 것이 아니다. 현재 진보라고 할 수 있는 수많은 이들이 이러한 '20대 개새끼론'을 펼쳐서 20대들을 비판해왔다. 이제는 입장을 바꿔서 '그들을 위로'하는 김용민 PD, 이재명 성남 시장 등도 20대 개새끼론의 주역이었다.


“전쟁은 노인이 일으켜서 청년이 치른다”


우리가 하나 주목해야 할 것은 '20대 개새끼론'은 사실상 허구라는 것이다. 양적인 데이터를 보면, 한국의 20대가 유독 투표율이 낮지 않다. 국제적인 비교를 하더라도, 20대들이 투표율이 심각한 수준으로 낮지 않다. 여기서는 이것이 주제가 아님으로 건너뛰도록 한다.


2030.jpg 20대 투표 캠페인의 모습 출처: 레디앙(http://www.redian.org/archive/42403)

사실이 논쟁을 보다보면, “전쟁은 노인이 일으켜서 청년이 치른다” 이 떠오르고는 한다. 친구가 이 말을 알려주는데, 나 역시도 동의하는 말이다. 문제는 전 세대에서 만들어서 현 세대가 짊어지게 된다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현재의 제도, 문화 등은 구시대의 산물이다. 관습과 제도는 변화를 거듭하지만, 결정적인 국면이 없는 이상은 점진적으로 변화한다. 특정 시대에 산물은 역사적인 결과다.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여러 경제구조적 여건은 오랜 시간동안 축척된 역사적인 결과물이다.

청년들이 무능하다고 비아냥거리는 ‘20대 개새끼론’자들의 주장과는 달리 이 시대의 그 어떤 문제도 청년들이 만든 것은 거의 없다. 현재 고용체계, 조직문화 등 청년들이 태어나기 전에, 혹은 어린 시절에 만들어진 것이다. 청년들은 어려운 시대에 살고 있는 것 뿐이다. 물론 역사의 순간에 청년들도 항상 함께 있는 것이다. 현 시대 그 어떤 것도 구 시대에서 만들어진 산물에 우리가 살고 있을 뿐이다. 다음 세대를 제대로 준비하지 못한 탓이지 청년들이 만들어 낸 것이 아니다. 20대 비판론자들은 젊은 세대 중 특히 대학생 계층에게 사회 변혁 운동의 선도를 주문하고 있다. 하지만 과거의 대학생들 대부분은 대학 진학률이 낮은 탓에 전체 상위 10% 정도의 인재들이었던 반면 오늘날에는 대학 진학자가 80%를 넘어섰을 정도인지라 과거 기준이라면 대학에 들어가지 못했을 사람들조자 대학 간판을 달고 있게 되었다. 즉 대학생의 범주가 크게 확장되었기에 그들이 말하는 인텔리는 현재 대학생 중에서도 일부에 불과하다.


20대 비판론자가 대학을 다니던 시기는 정치적으로는 암울했지만 일단 대학을 졸업하기만 하면 취업이 매우 쉬운 세대였다. 그로인해 학사관리나 취업준비 등에 신경 쓸 일이 적어서 군대만 다녀왔다면 나름대로 사회참여를 할 시간적, 정신적 여유가 많은 상황이었다. 일반화하기 힘들지만, 간단하게 말하면 이 시대는 데모도 하고, 연애도 하고, 취직도 셋 다 할 수 있었던 시대였다. 반면에 젊은 세대는 대부분 외환위기 이후에 대학에 진학하여 극심한 취업난 때문에 취업준비나 스펙 관리 외적인 면에 시간적, 정신적 관심을 두기 어려운 세대란 점을 생각해야 한다.


결정적으로 청년들은 힘이 없다. 현재 사회구조는 20대들이 만든 것이 아니다. 20대들은 기성세대가 만든 사회 구조 속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오히려 '희생자'로 보는 게 훨씬 더 적합하다. 이런 20대 비판에 대한 무용론은 예전부터 지금까지 진행이 되었다. 현재 청년들을 옭아매고 있는 노동시장의 이중구조, 분절화 등은 현재 청년들이 만든 게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바꾸지 못하냐'며 윽박을 지르는 것은 어른으로서 옳은 일이 아니라고 나는 생각한다. 또한 현재의 20대 담론 역시도 그것이 옳지 않음에도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

문제는 이 프레임에 갇힌 것이 20대 본인이라는 것이다. 20대들이 이런 담론에 너무 익숙해져버린 나머지 다른 이들을 질타하는 20대로 둔갑해 버린다. 20대들이 이런 ‘20대 개새끼론’의 담론에 너무 익숙해져버려서, 같은 20대끼리의 질타를 한다는 것이 문제다. 20대들이 386세대의 들의 담론을 그대로 답습하여서 논한다. 20대들끼리 물고 뜯으면서 20대 개새끼론에 선두주자가 된다. 우리의 모습을 아니꼬아 하는 기성세대의 담론을 답습하여서 사회의 모든 부분을 논하는 청년들이 존재하고 있다. 20대들끼리의 차별적인 생각과 배제 담론이 더 무서운 문제다. 청년이 같은 청년을 차별하는 모습에서 우리는 두려움을 느낀다. 20대들의 차별의 담론은 결단코 가벼운 문제들이 아니다. 청년 간의 연대도 어려움이 기성세대 담론에 갇힌 청년들 역시 존재한다는 것이다. 현재 청년 세대의 문제를 청년들의 무능함을 탓하는 것이 문제다.


노오력 부족론, 20대 개새끼론, 청년담론을 만들어 내다.

그러나 앞으로 전개할 청년담론은 이 두 가지에 대한 비판으로 만들어졌다. 지금 말하면 '꼰대' 내지 '뜰딱이(노인들을 비하는 비속어)'로 이야기할지 모르는 얘기들이 사회적으로 통용이 됐다. 현재의 20대 담론들에 눌린 채로 20대들은 스펙경쟁에 본격적으로 들어가게 된다. 그러나 개인의 스펙으로는 될 수 없다는 담론이 슬슬 나오기 시작한다. "단군이래로 가장 좋은 스펙"을 가지고 있다는 청년들이 신기할 정도로 취직이 안 된 것이다. 이러한 담론들에 대한 비판들이 연이어 등장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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