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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포리스트 Dec 02. 2017

노동가치의 차별을 당연시 하는 교육1

그래, 나는 잉여인간이었다 


 너 대학 못가면 뭔 줄 알아잉여인간이야잉여인간이 뭔 줄 알아인간 떨거지 되는 거야이 새끼야!”

-영화 <말죽거리 잔혹사대사 중 -

 위에 대사는 영화 <말죽거리 잔혹사>에서 교사가 학생에게 한 말이다. 우리 사회, 더 안으로는 우리 교육에서 노동자를 어떻게 보는지에 대해서 가장 잘 나타낸 대사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저대사 속에는 우리 사회 속 노동가치의 몰이해가 대사 속에 그대로 담겨져 있다. 사실 저기서 말하는 ‘잉여인간’이나 ‘인간 떨거지’는 아마 노동시장에서 하위계층을 비꼰 말일 것이다. 1970년대 상황을 대학을 못가서 하는 일들은 취약계층 노동이었을 것이다. 지금 시대로 봤을 때, 공부를 조금 못해서 되는 잉여인간이라면, 비정규직일 것이다.  나 역시 저 영화 대사에서 말한 ‘잉여인간’이자, ‘인간 떨거지’였을지 모른다. 나는 대학 졸업 후에 “비정규직, 하청업체, 블루칼라” 노동자로 일을 잠시 했었다. 이 에세이는 대학을 졸업 한 후 첫 직장으로서 비정규직 육체노동자로 일하면서 들었던 생각들을 정리한 글이다. 우리 사회는 정규직-비정규직/ 화이트칼라-블루칼라/ 대기업-비정규직으로 심각하게 ‘이중화’가 되어 있다. 나는 이중화된 노동시장에서 “비정규직, 하청업체, 블루칼라 노동자”로서 있었다. 그러면서 여러 생각이 들었다. 이중화된 노동시장에서 ‘천한노동’과 ‘귀한노동’으로 암묵 지어진 우리 사회를 말하고자 한다. 

나는 당연히 차별 받아야’ 한다 
나는 비정규직 육체노동자로 일하는 시간동안, 비정규직 건설노동자가 사회적으로 얼마나 열악한 존재인지 알게 됐다. 비정규직 노동자는 크게 다치지 않는 이상 일해야 했다. 한 번은 일을 하다가 전동 드라이버에 장갑과 함께 손가락이 말려 들어가서 크게 다칠 뻔했다. 약간 삔 정도에서 끝이 나서 다행이었지, 잘못하면 큰 사고로 이어질 수 있었던 상황이었다. 그런데 곧 나는 산재가 안 되는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됐다. 건설현장에서 일하는 비정규직 청년들에게 산재보험 대신에 월급을 조금 더 주는 형태로 일을 시킨다. 이러한 월급 형태는 하나의 관례다. 비정규직은 내가 조심해서 일하는 방법 밖에 없다.  크게 아프거나 다친 것이 아니면 일해야 하는 게 비정규직이다. 대기업 건설현장에서 일을 했을 때, ‘다쳤다’고 한다면, 작업 현장에 못 들어가게 된다. 일당형태로 돈이 지급이 되는 건설현장 노동자는, 하루를 쉰다는 것은 월급이 그만큼 차감된다는 것이다. 혹시 몸이 아프더라도, 돈이 급하면 아프거나 다친 사실을 숨기기도 한다. 당시 나도 돈이 급했기 때문에, 그냥 일을 했다. 노동권과 사회보장권으로 보장되어 있는 법적 권리마저 비정규직, 그것도 비정규직 육체노동자는 숨겨야 하는 것이었다. 비정규직 노동자가 아프고, 다친 것은 그저 엄살에 불과하다. 비정규직은 다쳐서도, 아파서도 안 된다.    

 비정규직의 처우가 열악한 이유 중 하나는 노동가치의 몰이해 때문이다. 화이트칼라-정규직의 노동은 많은 값어치를 주어야 하는 비싼 노동이다. 반면 비정규직 비정규직의 노동은 귀한 게 아니라,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저렴한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지만, 우리 사회는 수많은 비정규직의 노동이 없으면 돌아가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 노동의 가치는 인정받지 못한다. 편의점 아르바이트생, 텔레마케터, 등 비정규직의 노동으로 이 사회가 움직여지고 있다. 내가 일했던 건설현장은 대기업의 산업 단지였다. 그곳 건물을 세우는 데, 나도 약간은 일조했다. 그러나 그것은 그 누구도 인정 해주지 않는다. 

 노동가치에 대한 몰이해는 비정규직의 처우를 열악하게 만든다. ‘그만한 월급으로, 그만한 대우를 받아야 한다’는 인식이 사회를 지배하고 있다. 노동의 가치는 사회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이다. 나는 건물을 쌓고 있던 노동자였었다. 그 일은 실제로 건물을 쌓아가는 사람 중 하나였다. 그러나 그 가치는 사실 불필요하게 여겨진다. 나 아니어도 할 사람이 많다는 사회적 믿음 때문이다. 내 노동가치가 귀했다면, 내 위험에 대한 사회보험이 당연히 보장이 됐을 것이다. 또한 아팠을 때에 쉬어도 임금이 깎일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럴 필요를 사회적으로 인정받지 못한다. 

 나 역시 노동에 대한 차별을 정당화했었다. 나 역시 내가 ‘못난 노동’을 하기 때문에 당연한 취급을 받는다고 생각했었다. 사실 못나거나 천한 노동이 아니었다. 내가 한 일은 대기업의 건물을 쌓는 일이다. 그러나 내가 하는 일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에 차별 당해야 하는 것으로 여기고 있었다. 내가 하는 일은 속된 말로 ‘노가다’였기 때문에 사회적인 차별을 한편으로는 정당화 하고 있었다. 특히 그런 일이기 때문에 비정규직으로 일하는 게 당연하다고 봤다. 보호를 받을 이유도 없다고 봤다. 이러한 노동가치의 몰이해는 사회 전반을 지배하고 있다. 나만 그런 것은 아니었다. 일하는 사람들도 차별을 당연시 여기고 있었다. 우리 사회는 노동가치를 짓밟고, 여기에 따른 차별을 정당화 하고 있다. 이러한 차별은 ‘구별짓기’ 이데올로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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